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요에의 발자취
불문 01 함혜경 법학 02 박민정 1. 서 론 일본을 여행하고 기념품을 사오게 되면, 그 기념품에 화려하고 약간은 외설적이기도 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작은 술잔, 부채, 달력, 액자 등등에서 일본의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이나 남녀의 은밀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그림 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일본 전통 음식점을 가거나, 일본어를 배우는 학원 같은 곳에서 걸려있는 일본인을 그린 그림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는 일본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 것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그 그림은 일본 전통의 그림이라고만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이 그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것은 바로 ‘우키요에’ 이다. 먼저 초기 발생 배경이 되는 에도시대와 ‘우키요’에 대한 정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서 대표적 우키요에 작가의 표현 양식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또한 우키요에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당 시대 인물들의 실생활, 에도(江戸)를 중심으로 도시 풍경, 토속적 특징 즉 우키요에가 서민들에게 어떤 존재였으며 자포니즘을 중심으로 서양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본론
1. 우키요에의 정의와 주제
(1)우키요에가 나타나게 된 배경 초창기의 우키요에는 에도에(江戸絵)라고 불리었다. 각 지방에서 에도에 온 사람들은 기념품으로 우키요에를 사가면서, 곧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키요에는 에도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에도’ 하면 우키요에를 선뜻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에도는 오사카와 교토와 함께 일본의 3대 도시였고 에도는 특히 이 둘과는 달리 짧은 역사를 가진 도시이어서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로운 미술 장르인 우키요에가 발전을 할 수 있었을 듯하다. 또한 다색으로 찍어내는 판화 기술의 발달로 강렬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주는 우키요에의 인기가 더욱 드높아 질 수 있었다. 에도 시대는 ‘사공농상’ 의 엄한 신분 제도가 있었고 상업이 번창하여 유통 경제가 발달하였는데, 상공인들이 힘을 갖게 되고 그 들은 三都나 城下町에 모여 살았다. 이 때의 지배 계급인 무사의 문화와 전혀 다른 특징을 지닌 도시 상공인들을 ‘조닌(町人)’이라 하는데, 그들만의 문화인 조닌의 문화가 발달하였다. 조닌들은 이 세상이 ‘덧 없는 곳’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조닌 문화에는 소설, 하이카이, 가부키, 우키요에 등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표현하는 것이 생겨났다. 특히 우키요에시, 즉 우키요에를 그린 화가들은 주로 민간의 화가들이었으며, 당시의 첨단을 걷는 풍속이나 화재에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새롭고 신선하며 기발한 표현 방법을 연구하고 전개했다. 에도 시대에는 기녀들이 모여 있는 곳과 가부키 극장이 밀집된 지역인 ‘악소(惡所)’ 라는 거리가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높고 낮은 신분관계에 상관하지않고 현실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미의식을 추구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2) 우키요에 용어에 대한 설명 17세기 후반, 에도 시대에 ‘이하라 사이카쿠’라는 작가가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 ‘우키요조시(浮世草子)’를 발표해 큰 인기를 누렸다. 우키요에도 이와같은 맥락으로 유행을 하였다. ‘우키요’라는 말은 근세 이전에는‘憂世’라고 표시하였다. 그시절의 염세주의 적인 불교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이 세상은 근심 걱정이 가득 차 있는 허무한 세상이다’는 뜻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자 보통 사람들은 ‘성불하기도 어렵고 어차피 세상은 뜬 세상이니까 짧은 인생을 들뜬 기분으로 신명 나게 세상을 즐기며 살아가자’ 라는 밝은 느낌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의 풍속이나 사고 방식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당시의 시대적 기운에 편승하여, 우키요란 당대의 좋은 것, 앞서가는 생각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 되었다.
