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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한복(韓服, 문화어: 조선옷)은 고대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의 고유한 의복이며 한복의 기본적인 형태는 고대 북방민족의 스키타이계 복식이 원류인 호복입니다 대다수의 평민들은 흰색 옷을 즐겨 입었으며 한복의 기본 구성인 치마와 저고리, 바지 등은 변치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호복으로써 한복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활동성을 중시하며 딱 붙는 옷이 아니고 또한 천 자체를 보면 직선형이지만 몸에 입을 경우 곡선이 살아나게 도와주는 미적 특징도 나타나는데 이는 주머니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복은 호복이 아닌 기모노나 한푸 등 이웃 국가들의 복식과 달리 저고리와 치마, 즉 상·하의가 분리 되어 있어 형태상으로 구분되며 현대의 한복은 보통 조선 시대에 착용했던 한복과 유사성이 크며 명절이나 격식을 갖추는 자리에서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량한복은 생활의 편리함을 강조하고 있어 20세기 동안 그 외형이 여러 변화를 겪었습니다 한복도 의복이므로 기성복처럼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요구에 따라 색과 소재, 특징 등을 새롭게 접목하며 이러한 시도는 여러 한복 디자이너들에 의해 현재에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나라 한복 시리즈 마지막 특수한복인 무용복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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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무 : 한량무(閑良舞)는 관아의 행사 때 여흥으로 추어진 것으로 일종의 풍자 춤극이다. 한량(閑良)이란 벼슬 못한 호반(虎班)의 이름으로, 풍류를 알고 호협한 사나이의 별명이다. 춤의 내용은 한량과 별감(別監)이 기생(妓生)을 데리고 즐겁게 노는 자리에 승려가 나타나 이를 보고 기생에게 혹하여 멋진 춤으로 기생의 환심을 사니, 기생은 마침내 한량과 별감을 배반하고 승려에게로 가는 남녀의 관계를 그린 춤이다. 그 뒤 한량무는 광무대(光武臺)·연흥사(延興社)와 가설무대에서 연출하여 성행했었다.원래는 남사당패에서 행해지던 놀이춤으로, 사당패가 그 기원을 조선 후기로 발생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로 추측한다. 원래의 4~5인이 추던 남사당패의 한량무는 사라지고, 진주의 교방에서 전해오는 7인의 한량무만 남아 있다. 진주의 한량무는 고종 때 진주목사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한량무에 있는 승무가 기록되어 있고, 교방에서 유행하던 춤극으로 보인다 한량이란 양반이면서 벼슬도 못하고 놀고 있는 사람으로, 보통 학문은 뒷전이고 주색잡기에 빠져서 놀고먹는 사람을 말한다. 한량무에는 이런 한량과, 탐관오리 별감, 여자를 밝히는 타락한 승려, 지조없이 파계승과 함부로 놀아나는 색시가 등장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관찰하며, 비꼬는 상좌와 마당쇠 그리고 주모가 양념을 더 하듯 맛을 낸다 한량과 색시가 무대에 등장하여 어우러져 춤을 추면 상좌가 중을 모시고 무대에 등장한다. 상좌가 엎드려 있는 승려에게 즐겁게 춤추고 있는 색시를 유혹하라고 유도하여 한량이 색시에게 꽃신을 사주려고 퇴장하자 중이 색시를 유혹하여 둘이 함께 춤춘다. 이때 한량이 다시 등장하여 꽃신을 색시에게 신기고 중은 퇴장한다 중이 다시 등장하여 꽃신을 벗기고 자기가 사온 꽃신을 신기는데, 색시의 태도에 화가 난 한량이 어쩔 줄 모른다. 상좌가 이를 보고 술상을 마련하여 한량에게 대접하고 사과하지만 상좌를 때리려고 하여 상좌가 도망 다닌다 중과 상좌가 술을 마시다가 한량에게 다가가 사과한다. 그 틈에 한 구석에서 색시가 서성거리고 있음을 알아챈 중이 일어나 색시를 업고 도망가려고 하지만 색시가 이를 뿌리치고 한량에게 달려가 품에 안긴다. 한량은 이를 뿌리치고 발길로 걷어차 색시가 엎드려 운다 이 광경을 본 한량은 다가가서 색시를 안아 일으키고 춤추기 시작하여 상좌와 중도 어울려 춤으로 마무리한다 그 춤사위와 몸짓을 보면, 한량은 우아함과 기품이 있고, 바람난 색시는 현란하면서도 절제된 교태가 있다. 별감은 우직스러우면서도 부드러움을 갈무리했고 승려는 일탈(逸脫)하면서도 고요함이 숨어 있다. 