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달 해변의 노을
결혼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선택한 여행지, 제주는 딱 어울리는 곳이다.
제주의 2월은 색스럽다.
수선화가 수줍게 피었고, 유채가 노랗게 웃었다. 도로가의 가로수에 달린 먼나무의 빨간 열매가 초록 색 잎 사이에 고혹적으로 빛난다. 제주 방언으로 먼낭이다. 제주의 활짝 핀 꽃들이 입고 온 겨울 파카를 무색하게 한다.
제주는 어디를 다녀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서울근방에서는 보기 힘든 여러 가지 꽃들과 나무들이 제가 가진 본디 색들로 빛난다.
후박나무, 야자수, 먼 나무, 동백이 가로수다. 시내버스를 타고 거리를 가다보면 야자수가 하늘을 찌르듯 높이 서있는가 하면 낮은 키의 귤나무에 귤이 황금빛으로 주렁주렁 달렸다.
결혼 40주년의 내 인생이 그렇다.
슬픈 날이 있었는가 하면 내 손자 들이 태어나서 그네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게 한다. 인생 후반부, 구경할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남은 시간은 여행을 많이 하는 것이다.
2018년 첫 여행지를 제주도로 정하고 최남단 마라도부터 다녀왔다.
그리고 황혼에 들른 곳.
색달 해변.
이름마저 색다르다. 뜻은 막은다리라고 한다.
색달 해변의 황혼은 마치 달려갈 길을 다 마친 마라톤 주자의 마지막처럼 아름답다. 이곳에서 태어나 사랑하다 죽은 한 서퍼의 돌무덤이 앞으로 남은 내 시간의 설계에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4가지 색깔의 모래밭에 서서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사라지는 해를 보면서 잠시 고개 숙여 기도한다.
고향을 사랑한 그 서퍼를 위하여,
어언 일흔을 몇 해 앞둔 내 황혼의 미래를 위해.
40년을 함께 살아온 짝을 위해,
거기서 만난 초로의 신사,
지나가는 사람이 드물어 우리 부부는 누군가에게 두 사람이 함께한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서로 찍어주고 있었다.
그 때 다가온 노신사.
하얀 수염이 분홍빛 머플러와 함께 바람에 나부낀다.
돌하르방이 달린 열쇠고리 몇 개를 달랑거리며 관광객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멋스러운 사람,
그렇다고 옆구리에 찬 돌하르방 열쇠고리를 사라는 상술도 없다. 그는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포인트를 이곳저곳 안내한다. 늙은 우리부부를 신혼부부처럼 포즈를 취하라고 하면서 찍어준 몇 컷의 사진.
군내 나는 묵은지 같은 우리부부에게 두 손을 맞잡은 포즈, 각자 오른손과 왼손을 들어 하트모양을 하고 찍을 것 등등,
특히 한쪽 손바닥을 하늘을 받치듯 들라는 주문에 의아해 했는데 아, 내 손에 뒤로 보이는 호텔 건물이 올려 있다.
아, 호텔이 내 손안에,
이히! 잠시 부자가 된 느낌이네!
미안한 마음에 열쇠고리를 두어 개 사려하자 이국적인 카페에서 우리 부부 멋스럽게 차나 한잔씩 나누며 일몰을 감상하라고 한사코 손사래 친다.
새삼 그의 친절과 배려에 감사하며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고 앉아서 보는 일몰.
황홀하다.
정통으로 일몰이 보였다.
가끔씩 여행을 하다 이렇게 친절한 현지인들을 만나면 여행자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다. 운이 좋은 날이다. 내일의 일정에서도 또 다른 인연이 기다려 주기를 바란다.
카페 정원의 야자수에 기대서서 우리부부에게 손을 흔드는 백발의 노신사가 바다로 막 떨어지는 해와 함께 하나의 실루엣으로 보인다. 돌하르방 할배처럼,
색달 해변의 백발의 노 사진사, 이국적인 카페 정원
아름다운 색달 해변의 일몰,
40년이란 짧지 않은 결혼생활을 함께한 우리부부가 제주의 추억으로 내 스마트폰에 저장되었다.
첫댓글 잘읽고 감니다/좋은 글 입니다,제주의 2월은 쎅스스럽다는 표현이 결혼 40주년의 기행에 참 어울리는 전제로 .../그런데 심통 이라는 호(예명) 누구이신지 궁금도 합니다
아 저는 산청이 본향이고 무안에 사는 소설쓰는 심경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