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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 호수 소묘(石村 湖水 素描)
1. 인연
내가 석촌 호수에 처음 둥지를 튼 것은 1988년 7월 10일,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잠실 월드 호텔에 근무를 자원 하면서부터 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만 17년이나 지난 셈이군요.
처음엔 호숫가에서 부장님 과장님 동료들과 어울려 배달된 도시락과 음료를 마시며 소풍 나온 개구쟁이처럼 매미 소리를 풍악 삼아 신나는 점심 식사를 즐기곤 했습니다.
아직 구내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았을 때입니다.
식사 후에는 “길거리 카페” 마담 언니가 챙겨 주는 따끈한 커피 한잔을 서~빙 받으며, 한잔에 300원 짜리 찐~한 농담도 주고 받는, 낭만이 충만한 호수의 정오 풍경이기도 했는데요, 참~ 그 해 여름, 잠실 벌의 매미 소리는 정말로 우렁찼습니다.
(지금도 한 없이 아련하기만 합니다~~)
2. 마차 살롱
기억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호수 둘레로, 그 유명한 포장 마차 수백 개가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어, 특히 어둠이 주는 유혹에 약한 저 같은 건달로서는 마약이 주는 환각 비스무레한, 황홀한 도취감에 젖기도 한 때였던 것 같습니다.
마차 살롱은 거의 기업화 되어 깍두기 형님들이 사람들을 부리며 운영 하고 있었는데요,
오후 5시 쯤부터 시작하여 새벽까지 불을 밝혔고, 거리의 악사(樂士)들이 살롱마다 일주 하면서 아코디언(accordion)이나 색스폰(saxhorn), 때로는 트럼펫(trumpet)까지 연주해 주는데, 흥에 겨운 취객들이 기분 내며 건네는 협찬금이 술 값 못지 않았고, 취흥에 겨워 한없이 흐느적거렸던 호수의 밤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세계적인 관광 잡지에도 소개 되었던 이 “마차 살롱”은 올림픽 미관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정치꾼 아재비(?) 들의 덜 떨어진 판단으로 인해, 당시 실세 중의 실세였던 황태자 박모(?) 씨의 지령에 의하여 올림픽을 앞두고 하루 아침에 몽조리 철거를 당하여 지금은 자취도 없어 졌습니다. 물론 불법적인 운영이긴 했지만, 그 자체가 자생적으로 탄생한 것으로서, 호수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고, 하나의 문화적 체험 현장으로 연계 개발 할 수도 있었던 건 아닐까~ 아쉬워 해 보기도 합니다만,
이젠 엎질러진 물동이처럼 아쉬움만 남을 뿐 입니다.
특히 저처럼 마음 여린 사람으로선 더욱 그 아쉬움이 진할 수 밖에요.
만일 그랬더라면 더 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살롱과 호수에 흠~뻑 젖은 채, 가는 세월을 희롱하며 취흥에 겨운 시심(詩心)으로 인생을 노래 했을 테구요, 그럼,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은 더 따뜻해 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3. 규모
석촌 호수는 잠실 대교에서 가락동으로 이어진 “잠실 대로”를 경계선으로 하여 “동호(東湖)”와 “서호(西湖)” 두 개의 호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호수의 물줄기는 잠실 대로 다리 아래로 서로 연결이 되어 동호에서 서호를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원래 이 곳이 한강의 주류였다고 하는데, 1970년대 초에 발파와 매립을 거쳐서 지금의 한강 줄기로 물의 흐름을 직선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잠실은 대대적인 개발을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한강의 큰 물 줄기는 두 개의 호수로 남아, 이젠 옛날의 흔적만을 간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호수의 물은 인입관(引入管)을 통하여 팔당에서 직접 공수 받고 있으며 퇴수관(退水管)을 통하여 다시 한강으로 흘러 들어 가게 됩니다.
호수의 크기는 전체가 285,757㎡(약 8만 6천 평) 이고, 동호가 117,109㎡(약 3만 5천 평), 서호가 168,648㎡(약 5만 1천 평) 입니다.
호수 수면의 면적도, 동호가 105,785㎡(약 3만 2천 평), 서호가 112,065㎡(약 3만 4천 평)이니, 일산 호수의 5분의 1 밖에 안 된다고는 하지만, 서울에서는 가장 큰 호수인 셈입니다.
서호에는 “롯데 월드”에서 건설하여 서울시에 기부 채납한 “마법의 섬(magic island)”이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매직 아일랜드에는 각종 공연장과 탑승 놀이 기구가 있어서, 어린 돈키호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 해 주는 테마 파크(theme park)가 연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물론 매직 아일랜드와 실내 파크(park)는 구름다리로 연결 되어 있고, 모노레일이 높다랗게 놓여져 지렁이처럼 구불거리며 손님들을 이리 저리로 옮겨 나르곤 합니다.
