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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5 - 나라와 가문을 망하게 한 청나라 서태후와 일본의 요도도노!
1,2 편에서는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여성으로 카르타고 디도여왕과 프랑스 잔다르크와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 주나라를 세운 여제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와 3만 5천 대군을 한반도에 보내 백제를 재건하려고
했던 왜국의 여왕 스이코와 베트남의 쭝짝 자매에 대해 썼는데 3편부터은 나라를 망하게 한 여성들 입니다.
(1) 권력욕과 아집으로 청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서태후!
제2차 아편전쟁으로 북경의 원명원이 영불 연합군에 불탄후, 함풍제는 피란지 열하에서 1861년 8월 사망
했으며, 아들 동치제가 6살 밖에 되지 않았기에 황제는 8명의 고명대신들에게 국정을 보좌토록 합니다.
함풍제의 두 부인 동태후와 서태후에게 공동 섭정을 맡겼는데, 성격이 대담했던 서태후가 최고 권력자로
떠올랐으니, 서태후는 공충친왕 혁흔과 일으킨 친위 쿠데타 신유정변으로 고명대신들을 숙청합니다.
서태후는 고명 8대신인 이혁보국군왕 숙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베이징에 남아있던 공충친왕
혁흔은 고명대신에 지명되지 못한 것에 불만이 컸으니..... 두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힘을 합치게 된 것으로 숙순 등 8대신들을 체포해 죽인후 권력을 완벽히 틀어쥡니다.
11월 1일 부터 서태후가 자금성의 양심전에서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황제가 성인이 되면 즉각
수렴청정을 중단할 것이라 했으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황태후들이 검토를 거쳐
직인을 찍는 식이었으니 서태후는 능수능란한 여걸로 마구잡이로 국정을 처리하진 않았습니다.
그녀는 관리들의 정책 비판도 타당하다 싶으면 수용하는 쪽이었고, 상벌을 엄격히 했으며 관리
임명도 신경쓰는 편이었으며 또한 역대 왕조에서 수렴청정한 여인들의 기록을 모아 그
경험과 교훈을 요약해 읽어보기도 했을 정도며 같은해 중국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시작합니다.
정변으로 청나라의 1인자가 된 서태후는 혁흔과 함께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서양 기술을
도입하는 근대화 노력을 시작했으니.... 중국의 사상에 서구의 기술만을 도입하자는 '중체서용'
사상이 주를 이루었고, 양무파 (洋務派) 들은 완고한 지주 계급의 저항을 무릅쓰고 개혁에 나섭니다.
서구 열강들과의 전쟁과 반란 진압에서 청나라 군대의 낙후함을 뼈저리게 느끼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 등이 양무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니 서구의
발전한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믿었고.... 유럽의 강력한 함선과 총포 등을 들여왔습니다.
서구의 기술이 도입되어 근대적인 은행, 우편 및 인프라 시설들이 건설되었고
외국어 인재 양성 기관인 경사동문관을 설치해, 유럽, 미국,
일본 등지로 수많은 청년들을 유학생으로 파견했으니 양무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홍장과 관리들은 중국 최초 기선회사이자 민간기업 '윤선초상국', 강남 제철소, 한양 제철소 등을
설립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으니.... 1862년에는 중국 최초 자체 설계 증기기관이 만들어져
산업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고 동시에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3개의 대함대가 창설됩니다.
동치제는 성년이 된후 어머니 서태후로 부터 권력을 가져오려고 시도했으나, 고집 센 서태후
가 거부하자 실의에 빠져 향락과 여색에 탐닉하다가 1875년 죽고 광서제가 새 황제로
즉위했는데.... 1883년에는 프랑스가 청나라의 봉신국이던 베트남 응우옌 왕조를 침공합니다.
청나라와 베트남 국경에 군벌 유영복은 흑기군을 이끌고 프랑스에 맞서 싸웠으니 하노이 인근에서 프랑스군
을 밀어붙였고, 사령관 리비에르가 전사한 프랑스가 증원군을 파병하자 베트남은 청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이홍장은 베트남에 손댈 생각이 없었기에 간명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를 승인합니다.
그러나 간명조약이 체결된 직후, 프랑스는 조약의 허점을 이용해 청군을 후려치니 푸저우의 마미
조선소에 폭격을 가해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뒤 복건함대를 수장시키자 청나라는
다시 프랑스와 재대결할 수밖에 없었으니 프랑스는 랑선 지방을 점령했으며 광시성까지 위협합니다.