(3)우키요에의 용도와 주제 다색으로 찍어내는 판화 기술의 발달로 강렬하고 화려한 우키요에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게 유곽의 기녀들과 가부키 배우들, 스모 선수들, 미인과 미남의 초상, 그 밖의 인물들이다. 또한 인물말고도 풍경, 새, 풍속을 담은 우키요에도 있다. 배우들과 기녀들, 특히 미인화에는 주로 기녀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주를 이루었다. 또, 가부키 배우 그림은 ‘야쿠샤에’라고 하였다. 가부키 배우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모습을 초상화로 그리거나제일 감동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시간이지나 에도 시대의 중기에는 인물이외에도 유곽의 풍속이나, 초닌과 무사의 일상의 풍속화 등등이 늘어난다. 또한 남녀의 뜨거운 사랑 장면 (일본의 기념품 중 그릇이나 컵 등에 많이 그려지는 그림 들), 춘화, 특정한 장소, 명소, 역의 풍경, 산의 풍경 등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우키요에가 단순히 회화를 감상하는 기쁨 뿐만이 아니라 시사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도 하였다. 특히 사진이나 비디오 등의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에, 명소의 특색과 현실을 잘 반영하여 제작한 우키요에는 그 지방 특색을 잘 알려주는 뉴스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또한 유명인이 죽은 직후 초상을 그려서 생전의 업적이나 임종 때 지어서 남긴 와카나 하이쿠를 기재하여 추도의 뜻을 표현하는 우키요에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적 영웅을 소재로 하는 우키요에도 제작되었다.
(4)우키요에의 제작 과정 에도는 18세기 중엽 천연색 목판화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하여 괄목할 만한 문화의 자율성을 갖추게 된다. 판화가 에도에서 생산되던 유일한 미술 형태는 아니었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이 판화였다. 우키요에는 판화 형식으로 제작되는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대량생산 과정을 거친다. 우키요에는 우스개 이야기 집인 게사쿠(戯作)나 그림 책인 에혼(絵本) 등의 오락 서적으로 출판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출판물로 기획되므로 총 기획을 담당하는 발행인과 판화를 제작하는 에시(絵師), 호리시(彫し), 스리시(摺師)등이 참여한다. 에시는 화가로서 판화의 그림을 담당하고, 호리시는 그림을 목판에 붙이고 칼로 목판을 파는 일을 담당하고, 스리시는 목판에 먹과 물감을 칠하여 종이를 덮어 그림을 찍어내는 일을 담당한다. 판화의 작업 중에 에시는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끝나고 그 이상은 간섭하지 않는다. 우키요에 판화 작품에 발행인과 에시의 이름은 명기되어 있지만 호리시나 스리시의 이름은 거의 명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판화를 완성하는 데 분담하는 역할에는 큰 차이가 없이 모두가 중요한 것이다.
2. 우키요에의 유명한 화가들
(1)가쓰시카 호쿠사이 에도 시대 중기부터 후기 사이에 활약한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 는 얼마전 미국의 시사 월간지 ‘라이프’ 에서 지난 천년간 세계사를 만든 100대 인물로도 뽑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14~15세 때 목판 판화 찍는 기술을 배웠다. 본격적으로 우키요에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8세때로 가쓰카와 슌쇼의 문하에 들어간다. 그가 화단에 데뷔한 시기 즈음에 배우 그림을 제작 발표하여 명성을 얻고 기뵤시나 샤레본 등의 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가쓰카와파의 화가로서 니시키에를 발표하기도 한다 .그는 1804년 경부터 여러해에 일정한 테마에 의한 시리즈 작품을 발표하면서 요미혼 삽화를 그리는 대신 일종의 그림의 교습서인 에테혼의 간행에 관심을 갖는다. 에테혼의 대표적 예로는 전체 3000여 장의 그림이 실려 있는 ‘호쿠사이 만가’를 들 수 있다. 호쿠사이 만가는 여러 장르의 작품을 소화해내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여러 동식물이나 인간의 표정과 동세를 주로 다룬 작품이다. 그 안에 있는 자유로운 몸짓의 인물들은 만화의 한 컷을 잘라 놓은 듯 한 느낌이 들게 한다. 또 그는 많은 작가들이 우키요에의 소재를 요시와라의 게이샤나 여인 , 때로는 춘화에 소재를 둔 것과는 달리 안도 히로시게와 더불어 풍경 판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도카이도의 풍경을 판화 시리즈로 만들었는데 그 중 걸작으로 후지산을 소재로 한 ‘후가쿠 36경’ 을 들 수 있다. 이 판화집 중에서 ‘붉은 후지산’은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 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판화이며 작품에 쓰인 색이 청색과 적색, 녹색과 약간의 황색 등 단순한 색조가 적당히 어울려져 그 묘미가 남 다르다. 이 밖에도 ‘삼체 화보’ , ‘일필화보’ 등에서 특수한 묘사법을 소개하였고 ‘부녀 풍속도’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주는 즐거움은 우리를 미소짓게 한다. 화호를 20회나 바꾸는 등 숱한 기행을 전하기도 했지만 정열적인 그의 작가 생활은 일본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2)도슈사이 샤라쿠 그는 1794년 어느 날 다음해에 공연 될 가부키에 등장한 배우들과 당시의 스모 선수들의 모습을 제작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던 우키요에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등,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비의 작가로 남아 있다. 일본에서 샤라쿠의 정체에 대해서 수년 간 연구하면서도 아직도 이런 저런 설이 분분하다. 최근에는 이영희(한일 비교문화 연구소장)에 의해 샤라쿠는 조선의 풍속 화가 김홍도가 잠시 일본에 가서 활동했다는 등의 설이 관심을 끌고 있지만 아직까지 확연한 증거를 찾지 못한 상태이다. 샤라쿠는 18세기말 에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부키 주연 배우들의 초상화, 그리고 그들의 브로마이드로 여겨지는 야쿠샤에 제작에 힘썼다. 