호수 위엔 각종 공연을 할 수 있는 “수변 무대”가 동호와 서호에 각각 하나씩 만들어져 아기들과 비둘기, 때로는 강아지까지 몰려 와서 오손 도손 정다운 놀이터가 되고 있고요,
“포토 아일랜드”도 있어서, 젊은 연인들이 아름다운 “매직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여 뜻 깊은 추억을 필름에 담을 수 있는, 사랑의 무대도 마련 되어 있습니다.
4. 호수 풍광
대대적인 개발을 시작 한지 20년이 가깝다 보니 호수를 둘러 싸고 있는 나무가 무성하고, 호수에 방생한 물고기의 수효도 많고 크기도 엄청 큽니다.
각양 각색의 영롱한 빛깔을 자랑하는 잉어와 붕어 그리고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사람 키 만큼이나 커다란 징그러운 녀석들도 있고요,
때로는 토종 자라가 유영(遊泳) 하기도 합니다.
무자비한 포식성으로 생태계를 유린하는 말썽 많은 수입 외래종 “붉은 귀 거북이”가 전에는 특히 더 많았는데요, 대대적인 소탕 작전 이후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황포 돛배가 물 위에 외로이 떠서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고 있고, 뗏목선과 운반선에는 벙거지 쓴 사공이 한가로이 노를 젓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 애니메이션(animation)이지요.
거위 10여 마리와 수십 마리 오리가 물고기를 쫒으며 편대 수영을 즐기기도 합니다.
처음엔 오리 12 마리 밖에 없었는데, 이젠 부화를 거듭해서 그 수효를 세기도 어렵습니다.
그 넓은 호수를 제 집 앞 마당처럼 헤 짚고 다니니,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오리와 거위가 아닐까요? 물 위에는 알을 품을 수 있도록 통나무로 만든 오리와 거위 집이 물 위에 떠서 한가로이 바람에 출렁거리기도 합니다.
작년 5월 “친 환경 가꾸기 조성 사업”을 대대적으로 완성하여 호수 주변에는 나무(특히 소나무)도 많이 심었고, 또 호수 가장자리로는 뺑~ 둘러 가며 각종 야생화를 심어서 철 따라 피는 꽃과 향기는 깊은 산 속에 들어 온 듯한 환상을 심어 주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죽이는 풍광 명미(風光 明媚)이지요!
샤스타데이지, 범부채, 구절초, 감국, 부들, 참나리, 쑥부쟁이, 줄, 물 억새, 갈대, 붓꽃, 수크령, 노랑꽃 창포, 옥잠화, 꽃범의 꼬리, 벌개미취, 꽃향유, 왕원추리, 마타리 등등…….
이름도 처음 들어 보는 갖가지 야생화들이 우리의 마음을 여유롭게 합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 하는 꽃 구절초(일명 들국화)의 기품 있는 때깔은 고절(高節)하여, 서리가 내린 초 겨울에도 그 찬란한 꽃과 향을 자랑 합니다.
벌개미취 또한 내가 좋아 하는 꽃이니, 아마도 난 국화와의 인연이 남 다른 듯 합니다.
수변 무대에선 “헬스 워킹”이나 “태극 권법” “파륜궁” 같은 조금은 낯선 수련 강좌도 열리고요, 산수유와 은행 나무가 많아서 비 온 다음날이면 요즘 같은 가을에는 떨어진 열매 줍기에 할마시들이 서로들 야단법석 입니다.
또 맥문동 군락지가 있어서 한 여름이면 연 자줏빛 꽃이 만발 하는데,
정말 환상 그 자체로, 마음 속 가득~ 에너지 넘치는 기(氣)가 호수에 만당(滿堂)하여, 그 충만한 기를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지 그저 난감 하기만 합니다.
기온이 내려 가면서 맥문동의 열매가 까맣게 영글어 그것을 훑기에 바쁜 할배도 계십니다.
요즘은 특히나 하늘 거리는 억새가 만발하여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은빛 날개를 바람결에 휘날리는데, 민둥산이나 명성산을 굳이 가지 않아도 그런대로 아쉬움을 달랠 만 합니다.
투명한 색깔이 햇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빛나고, 바람에 흔들릴 때면 반갑다고 인사 하고, 잘 가라고 배웅하는 것 같아 오래 사귄 연인 인양, 사랑의 감정이 충만해 지기도 합니다.
정말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운 늦가을과 초겨울이 넘나드는 요즘 정경이 아닐수 없습니다.
또한, 야생화를 심어 가꾼 이후로는 전에 없던 철새가 가끔씩 날아 들어 호수의 고기를 자무락질로 사냥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곤 합니다.
얼마 전에는 용모가 수려한 이름 모를 두루미 과의 진객(珍客)이 몇 달을 머물다 가기도 했습니다. 그 녀석이 큰 날개를 펴고 호수 위를 한번 날아 오를 땐, 기품 있는 날개 짓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어쩌면 난 그 녀석의 비상(飛翔)을 보기 위해 더 열심히 아침 잠을 설쳤는지도 모릅니다. 그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이 후, 한 동안 가슴에 남은 서운함이 너무 진해서 연인을 그리듯 시름이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내년에 또 다시 해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스스로의 서운함을 달랠 수 밖에 없었죠.