청나라는 몇 안되는 용장 풍자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광시성을 방비토록 했는데 의외로 분전하며
프랑스군을 꺾는데 성공했고, 흑기군과 힘을 합쳐 생각외로 우월한 교환비를 냈으니
프랑스에서는 패전의 가능성이 전해지자 충격받은 쥘 페리 총리 내각은 총사퇴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이대로라면 좋은 결과를 낼수도 있었지만 청나라 조정이 베트남을 포기하고 정전, 철병하라는 악수를 두면서
꼬여버렸으니, 1885년 이홍장이 톈진조약을 맺어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버리는데 청나라는
남쪽 프랑스 보다는 조공국 조선을 뺏기지 않기 위해 동쪽 일본과 싸우는게 승산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기근과 재해로 청나라 인구의 3% 가 사망하고 2천만명의 난민들이 생겨났고 치안은 극도로
불안정해진데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1887년 허난성 정저우에서 황하의 둑이 터져
상상을 초월하는 물이 쏟아져나왔으니 200만명이 휩쓸려 사망했고 수습 불능상태로 빠집니다.
서태후가 사사건건 정무에 간섭하고 권력을 완전히 넘겨주지 않자 광서제는 점차 그녀에게
반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군함 건조비용 중에 상당액이 서태후가 만드는 광대하고
화려한 이화원 건축에 사용되는 등 군비 감소 등으로 결국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합니다.
친정을 시작한 광서제는 1889년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 (變法自彊策) 에 관심을 보였고, 서태후에게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캉유웨이의 정책을 지지하게 되니, 서태후는
광서제의 목적이 권력을 이양시키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변법을 지지하는 유신파를 제거하려 합니다.
유신파의 담사동은 위안스카이(원세개) 에게 서태후를 감금하라 부탁했으나 유신파에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위안스카이는 서태후 심복 영록에게 고하자 서태후는 자금성으로 돌아와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
시켰고 황제 병을 이유로 섭정이 되어 담사동과 양예등 유신파 핵심 인물들을 죽이고 변법 조치들도 취소합니다.
서태후와 단친왕은 반청 단체 의화단을 구슬려 열강 8국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과 대항하도록 했으니.... 의화단에 의해 북경의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8개국 연합군은 북경을 함락시켰고, 원명원은 불에 탔으며 그녀는 광서제와 함께 서안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피난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서태후는 북경에 있던 경친왕 혁광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901년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북경으로
돌아온 그녀는 연회를 열고 서양 공사 부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한편 사치를 일삼아 국고를 탕진합니다.
고기요리를 즐긴 서태후는 복부팽창과 위 기능 저하로 이질에 시달렸고 매일 연회를 하면서
과식한 탓에 죽게되자 다시는 그녀 같은 여인이 정치에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언을 신하들에게 남기고 11월 15일에 눈을 감았으며 장례는 120만냥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성대하게 치러졌고 이후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년 2월 12일 종말을 고합니다.
(2) 자식 사랑 때문에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킨 요도도노!
1614년 도쿠가와의 에도 막부가 히데요시의 아들인 오사카성의 히데요리를 치자 다급해진 요도도노가
낭인을 모으니 사나다 유키타카등 무사들이 오사카성에 들어와 10만을 헤아리는데, 도요토미군은
재화로 군량을 사들여 2년이상 버틸 식량이 있었으나 장기간 농성으로 인한 화약 부족이 문제였습니다.
그 전인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인 요도도노(요도기미) 는 6살 히데요리
와 함께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가를 지키려고 했는데.....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히데요시의 참모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등 20만명이 교토 동쪽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벌입니다.
이때 서군의 총 대장은 야마구치와 히로시마등 6국 주인인 모리 데루모토였으나 야심이
없고 너무 안정을 중시하는 소극적인 성격이라 3만 병사는 전장에
보냈지만.... 그는 히데요리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오사카성에 남으며 출전하지 않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 10만은 산에 포진했고 도쿠가와 8만은 들판에 포진한지라 서군이 유리했지만 실제로
동군과 전투를 벌인건 이시다군과 고니시군에 우키다군과 오타니군및 시마즈군등 4만에 불과했고
모리군 3만은 난구산에서 일족으로 도쿠가와씨에 내응한 깃카와에 저지당해 움직이지
않았으며 고바야카와 1만 5천등 3만여명은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에 참전하니 전투는 동군 승리로 끝납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요도도노에게 히데요리를 가마에 태워 전장에 출진시켜달라고 간청했지만
귀한 자식의 안위만을 걱정한 요도도노는 펄쩍 뛰면서 한사코 이를 거부했으니....