특히 3대 ‘얏코에도베’역을 맡은 ‘오타니 오노지노’는 샤라쿠의 대표작으로, 상대역의 돈을 빼앗으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벌겋게 달아 오른 눈에 치켜든 눈을 한 인물의 표정은 상황의 긴박함이나 두려움 보다는 해학적 미를 볼수 있다. 이처럼 샤라쿠의 그림에 나타나는 얼굴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보다는 그 인물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엿보게 해준다. 그의 작품은 예리한 시선으로 그 속내를 포착한 리얼리즘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얼굴 모양을 대담하게 재구성하여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3)우타카와 히로시게 안도 히로시게로도 불리우는 우타카와 히로시게(1797~1858)는 에도에서 세습적인 직업이었던 일종의 소방수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하급무사 계급의 가문 출신으로서 가노파 그림을 공부했을 뿐만아니라 다른 그림 양식에도 정통했다. 그의 작품은 마루야마-시조파, 문인화파 그리고 서양의 회화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히로시게의 작품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작품으로는 ‘명소에도 백경’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1856~1859년까지 연작으로 제작되었으며 유명한 명승지를 계절과 시적인 맥락으로 표현한 메이쇼에의 전통을 활용하여 지형의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특이한 원근법과 계절에 대한 암시 그리고 다양한 색채를 이용하여 에도 경치의 아름다움과 물질적 번영을 찬미하는 지형적 성격이 짙은 판화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풍부하게 변화하는 상황 설정으로 개성적인 작품을 많이 남기었으며, 판화뿐만 아니라 욱필화와 다이묘의 의뢰를 받아 호화로운 풍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받은 호쿠사이의 후지산 연작에 이어 그는 풍경화 양식을 확립 , 발전 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여 높은 평가를 받는다.
(4)히시카와 모노로부 히시카와 모노로부는 에도 시대 초창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히시카와파의 시조이다. 에도 토박이가 아닌 그는 자신의 가문 직업을 떠나 에도의 ‘가노파’와 ‘도사파’에서 그림 훈련을 받았다. 또한 그는 도사파 계통을 기초로 중국의 판화도 흡수하여 히기카와요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동적이고 생기 있으면서도 우아함과 세련된 선 묘사하며, 적절한 구도를 지닌 풍속적 특징을 지닌다. 그는 그림뿐 만 아니라 요시와라와 도카이도에 이르는 안내서(에도성과 도카이도)를 포함하여 그림에 삽화를 넣기도 하였으며, 병풍, 족자 등 도 많이 남겼다. 또 한 그는 고전문학에 대한 감정적, 계절적 연상을 배경으로 성행위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모기장의 여인) 히시카와 모노로부의 대표적 작품 ‘뒤돌아 보는 미인도’는 여인이 길을 가다가 살짝 고개를 젖힌 듯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그녀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까 하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별히 아름다움이 있는 얼굴을 표현하기 보다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 잡는 매혹적인 자태에서 그 내부에서 잠재해 있는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3.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우키요에
(1)서양에의 우키요에의 등장 로코코 시대는 루이 15세가 통치한 1723년에서 1774년 동안으로 파리에서 로코코라는 미술 사조가 성행했던 시기이다. 로코코 양식이란 장식적인 예술로서 곡선적이고 우아한 장신구들을 진열해 놓은 공간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로코코 시대의 귀족의 부인들이 베르사유의 궁정 예절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중국의 문화 상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그 들은 단번에 중국 문화에 도취되고 유럽 전체는 중국식 자기로 중국식 차를 마시고 벽지를 바르고 병풍을 치는 등, 유럽피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중국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귀족들이 중국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공예품 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듯 싶다. 프랑스에서의 중국풍은 대단히 열광 적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에, 중국풍을 잠 재운 것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일본 문화였다. 18세기 후반까지 ‘우키요에’는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점점 일본에서 우키요에는 공급이 많아지게 되고 식상해졌으며, 서구의 미술이 도입됨으로써 퇴색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67년에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이 박람회에서는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이 그들의 특산물이나 공산품을 전시하였다. 일본은 주로 칠기와 도자기 등의 공예품을 전시했는데, 이 것들을 일본에서 파리로 들여올 때 포장을 했던 포장지가 바로 우키요에였다. 그 시절 우키요에는 공급이 많아 일본에서는 흔해빠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은 지금의 신문지처럼, 우키요에로 포장해가지고 들여온 것이다. 하지만 박람회 덕에 우키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또한, 이 신비스러운 동양의 우키요에에 열광하는 프랑스인들은 우키요에를 수집하는 등의 열정을 보이게 되었다.