주모는 경망스러움과 해학(諧謔)을 춤추고, 상좌는 혼돈 속에서도 믿음을 나타내고, 마당쇠는 순종 속에서도 자기주장을 웃음으로 표출하는 재치를 보인다 이 일곱 사람의 어울림으로 생기는 묘한 불협화음 속에서 조화를 찾아내는 반시간 정도의 몸 사위는 참으로 절묘하다. 기원은 남사당패에서 남자들이 추던 무용이지만 교방계의 무용으로 옮겨오면서도 남성적인 춤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역동성과 다양성을 잃지않고 있다 장단은 삼현육각과 풍물을 치며 북, 장구, 피리, 대금, 아쟁 등을 사용하고 굿거리 자진모리 세마리 장단에 맞춘다 의상은 흰 바지 저고리(대님을 메거나 아니면 행전을 멘다)에 도포를 입고 술띠를 메고 갓을 쓰고 갖신을 신는다
승무 : 승무(僧舞, 문화어: 중춤)는 승려들이 추는 속칭 '중춤'이라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이 아니고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어깨에 매고 흰 고깔을 쓰고 추는 민속춤이다. 춤의 구성은 체계적일 뿐 아니라 춤사위가 다양하고 춤의 기법 또한 독특하다. 6박자인 염불·도드리와 4박자인 타령·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또 장단의 변화는 7차례나 있어 춤사위가 각각 다르게 구분, 정립되지만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룬다.불교가 한국에 수입됨과 동시에 전래된 무용으로서, 재(齋)와 같은 큰 불교의식에는 승려들이 법고(法鼓)춤·바라춤·나비춤〔着服〕등을 추는데 이러한 불교의식무용을 작법(作法) 또는 법무(法舞)라 하며, 승무(僧舞)라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연희하는 승무의 법고 치는 순위를 볼 때 승무가 불교의식무용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민간으로 전파되어서 오랜 세월을 전해오는 동안에 점점 발전·향상되어, 지금은 민속무용의 정수가 된 민속무용의 대표격인 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체득하면 한국민속무용의 기법 전반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예술성을 가진 춤이다 승무는 1900년대 초 협률사(協律社)에서 연희되기 시작하여 광무대(光武臺)ㆍ단성사(團成社)를 거쳐서 1908년 원각사(圓覺社)에서 한성준(韓成俊)이 이 춤을 지도했다고 한다. 그 뒤 1934년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개소하고 무용지도를 본격화하면서 정리했으며, 1936년 한성준의 제1회 무용발표회를 계기로 이 춤이 예술무용으로 승화된 것이다. 한성준의 직계 후손인 한영숙(韓英淑)이 이 춤을 계승하였으며, 그녀가 작고한 뒤 이애주 등으로 이어졌다. 한 때 불교의 존엄성과 위신을 해하는 것이라 하여 승무 폐지론이 나오기도 했다 승무의 기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민속무용 유래설로는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하기 위하여 장삼ㆍ고깔ㆍ붉은가사를 매고 요염한 자태로 춤을 추었다는 황진이초연설(黃眞伊初演說), 상좌중이 평소 스승이 하던 기거범절(起居凡節)이나 독경설법(讀經說法)의 모습을 희롱조로 흉내내면서 춘 것이 승무라는 동자기무설(童子技舞說)이 있으며, 또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제자 성진(性眞)이 탁발수도에 나섰다가 계속에서 8선녀를 만나 미색에 현혹되어 번민하다가 불도의 참을 깨달아 해탈의 과정을 무용화한 것이라는 구운몽인용설(九雲夢引用說), 파계로 환속했다가 양심의 가책으로 번민하는 모습을 무용화했다는 파계승번뇌표현설(破戒僧煩惱表現說), 산대가면극 중 노장춤이 승무의 원초적 기원이라는 노장춤유래설(老長舞由來說) 등이 있다 불교의식무용설로는 세존(世尊)이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가섭이 그 뜻을 알고 춤을 추었다는 교리적 측면에서 유래설과 또 악신(樂神) 건달바(乾達婆)가 영산회상(靈山會相)의 장엄한 광경을 춤으로 묘사했다는 설, 위(魏)의 조자건(曺子建)이 천태산에 올랐다가 범천(梵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기떼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춤으로 옮긴 것이라는 등의 불교문화사적 기원설까지 나오고 있다. 