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정오의 시간이건만 어두컴컴 잔뜩 내려앉은 하늘과 시계의 세상이 혼돈 속으로 빠져든 느낌이다.
그 사이 가는 빗줄기가 내리다 말다 내 마음처럼 갈등으로 메워져 온다.
그동안 쌓여있던 차 먼지위에 비 같지도 않은 빗물이 흘러 먼지로 얼룩진 검은 달구지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무량사로 향해가는 내내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 내 멋대로 각인되어 오던 매월당 김시습의 형상이 자꾸만 떠오른다.
자그마한 키에 승려의 모습도 아니요, 그렇다고 세속인의 모습도 아니며, 헝클어진 머리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꼬부라진 지팡이 하나 짚고서 백주 대낮에 소곡주에 취해 비틀거리며 육조거리를 지나다 신숙주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번갈아 가며 내리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해 먹은 정창손의 출사길을 만나
“이제 그만 좀 해처먹으렸다!”
라며 호령하는 모습이나, 아니면 설악산 오세암을 오르며 만나는 자연의 풍광과 함께 녹아드는 내면을 찾아가는 모습이라던가, 경주 금오산자락 용장사에 초당을 짓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하는 그 모습과, 얼마 전 올랐던 그곳 용장사터에 머리가 떨어진 채 서 있던 둥근 원형의 석탑과 함께 금오신화 내용 중 만복사저포기에 부처님과 저포놀이에 몰두하는 양생이라는 총각모습이 남원의 만복사지에 버려진 듯 잔설에 덥혀있던 신장상의 머리형상과 뒤 섞여 이미 절집 입구부터 을씨년스러운 날씨처럼 처연해진 심성이 되어버리고 만다.
승(僧)과 속(俗), 인간과의 한계가 모호했던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갈등하며 주저하기를 여러 번 하였던 것처럼 오랜 세월 방황하다가 마지막 머문 곳이 이곳 무량사이니 내 발걸음 또한 그리 가볍지가 않음이다.
입구 일주문이 어둠속에 그나마 푸르른 녹음을 연출하며 그늘지게 서 있다.
만수산 무량사라?
태종 이방원이 포은 정몽주에게 자신의 뜻을 함께 펴고자 읊었던 싯 구절의 중국의 만수산이 생각나고 그의 손자인 세조가 자신의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찬탈의 위업(?)을 이루자 분기탱천하여 읽던 모든 책을 불사르고 방랑길로 접어든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이 세상의 마지막 잠든 곳의 만수산 무량사이니 그 상념이 서로 남다르지 않음이다.
그리 깊지 않은 계곡을 따라 오르자 천왕문이 몇몇의 계단 위에 서있고, 낮선 이방인을 검문하듯 옆으로 단아하며 정장모습을 한 당간지주가 그늘 속에 바라보고 서 있다.
무량사......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무량(無量), 즉 극락정토를 이르는바, 벼르고 별러 찾아온 발길이 천왕문 앞에 서자 그동안 갈등했던 마음이 녹녹한 습기 묻은 바람과 함께 가벼워 진 느낌이다.
우리 전국의 여느 유명사찰처럼 이곳 무량사 역시 임진왜란의 화마 속에 폐허가 되다 17세기에 중창불사를 하였으니 몇몇의 오랜 흔적들이 아픈 질곡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음이다.
다시 한 번 동서남북의 지킴이 사대천왕의 무서운 검열을 받고 절집 마당으로 눈길을 돌리니 그리 작지 않은 터를 두고 멋스러운 오층석탑과 그 뒤로 우리나라 몇 않 되는 2층 전각인 극락전이 쌍날개를 펼치며 만수산의 산세아래 멋스럽게 펼쳐져 반긴다.
만수산이 아래 극락전이 그 앞 석탑을 보듬어 안고 있으며, 그 석탑 앞으로는 석탑에 비해 다소 작고 앙증맞은 석등이 석탑의 품속을 파고드는 모습이니 보는 이방인은 정겨움에 소외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곳 극락전 2층 전각은 지리산 자락의 화엄사 각황전, 김제 금산사 미륵전과 속리산 법주사 오층 목탑 형식인 팔상전을 빼고 나면 가까이 있는 마곡사 대웅보전뿐인 건축 양식이니 대하기가 남다르다.