(2)인상파 화가 들과 우끼요에-자포니즘 ‘자포니즘’ 이라는 용어는 “Japonism” , 프랑스어로 ‘일본주의’ 라는 뜻이다. 영어로 하면 japanism이 되는 격이다. 1890년에 파리 만국박람회에 일본에서 통역차 온 ‘하야시 타다마사’ 라는 사람이 파리에 일본 미술품 가게를 열어 일본의 물건을 유럽에 소개하였다. 그의 가게에서 우키요에는 거의 16만 매가 팔려나갔다. 또 그는 인상파 화가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는데, 이 당시 미술가들과 컬렉터들이 앞다투어 일본 미술품과 공예품을 수입해 먼저 손에 넣으려는 보이지 않은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포니즘은 그 동안 보수적이었던 미술계에 강한 반감을 갖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인상주의자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인 원근법, 균형 잡힌 구도, 이상화 된 인물, 명암 대조법등을 거부해왔다. 그들의 주요 관심은 ‘인상’, 즉 짧은 순간에 화가가 시각 적으로 처음 지각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인 드가, 마네, 캐사트, 휘슬러, 고갱 같은 화가 들이 일본 판화 기법에 영향을 받았는데 우키요에가 비서구권 미술로서 유럽 미술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최초의 예이다. 그 들은 평면적이고 밝은 채색법, 윤곽이 뚜렷한 형체, 표현적이고 때때로 대조적인 선적 문양 등을 모방하였다. 인상주의자들은 또한 판화에 나타난 경치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듯한 특이한 시점과 소실점을 중심으로 하는 원근법이 결여된 점, 중앙을 벗어난 구도 등을 본 받았다. 우연히 잘린 듯이 액자 밖으로 밀려난 인물 표현과 시선을 그림으로 유도하는 비스듬하게 경사진 선의 사용도 일본 판화에서 배운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제작 태도는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적 회화 전통의 퇴조와 인상주의의 중흥기를 가져다주었다. 1800년 대에 대부분의 화가들은 판화보다 회화에 더 치중을 했는데, 1870년 경에는 상업 적으로 그림을 복제해내는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때, 원래 화가이자 판화가 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전의 판화는 단색으로 찍어 냈으나, 인상주의자들은 각기 다른 색채의 잉크를 사용한 일본의 채색 목판화를 보고 이러한 기법을 드라이 포인트나 석판화에 응용하기도 하였다.
①고흐 고흐는 짧은 기간이지만 일본 미술의 영향을 독창적으로 소화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1885년 6월에,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에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의 그림은 네덜란드 식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색채는 더 밝아지고 양식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그는 화상이었던 그의 동생인 테오와 함께 일본 판화를 수집하였다. 특히 ‘카츠시카호쿠사이’ , ‘캐이사이 에이센’ , ‘히로시게’에 열광을 하였다. 또한 이 셋은 일본의 우키요에의 거장이었다. 고흐의 ‘일본 예술품-비 내리는 다리’ 와 ‘일본 예술춤-플럼 꽃이 피는 나무’는 히로시게의 작품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약간은 더 화려하게 그려진 이 작품은 특히 그가 테두리에 일본 한자를 어눌하게 따라 그린 것이 묘미이다. 또한 ‘탕기 영감의 초상’의 배경은 화사한 우키요에로 장식되어 있다. 케이사 이에센의 ‘기모노 입은 일본 여인들’ , 안도 히로시게의 ‘풍경판화’,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 등이 이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작업실은 아마도 일본의 목판화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탱부랭 카페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우키요에와 함께 한 자화상’,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 등의 배경도 우키요에로 장식되는데, 이는 고흐의 일본 판화에 대한 경의와 애착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활짝 핀 아몬드 나무’ 라는 작품도 마치 동양 화가들이 매화 가지를 그리 듯이 아몬드 나무를 그렸는데 정말 동양의 풍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나는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일본 화가들의 선명한 이미지가 부럽습니다. 그들의 그림은 결코 지루하지 않고 조급하게 그려졌다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숨쉬는 것처럼 단순하며, 자기 옷의 단추를 채우는 것 만큼이나 간단한 일인 양 아주 쉽게 선명한 윤곽 선으로 대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흐가 일본 미술에 대한 간단한 평이라 한다. 그의 일본 미술을 동경하는 겸손한 마음씨가 잘 나타나있다.