봄이면 철쭉과 벚꽃이 만발하여 호수 둘레를 화려하게 수 놓는데요,
달 빛이라도 비치는 밤이면 교교한 벚꽃의 은은한 자태가,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쉽게 설명이 안 되는 황홀의 극치라고나 할까요?
가뭄에 대비하여 스프링 쿨러도 설치 해 놓았지만, 아직 한번도 작동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으니 자연은 역시 스스로 대응 하는 자생력이 탁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설명은 하고 있지만, 모두 구차한 미사여구 일 뿐이지요.
“백문이 불여 일견”
아닐까요?
5. “호수 돌이”
호수 둘레에는 우레탄으로 포장 된 워~킹 코스가 있습니다.
총 길이가 2,532m인데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운동 하는 사람으로 가득 합니다.
때로는 마라톤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부분은 속보로 걷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아침엔 주로 나이 드신 분 들이, 점심엔 주변 직장인들이, 저녁엔 인근 마을의 젊은 묘령의 규수들이 많이 출현 합니다. 어떻게 아느냐구요? 저도 이젠 호수에서는 알아 주는 “저명 인사”에 명함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호수에 상주하는 노숙자가 몇 분 계신데 저를 만나면 깍듯이 예를 갖추곤 합니다. 물론 술 마신 다음날,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담뱃갑을 건네주긴 하지만요, 뿐만 아니라 이젠 호수에서 마주 치면 점점 인사하는 이웃들이 늘어만 가니, 자연히 호수와 관련 된 소식엔 해박(?) 해 질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전에는 호수를 이렇게 열심히 돌지는 않았습니다.
주말 휴일마다 하는 등산으로 운동이 충분 하다고 생각 했고, 그 때는 백두 대간과 9정맥을 열심히 뛰면서 심하게 산행을 하고 있을 때여서, 평일엔 그저 조용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 재 작년에 “족족회(足足會)”를 결성 하면서, 그 해 377 바퀴를 돌았고, 작년에는 야생화 단지가 가꾸어 지면서 철 따라 피는 그 향기에 취해서, 한 해에 무려 1,011 바퀴를 돌았습니다.
약 2,600km이니, 부산을 3번도 넘게 왕복한 거리인 셈이지요.
올핸 절반을 목표로 하고 현재 약 400 바퀴 정도를 돌고 있습니다.
아는 분들이 전화 할 때, 공교롭게도 호수를 돌 때가 많아서 이젠
“돌 아이 (또라이?) ”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쨋거나 이젠 “호수 돌이”가 하루의 일과가 되었고, 하루 10여 km 이상의 호수 돌기를 해야만 하루가 편안 해 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놀이 공원의 70m 고공에서 급전직하로 낙하 하는 “자이로 드롭”에서 질러 대는 비명 소리와, 역시 “자이로 스윙”에서 터져 나오는 교성, 이 모든 풍광이 주변의 야생화와 나무, 물고기 거위 오리는 물론, 멀리서 날아 온 철새와도 함께 어울어 져 연출하는 하모니(harmony)는 이 곳 호수에서만 만끽 할 수 있는 극치의 오르가즘(orgasm) 이기도 합니다.
집이 일산이어서 출퇴근 길이 비록 멀기는 하지만, 난 남들보다 1시간 이상 일찍 출근하여 호수를 돌고, 점심 식사 후에도 남들이 낮잠을 즐기는 시간에 두 바퀴의 호수를 돌면서 소화를 시키고 있으니, 누가 시켜서 한다면 정말 이렇게 열심히 할 수가 있을까요?
누가 찾아 와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면 제가 안내 하는 필수 코스가 이제는 “호수 돌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튼,
이젠 매일처럼 반복 되는,
이런 짜릿한 오르가즘을 만끽하면서
제 건강도 확실하게 챙기고 있으니,
아마도 난 서울에서,
첫 번째는 아니더라도 두 번째 쯤은,
행복한 놈이 아닐까요!
( 혼자 만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까워서, 잠시 소중한 일상을
소개해 보았습니다. )
2005. 11. 22. 잠실 석촌 호수에서 자연산.
첫댓글 석촌호수에도 우리강릉제일고인의 땀으로범벅이되어있었다니 자랑스러울뿐이요~~ 당신의 글을읽고있으면 어느샌가 내입가엔 잔잔한미소가피여난다오 ^^.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선배님의 온화 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을 글을 통해 읽을수 있었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후배에게 주시길 바라고 언제 뵙는날, 한잔 정성들여 올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예전에 저두 석촌 호수를 달골로 넘나들었죠. 몇년이 흘쩍 흘렸지만.....집에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호수가 경치 제일 좋은곳으로 자리잡고 그때부터 노닥러리기 시작하면 어느새 어둠이 분위기를 잡아주었죠.그때가 그립네요. 잘 읽고 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