이순신 장군이 말한 “죽고자 하면 살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말처럼 되어 버립니다.
히데요시의 시동들인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요리에다가 구로다 나가마사는 전투 전에 이시다
미쓰나리와 틀어져서 오히려 동군측에 출진했고, 모리군은 전투를 포기했으며 고바야카와군등은
배신해 적군에 붙어버렸는데, 만약에 히데요리가 출진했다면 가토와 후쿠시마에 구로다는 차마 서군을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며 모리군이나 고바야카와군의 배신도 없었을 것이니 서군이 승리할수도 있었습니다?
1614년 겨울 사나다 유키타카는 오사카성 다마즈쿠리구치 밖에 별성을 건축하고 철포부대를 이용해 에치젠
의 마츠다이라 부대, 가가의 마에다 부대를 격파했지만 도쿠가와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어리석은 아녀자
요도도노가 적과 휴전을 하면서 강화조건으로 오사카성의 해자를 메우게 되니.... 사나다마루도 허물게 됩니다.
연일 이에야스가 야간에 병력들을 동원해 소리를 질러대거나 땅굴을 파는듯한 공갈과 대포 사격등
심리적 압박감으로 지쳐있던 중에, 이에야스가 서양인에게서 구입한 신형 대포의 포탄 한발이
혼마루에 떨어져서 시녀 한명이 죽자 새파랗게 질려서 기겁을 한 요됴도노가 무릎을 끓은 것입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요청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전장에 나갔더라면 총대장
모리씨도 수행했을 것이니 전투에서는 이길 가능성이 높았고, 1615년의 오사카성 여름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의 요청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전장에 나갔더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히데요시의 후처 요도도노 (요도기미) 는 2번에 걸쳐 자식의 안위만을 염려해 허락하지 않아
결국에는 패배하고 말았으니.... 전쟁이란 눈앞에서 사람이 칼에 찔리고 포탄에 살이 찢어져
얼굴에도 피가 튀는 것이거늘! 전투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려다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는데, 이에야스는 혼마루 수비가 강화된 것을 보고 요도도노가 겁에 질린 것을 알아채고 압박합니다.
양 군에 부과된 조건에서 히데요시가의 의무는 본성을 제외한 둘째 성곽 (二の丸) 과 셋째 성곽 (三の丸) 을
철거하고, 바깥 해자를 메울 것이며, 요도도노 (淀殿) 를 인질로 삼지않는 대신에 도요토미가의 중신이
인질을 내고 도쿠가와가의 의무는 히데요리의 신변의 안전과 영지 보장에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않을 것입니다.
강화의 조건으로 성곽의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보편적이었고 수비측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의례적인 면이 강한 것이었으나.... 이에야스는 공사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가신들에게
철거를 명령해 철저히 시행했으며 영지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몇번이나 진척을 확인했습니다.
도쿠가와 측이 전쟁 준비를 중단한 것이 아니었고, 도요토미 가문에서도 고용된 낭인들을 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의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듬해 4월 오사카측이 교토 일대를 약탈하거나
방화를 저지른 사건에 해자를 다시 파내며 수비를 정상화 하려던 행동이 도쿠가와측에 빌미를 제공합니다.
늙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전과 같이 오사카 측에 병사들의 해고와 영지 이전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한 도요토미가에 대해 이에야스는 교토 교외에 휘하 다이묘들을
집결시켜 무력으로 이를 압박하였고...... 5월 초에는 다시 오사카 여름 전투가 벌어집니다.
겨울 전투에서 활약한 사나다 노부시게라 하더라도 오사카성은 해자가 다 메워져 벌거벗은 상태라 방어에
취약했으니 농성은 무리라..... 전세를 읽을줄 알던 병졸 낭인들과 주민들은 탈출하기 시작했으며,
오사카성의 병력은 5만 5천명 정도 동원 가능해질 정도로 줄었고 사나다 노부시게는 농성이 안되니 외부
관문을 요새화해 버티는 전략을 짰지만 초반부터 고토 마타베를 포함한 장수들이 전사하며 계획이 틀어집니다.