또 탁발승이 포교과정에서 군중을 모으기 위해 법무(法舞)를 속화시켜 항간에 번지게 되었다는 불교무용유래설도 있어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추측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다만 법고와 당악(서울굿에서 쓰이는 것)가락이 삽입된 것에서 불교 의식무용에 비중을 두는 것 같으나, 춤의 내용이나 춤사위가 불교적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승무 복장은 흰색 검정색 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어깨에 매고 흰 고깔을 쓰고 남자일 경우 바지 저고리를 입고 여자일 경우 치마 저고리를 입고 춘다
학춤 : 학춤은 학의 동작을 표현한 춤으로 주로 부산광역시의 동래학춤과 경남 양산의 양산사찰학춤이 있다 둘다 덧배기춤으로 학을 표현하였으며 학춤 의상 또한 역시 한량무 처럼 바지 저고리에 갓을 쓰고 갖신을 신고 춤을 추지만 한량무와 학춤의 차이점은 한량무 도포의 소매는 넓고 크지만 학춤에서 쓰는 도포는 굉장히 길고 무릎까지 내려 간다고 한다
농악복 : 흰 민복에 조끼 삼색띠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지역에 따라 민복을 입고 위에 삼색띠를 메거나 아니면 조끼 색깔이 다르거나 저고리 위에 더거리를 입는다고 한다
춘앵전 : 조선시대 순조때 만들어진 궁중 무용으로 순조 때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다 순조 때 세자대리 익종(翼宗)이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 버드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에 감동, 이를 무용화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전승되어오는 춤이다 길이 여섯 자의 제한된 화문석(花文席) 위에서 한없이 느리게 추는 우아한 독무(獨舞)이다. 전통무용 가운데서 가장 많은 춤사위와 시적인 춤사위 용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과교선(過橋仙)·낙화유수(落花流水)·대수(擡袖)·대섬수(大閃袖)·도수아(掉袖兒)·반수수불(半垂手拂)·번수(飜袖)·불화렴(拂花簾)·비금사(飛金沙)·비리(飛履)·사번(乍飜)·사예거(斜曳裾)·연귀소(燕歸巢)·전화지(轉花持)·절요이요(折腰理腰)·타원앙장(打鴛鴦場)·탑탑고(塔塔高)·풍류지(風流枝)·화전태(花前態)·회란(廻鸞)·회파신(廻波身)·후포수(後抛袖)·수수쌍불(垂手雙拂)·회두(回頭) 등이 있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귀하고 값지게 평가하는 화전태는 높고 아름다운 교양을 나타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춤이 시작되자 부르는 창사는 순조 28년(己丑, 1828) 세자인 익종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반주음악은 「춘앵전」에 한해서는 평조회상(平調會相)의 느린 「상영산 上靈山」부터 시작하여 「중영산 中靈山」·「세영산 細靈山」·「삼현환입 三絃還入」·「타령 打令」 등의 점점 빠른 음악의 순으로 바꾸어 나간다. 이 춤은 독무이지만 여기(女妓)가 추는 것과 무동(舞童)이 추는 두 가지가 있었다 화관(花冠)을 머리에 쓰고, 황초삼(黃綃衫)·홍초상(紅綃裳)을 입는다. 초록하파(草綠霞波)에 홍단금수대(紅緞金繡帶)를 띠고, 오채한삼(五彩汗衫)을 매며, 홍금수구(紅錦繡鞲)에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처용무 : 처용무는 처용탈을 쓰고 쓰는 춤으로 5명의 무원(舞員)이 각각 청(동), 홍(남), 황(중앙), 흑(북), 백(서)의 단의(緞衣)를 오방에 맞추어 입고 서서 처용가면과 사모를 쓰고 홍록흉배(紅綠胸背), 초록천의(草綠天衣), 남오군(藍襖裙), 홍방슬(紅方膝), 황초상(黃綃裳),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한삼(白汗衫)을 끼고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춤을 춘다. 복식을 보면, 옷은 오방의 방위 빛깔에 따라서 동쪽의 청, 중앙의 황, 남쪽의 홍, 서쪽의 백, 북쪽의 흑으로 구분하고, 앞과 뒤 그리고 소매에는 만화(蔓花)를 그린다. 천의(天衣)는 녹단(綠段)에 만화를 그리고, 안은 오방이 모두 홍주(紅紬)를 쓴다. 길경(吉慶)은 겉과 안 모두 홍초(紅綃)를 쓴다. 상(裳)은 황초(黃綃)를 쓴다. 군(裙)은 동과 북은 홍단(紅段), 서와 남은 흑단(黑段), 중앙은 남단(藍段)을 쓴다 한삼(汗衫)은 오방이 모두 백초(白綃)를 쓴다. 대(帶)는 홍정(紅鞓)을 쓴다. 혜(鞋)는 오방이 모두 백피(白皮)로 만들고 끈을 단다.