②모네 모네는 다른 누구보다도 일본의 취향이 강했다. 모네가 처음 우키요에를 발견한 프랑스 화가라고 한다. 모네는 우연히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서 일본의 도자기 등의 특산품을 팔고 있던 매점을 들렸는데, 주인이 도자기에서 풀러 쓰레기에 구겨 던져넣고 있는 포장지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 뒤로 모네는 우키요에에 열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부인인 카미유에게 기모노를 입히고 일본 풍의 느낌이 느껴지는 그린 ‘일본 여인’은 서양 여자가 일본의 기모노를 입고 유연하게 부채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동양적인 기모노와 서양인의 절묘한 만남을 잘 연출했다. 그리고 주위의 부채 배경은 더욱더 일본풍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모네는 다른 화가 들과는 달리 값싼 부채로 일본 취향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말년에 우연히 ‘지베르니’ 라는 작은 마을을 발견하고 거처를 옮겼다. 집에 정원을 만들고 1893년에 과수원 늪지대를 사들여 큰 연못을 팠다. 그리곤 연못 양쪽을 연결해주는 둥글게 굽은 일본식 다리를 설치했는데, 이 다리는 히로시게의 판화 '에도의 명승지 100선'에 나오는 다리에서 착상을 얻었던 것이라 한다. 모네라고 하면 수련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라 알려져 있지만 ‘다리’ 또한 많이 그려냈다고 한다.
③그 밖의 화가들 쿠르베, 드가, 휘슬러, 마네, 티소 등이 있다.
3. 결 론 기나긴 귀족 정치 시대와 무사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에 와서 문화의 향유 계급이 지배 계급에서 서민 계급으로 바뀌었다. 특히 우키요에는 역사적 가치로 볼 때는 에도 시대의 서민들의 풍속과 에도라는 도시의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예술적 가치로 볼 때는 그전까지의 귀족들만이 향유하던 문화 예술을 서민들도 즐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 시절의 뛰어난 화가들은 수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랑을 받고 있다. 그들이 그 당시에 보여 주었던 미술은 매체가 발달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등장하고 있는 지금에 보아도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작품이 많다. 또한 그들이 서양에 끼쳤던 영향이 참으로 크다 할 수 있다. 우키요에를 살펴보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화가들에 의해 남겨진 풍속화, 유명한 민화들도 우키요에처럼 서양에 전달되어 참된 한국 미를 뽐낼 수 있었을 텐데 외국에 잘 알려지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그 시절 우리의 예술 작품들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지금은 외국에 한류 열풍이 분다고 하지만 아직은 우리나라에 대해 모르는 나라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우키요에를 조사하며 흥미를 갖듯이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문화를 보고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생긴다.
<<참고문헌>> 일본 전통 문화론 / 박전열, 이영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 1999 클릭, 서양 미술사 / 캐롤 스트릭랜드 / 예경 / 2003 내가 만난 일본 미술 이야기 / 안혜경 / 아트북스 /2003 학술 논문 / 강미경 / 경남 대학교 -프랑스 나비파(Nabis)와 자포니즘(Japonisme)의 상관관 계(相關關係) /2004 학술 논문 / 김혜정 / 한국 복식 학회 - 19세기 인상주의 회화 작품 속에 표현된 쟈포니즘 으로서의 일본 복식에 관한 연구) / 2003 일본의 문화와 예술 / 구정호 / 한누리미디어 / 2000 알기 쉬운 일본사 / 윤영기 번역 / 경성 대학교 출판부 반고흐 영혼의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 예담 / 1999 에도시대의 일본미술 / 크리스틴 구스 / 예경 / 2004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tntjsghk93/80001515519 -사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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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