역전의 한방을 노려야만 했으니 모리 카츠나가가 도쿠가와군을 붙잡아 두는 사이 사나다 노부시게와 수하가
특공대로 도쿠가와 본진에 쇄도해 이에야스를 칠 계획을 짰으니 큰 성공을 거두어 노부시게는
이에야스 본진 돌격을 세번이나 감행해 이에야스 깃발이 넘어지는등 세번 모두 이에야스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 재림이라할 정도로 이에야스는 도망치기 바빴고, 노부시게가 코앞까지 돌격해 오자 이에야스는
할복을 각오했는데, 그러나 네번째 돌격을 준비하며 만신창이 상태로 쉬고있던 노부시게의 병력을 이에야스
군이 기습공격해 노부시게가 전사해버리니, 그렇게 오사카 수비의 핵심 장수들인 오사카 오인중이 전부 전사합니다.
이중 해자가 없는 오사카성은 이제 방어를 할수 없었으며 요도도노를 비롯한 상층부는 군 전문지식 조차 없이
오인중의 전략, 전술을 방해나 하던 이들이었으니..... 결국 저항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며 단
사흘 만에 5월 7일 성이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결하니 도쿠가와의 천하가 완성됩니다.
(3) 오나라를 멸망케 한 월나라 미인 서시!
서시 (西施) 는 왕소군, 초선, 양귀비와 중국 4대 미인으로 본명은 시이광(施夷光). 이니 월나라인 소흥 저라산
출신으로 오나라에 패망한 월왕 구천의 충신 범려가 서시를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쳤으니.... 서시는
부차가 미색에 빠져 정치에 태만 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부차와 오나라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범려는 서시와 함께 정단이라는 미녀도 바쳤으나, 부차는 정단보다 서시를 더
총애했으니 그 일로 정단은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오나라 멸망후 범려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제일 약합니다.
두 번째 설은 사모하던 오자서를 월나라를 위해 살해한후 죄책감으로 숨졌다는 설이니 일설
에는 몸에 돌이 매달린채 바다에 수장 당했으며, 그녀가 죽은후 가리비가
잡혔다고 하며 사람들은 가리비의 속살이 서시의 혓바닥을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세번째 설은 그 외모가 나라를 망칠 것을 우려한 구천의 왕비가 꾸민 계략에 걸려 강에 빠져 익사
했다고도 하는데..... 공자의 제자들이 적은 기록이며, 열국지에서는 이쪽을 채택했습니다.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서는 월왕 구천이 범려에게 서시를 찾아오게 했는데, 범려는 서시로 말미암아
오나라 처럼 월도 망한다고 생각했으니 "그의 관상대로 고생은 함께 나눌수 있지만, 기쁨은 함께
나눌수 없겠구나." 라고 마지막 충의로 경국지색인 서시를 죽여 월나라 패망은 막겠다는 마음 먹습니다.
사상가들은 서시를 좋게 보지 않았는데 나라를 망하게 한 것 외에도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
에 나오는 '효빈 '(效顰 : 얼굴 찡그림 [嚬] 을 따라하다 [效]) 설화가 그런 점을 잘 보여
주며 혹은 서시빈목 (西施顰目) 이라고도 하는 고사이며 빈축 (嚬蹙) 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별명은 침어(沈魚) 이니 침어는 서시가 얼굴을 씻기위해 강에 얼굴을 비치니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서시를 보느라)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는 (沈魚) 이야기입니다.
원문은 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이니 모장은 고운 여인이니 사람이 보고
아름답다하지만, 물고기가 보고는 물속에 깊이 잠기며, 새가 보고는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가 보고는 마구
도망가 숨어 버린다이니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것인지를 묻는 철학적인 화두입니다.
서시와 정단이 오나라에 바쳐졌을때 그 아름다움을 구경하려고 군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성문이 부서졌으며,
오자서가 정단은 '성을 자빠뜨릴 (傾城) 미인' 이라 하여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했으나 서시는 '나라를
기울어뜨릴 (傾國) 미인' 이라 하여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경국지색" 이라는 성어가 유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