부채춤 : 한국 전통무용을 대표하는 춤으로 김백봉이 창작한 춤이다 신 무용계열에 속하는 창작무용으로 무용가 김백봉(金白峰)에 의하여 창작되어 1954년 11월 26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시공관 무대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1968년 10월 멕시코올림픽의 방계행사인 세계민속예술제전에서 한국민속예술단에 의하여 군무형식으로 재구성되기까지는 대체로 독무(獨舞)로 추어졌다 복식은 머리 위엔 화사하게 장식된 족두리를 얹고, 미색 바탕에 수련꽃을 수놓은 당의(唐衣)와 저고리 그리고진분홍색 통치마를 입고, 양손에 무선(巫扇) 모양의 꽃부채를 든다
검무 : 검무는 말 그대로 칼을 들고 추는 춤으로 신라시대 황창이라는 소년이 얼굴에 탈을 쓰고 추던 춤이였으나 고려 말까지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었다가 조선시대에는 기녀들이 가면을 쓰지 않고 검무를 췄다고 한다 의상은 전립(戰笠)을 쓰고 전복(戰服) 혹은 쾌자(掛子·快子)에 남색 전대(戰帶)를 띤다. 그러나 『교방가요』에는 두 사람은 융복(戎服)에 갓, 두 사람은 황삼(黃衫)을 입었다. 진주검무에서는 전립·전복·전대 이외에 색한삼(色汗衫)을 사용한다.무구(舞具)인 검기(劒器), 즉 칼은 13㎝ 가량 되는 둥글게 된 나무자루를 붉은색 비단으로 싸고 자루 끝에 색실을 달고, 26㎝ 가량 되는 청룡도모양으로 날이 휘어진 곳에 붉은 술을 단 형태의 칼이 조선 말기인 1901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그런데 현재 사용하는 칼은 진주검무와 궁중검무을 제외하고 자루 끝에 ~변형되어 있다. 칼의 재질은 지역에 따라 백동, 철제, 놋쇠, 나무 등으로 다르게 사용한다.
진쇠춤 : 진쇠춤은 경기도 도당굿에서 화랭이들이 진쇠장단에 맞춰 꽹과리를 치고 노는 춤이다 원래 경기도 남부지방의 무당이나 재인청(才人廳) 출신의 광대들에 의하여 전해온다 문헌기록은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나라에 경사가 났을 때, 또는 풍년이 들었을 때 왕이 각 지방의 원님을 불러 향연을 베풀고 만조백관이 보는 가운데 원님들에게 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 춤이 진쇠춤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경기도 지방의 도당굿에서도 굿 사이에 추게 되었고, 또 재인청 광대들에 의하여 경기도 지방의 민속춤으로 남게 되었다. 진쇠춤은 무속의식의 춤 중에서 유일하게 궁중무용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춤사위가 비교적 우아하고 유연하여, 마치 궁중무용의 한삼춤에서 볼 수 있는 기법과 비슷한 동작이 나타난다 이 춤은 도당굿 중 군웅굿에서 군웅마마에 정교할 때 추어진 춤으로 일종의 오신(娛神)행위로 군응님께 바치는 춤이다. 굿상을 굿당 중앙에 설치하고 군웅마마를 그 상 앞에 안좌시키는 가운데 그 앞에서 마주보고 두 사람이 대무하거나, 네 사람이 사방을 돌면서 한삼춤을 추는 것이다 이 춤의 복식은 구군복 또는 철릭(앞가슴에는 학수배, 등에는 용수배)을 입고 사모 또는 홍갓을 쓰며 목화(木靴)를 신는다 이 춤은 처음에 장중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나 뒤로 가면서 가벼운 움직임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동안류 태평무 복장
한영숙류 태평무 복장
강선영류 태평무 복장
태평무 : 태평무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 신하들이 나라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면서 추던 춤이다 일제강점기 때 명무였던 한성준이 먼저 태평무를 추었으며 그의 딸 한영숙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음악은 낙궁장단, 터벌림, 올림채, 도살풀이가락의 경기무속장단으로 다른 춤에 비해 복잡하고 까다롭다. 장단을 충분히 알아야 그 맛을 살릴 수 있다. 춤은 전체적으로 화사하고 우아한데, 겹걸음, 따라붙이는 걸음, 잔걸음, 무릎들어 걷기, 뒤꿈치찍기, 앞꿈치꺽고 뒤꿈치 디딤, 뒤꿈치 찍어들기, 발옆으로 밀어주기 등 발디딤의 기교가 섬세하고 다양하다. 장단과 발디딤이 현란한 멋을 보여주지만 상체의 호흡은 절제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1940년부터 한영숙(韓英淑)과 강선영(姜善泳)이 추었는데, 왕과 왕비의 역으로 각각 왕과 왕비의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한성준의 태평무는 한영숙류와 강선영류가 다르게 전승되고 있다 먼저 강선영류는 활옷을 입고 한삼을 끼고 추다가 상궁이 받아들면 당의를 입고 추며, 퇴장하면서 끝이 난다. 율동이 큰 편이고 화려하다. 한편 한영숙류는 처음부터 당의만 입고 추며 한삼을 끼지 않고, 마지막 포즈로 무대에서 끝을 맺는다. 강선영류에 비해 담백하며 조금 더 절제되어 있다 화성재인청 출신 이동안(李東安)류가 전해지는데 김인호에게 전수받았다고 한다. 이동안류 태평무는 남색 조복(朝服)에 사모관대를 하고 한삼을 끼고 춘다. 동작이 복잡하지 않으며 경기도당굿의 춤사위들을 볼 수 있다
승전무 : 통영(충무)에서 전승되어 온 궁중무고형(宮中舞鼓型)의 북춤.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창사(唱詞) 내용의 일부에 이순신(李舜臣)의 충의와 덕망을 추앙한 부분이 있어 승전무라고 한다. 궁중에서는 ‘무고(舞鼓)’라는 이름으로 기녀와 무동들에 의하여 전승되었고, 현재도 전해지고 있는 춤이다 이 무고는 통영지방에서 북춤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추어졌고, 특히 1592년(선조 25)부터 삼도수군통제영의 영문(營門)에서 1896년 해산될 때까지 300여년 간 각종 의식·하례(賀禮)와 이순신 사당(祠堂)의 춘추향사(春秋享祀)·생신제·기신제(忌辰祭)에 헌무(獻舞)하였다 그 동안 통제영에서는 64대 통제사 유중기(柳重起)가 1687년(숙종 13) 취고수청(吹鼓手廳)을 세워 악사(樂士) 100여 명을 양성하였고, 73대 통제사 정홍좌(鄭弘佐)는 1697년에 기생을 양성하는 교방청(敎坊廳)을 세워 1896년 연예가 26가구(家口)를 일체 관급(官給)으로 영문이 혁파(革罷)될 때까지 양성하여왔다 그 뒤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것을 교방청 출신의 이국화(李菊花)·김해근(金海根), 그의 제자인 정순남(鄭順南), 최고수청 출신의 이갑조(李甲祚) 등으로부터 발굴하여 1968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하여 계승하게 되었다 춤의 내용은 중앙에 북을 놓고 원무(元舞) 4인이 동서남북으로 나뉘어서 북을 울리며 창을 부르고 춤을 추면서 돌고, 협무(挾舞) 12인이 외곽을 에워싸고 돌면서 창을 부른다. 중앙에 놓은 북은 구병법에 모든 지휘 호령신호가 북을 울려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한 번 울리면 집합, 두 번 울리면 진격 또는 전투, 세 번 울리면 퇴진 또는 정전을 뜻한다. 흩어졌다가 모여드는 형태는 구병법의 삼진삼퇴(三進三退)를 뜻한다. 되돌아서서 북을 울리는 것은 높은 기상을 뜻한다 복식은 원무 4인이 청백주흑(靑白朱黑)의 쾌자(快子)를 입고,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한삼(汗衫)을 끼고 손에 두 개의 북채를 든다.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원무 동쪽은 청색[左靑龍], 서쪽은 백색[右白虎], 남쪽은 붉은색[南朱雀], 북쪽은 흑색[北玄武]을 입는다. 협무는 족두리를 쓰고 녹의홍상(綠衣紅裳)에 몽도리를 입고 팔에 한삼을 낀다
살풀이춤 : 살풀이춤은 무속 의식(巫俗儀式)에서 액(厄)을 풀어낸다는 뜻인 곧, 살(煞)을 푸는 춤이다.살풀이는 무속 의식(巫俗儀式)에서 액(厄)을 풀어낸다는 뜻인 곧, 살(煞)을 푸는 춤으로 일명 도살풀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그 해의 액을 풀기 위하여 굿판을 벌이고 살을 푸는 춤을 추어 왔으므로 무속(巫俗)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여지나, 무속의 형식이나 동작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 중 살풀이 장단이라는 독특한 무악(巫樂) 장단이 있다. 따라서 이 춤은 남도(南道) 무무(巫舞) 계통이라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처음에 무당들이 살풀이 가락에 맞추어 신(神)을 접하기 위한 수단으로 춤을 추었으나, 뒷날 이들이 관기(官妓)가 되거나 사당패(社堂牌)로 그 신분을 달리 하였고, 다시 사당패가 분화되어 기녀(妓女)로 탈바꿈하는 동안 변화되면서 점차 멋을 부려 아름다움을 보이는 기법으로 변천하여 기방무용(妓房舞踊)으로 계승ㆍ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변천과정에서 살풀이춤은 기방인(妓房人)들에 의해 그 호칭이 입춤즉흥무ㆍ수건춤 등으로 불리면서 보편화된 춤사위가 생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춤이 어느 시기에 살풀이춤으로 개칭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헌상으로는 1934년에 한성준(韓成俊)이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창립하고 1936년에 부민관에서 제1회 한성준무용발표회를 하면서 방안춤을 극장무대에 올려 최초로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점차 대중 사이에서 본격적인 살풀이춤이 등장하였으며, 살풀이춤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춤으로서 그 예술성을 인정하여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이 춤을 전문적으로 연희해 온 사람으로는 이동안(李東安), 김숙자(金淑子), 이매방(李梅芳), 한영숙(韓英淑) 등을 들 수 있다.살풀이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벌였던 굿판에서 무당이 나쁜기운을 풀기 위해 추는 즉흥적인 춤을 말하며, ‘도살풀이춤’ 또는 ‘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 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의 치마 저고리를 입으며, 멋스러움과 감정을 한껏 나타내기 위해 하얀 수건을 들고 살풀이 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지금의 살풀이춤은 경기지방과 호남지방에서 계승된 춤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나라가 안정되고 서민문화가 활발히 전개되면서부터 광대들의 춤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굿이 금지되자, 무당들 중 일부가 집단을 만들어 춤을 다듬으면서 점차 예술적 형태를 갖추게 되어 오늘날 한국춤의 대표로 정착하였다 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춤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큰 고전무용이다.
진주 교방굿거리춤 : 진주교방굿거리춤(晋州敎坊굿거리춤)은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으며, 진주 교방에 의해 전승되는 굿거리춤이다. 무속금지령에 의해 무당이 교방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 춤이기 때문에 교방굿거리춤이라고 하게 되었다 교방은 고려 문종 때부터 관기제도에 의해 존재했으며, 연등회 등의 행사에 가무를 선보였고, 이 교방이 조선시대로 이어져 왔고,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승무와 더불어 무속금지령에 의해 교방에 들어온 무속인들과 여기(女妓)들에 의해 새로운 예술로 태어났다 고종 때 진연도감청에서 궁중무희로 활동하다가, 경술국치로 인해 낙향을 했던 최순이(일명 최완자)가 1940년대부터 권번을 결성하여 이곳에서 당대 명기들에게 판소리와 함께 교방에 굿거리춤을 지도하였다 진주교방굿거리춤의 이름도 창법이나 굿거리 장단의 가락의 호칭과 혼합하여 사용되었는데, 1997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장단은 자진타령가락으로, 염불가락에서는 타령보다는 자진가락이 많이 들어간다. 굿거리춤답게 섬세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이 나타난다. 굿거리 장단의 대표적인 악기는 장고이지만, 진주교방 굿거리춤에서는 작은 소고와 큰 소고를 사용한다 쪽진머리에 의상은 노란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춤을 춘다
바라춤 : 바라춤은 절에서 영산재(靈山齋)와 같은 의식에서 추는 불교무용의 하나이다. 큰 법고(法鼓)를 세우고 장삼(長衫)을 입고, 양손에 북채를 들고 북굴레와 북통을 치면서 춤춘다. 법고무는 속화(俗化)하여 승무(僧舞)·9고무(九鼓舞)에 영향을 끼쳤다. 절에서 춤추는 원형은 반주음악이 없고, 속화된 것은 반염불(도드리)·굿거리와 같은 것을 쓴다 의상은 모두 승복에 장삼을 입고 가사를 두르고 춤을 춘다
나비춤 : 불교 의식무용의 하나로 일명 ‘작법(作法)’이라 하며, 행위동작으로 불법(佛法)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불교의식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식 가운데 대개 영산재(靈山齋)·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수륙재(水陸齋)·각배재(各拜齋)·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등의 중간중간에 삽입하여 춘다. 의식에서 중요한 부분을 춤의 동작으로 나타내어 불법을 상징하기 때문에 춤의 명칭은 의식의 중요 절차를 따서 다양하게 붙이고 있으나 춤사위는 대동소이하다 오늘날 추는 중요 나비춤의 명칭은 도량게작법(道場偈作法)·다게작법(茶偈作法)·사방요신작법(四方搖身作法)·정례작법(頂禮作法)·향화게작법(香花偈作法)·운심게작법(運心偈作法)·지옥고작법(地獄苦作法)·자귀의불작법(自歸依佛作法)·만다라작법(曼茶羅作法)·기경작법(起經作法)·삼귀의작법(三歸依作法)·모란찬작법(牡丹讚作法)·구원겁중작법(久遠劫中作法)·오공양작법(五供養作法) 등 14가지이다 이 춤은 대개 일정한 장단과 리듬이 없는 범패(梵唄)와, 요령·태징·목탁·북 등 사물(四物)의 반주로 춘다. 또한, 부처에게 드리는 한 의식으로서의 신업(身業)이기 때문에 관중을 의식하지 않고 춘다. 춤의 동작에서 중요한 것은 반신요배(半身搖拜)와 양쪽 발을 정자(丁字)로 하여 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빠른 동작이 거의 없고 어깨나 고개도 거의 움직이지 않아 조용하고 완만한 것이 특징이며, 극히 좁은 공간(대개 한 발짝을 넘지 않음)에서 느린 한배로 추므로 참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하다. 대개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춘다 나비춤을 배울 때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이 도량게작법이다. 그것은 각 재의 요잡(繞匝) 가운데 나비춤이 나와야 할 경우 흔히 도량게나비춤을 추고, 또한 나비춤 가운데 제일 춤사위가 많기 때문에, 이것을 배우고 나면 나머지는 그 순서만 알면 쉽게 출 수 있기 때문이다. 도량게작법의 춤사위는 8가지이다. 이 춤은 법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다른 춤에 비해 의상도 특수하다 장삼(長衫)은 가사(袈裟) 안에 입는 것으로 대개 흰색의 무명옷감으로 만든다. 몸의 기장과 팔의 기장이 같으며, 옷고름의 가운데에 있는 끈은 빨간색 양단으로 만든 것으로 너비는 2㎝ 정도인데, 옷에 붙어 꿰매져 있으며 이것을 ‘돌띠’라고 한다. 그리고 겨드랑이의 터져 있는 곳을 ‘당아지’라고 한다 몸판의 앞깃을 옆으로 활짝 펼쳐보면 여덟 칸으로 꿰매져 있는데, 이것을 ‘팔금강’이라고 한다. 또한 ‘대령’이라고 하여 너비가 20㎝쯤 되는 화려한 비단을 앞가슴에 대고 홍끈으로 묶는다. 대령의 길이는 어깨쯤부터 발끝까지 닿아야 한다 이상의 여러 가지 작법은 대체로 그 의식의 내용을 뜻하는 게문(偈文) 또는 의식문을 범음(梵音)으로 소리를 지으며 춤을 추지만, 사방요신작법·정례작법 등과 같이 동작만 나타내는 춤도 있다
첫댓글 여기까지 우리나라 전통 한복 소개였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우리나라 전통 신발을 소개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우리나라 한국 전통무용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셔서 춤 설명까지 했습니다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