자작자작 석탑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에 다소 흥분된 긴장이 묻어난다.
작은 석등을 앞에 두고 사찰 본전 건물인 극락전을 뒤로 한 오층석탑을 들뜬 마음으로 올려다본다.
흐린 날씨 속에 동화된 듯, 흙빛의 고색창연한 화강석이 장엄하게 서있다. 그래왔듯 내가 탑을 바라 보는게 아니라 탑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이니 다시 한 번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며 경건한 마음이 된다.
넓은 지대석 위에 넓적한 기단부가 굳건하며, 훌쩍 높고 두터운 일층 몸돌이 더욱 당당한 모습이다.
날개의 지붕돌이 그리 두텁지 않으며 끝 모서리에 들려진 약간의 반전이 경쾌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하늘과 석탑 상륜부의 노반과 보개가 함께 어우러져 장식을 하고, 하나씩 하나씩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승감이나, 어쩌면 이제 막 하늘에서 내려와 제자리에 착지한 경쾌함과 안정감이 교차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순간과 찰나와 같은 환상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착시현상이리라!
일층 몸돌의 넓은 면과 높은 체감에 비해 이층 몸돌부터 급격히 줄어드나 온전한 상륜부 부재들이 대물림 된 여는 집안 노리개처럼 세련되진 않았으나 편안해 지는 느낌을 준다.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장식의 우주를 조각하여 더욱 안정된 느낌을 주고, 얇지 않은 지붕돌 아랫부분에 빗물이 한 번 더 머물러 떨어져 몸돌이나 탑 속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절수구란 홈을 파 놓았다.
다소 황토 빛 석탑의 색상과 둥근 기단 받침석의 모양이 백제를 넘어 통일신라의 영광(?)을 거쳐 고려시대 축조한 석탑이나, 백제의 아름다운 멋과 향기가 고스란히 풍기는 정감어린 석탑이니 진정한 백제의 정신이 천년이 지난 후에도 살아있음을 본다.
그러나 자꾸만 석등의 모습을 곁눈질 하다 보니 다소 불완전한 상대석의 긴 연꽃조각이 눈길을 잡았나 보다. 넓은 팔각의 화사석과 넓은 네 면의 화창이 전체 크기에 비해 시원시원 하며 역시 팔각의 지붕돌의 단정함이 눈길을 끈다.
발걸음은 지금껏 아껴두었던 극락전으로 향한다.
일층 정면 다섯 칸 측면 네칸이며 이층엔 각각 두 칸씩 줄어있으며 일이층 모두 다포식 화려한 팔작지붕이니 그 멋스러움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음이다.
덧붙여 넓은 날개를 받치는 활주까지 놓여있어 견고한 우물살문과 더더욱 함께 튼실하며 장쾌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내부의 천정은 높은 통층(通層)이며 화려한 단청이 세월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바래있어 눈이 어둡다.
거대한 아미타불 좌상과 협시불 모두 흙으로 빚은 소조불이라 한다. 아미타불의 옷 주름이나 모습이 다소 도식화 된 단순한 모습이니 강화 석모도 보문사 마애불상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에 떠오른다. 협시불의 머리에 쓴 보관이 화려해 머리가 다소 눌린 모습처럼 느껴지니 중생을 향한 내려 깐 눈길의 시선이 다소 부담스럽다.
이것은 죄 많은 이놈의 장똘뱅이 심성이 아직은 씻겨 지려면 하 세월이라는 증거이니 합장하기가 쑥스럽다.
무슨 사연인지 종각에 있어야 할 조선 중기의 범종이 극락전 내부 안내인이 앉아 있는 의자 옆으로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자세히 살펴보지 못함이 아쉬우나 그리 크지 않은 범종 용뉴의 형상이 제법 익살스럽고 힘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극락전 앞에 놓여있는 부재들
발길은 영산전과 명부전을 애써 지나고 뒤편 산신각으로 향한다.
자료에 의하면 산신각에 산신과 함께 노니는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겹집살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가슴 두근거리며 찾았으나 아뿔싸...! 어느새 별도의 전각을 떡 하니 마련하여 이사 떠난 지 오래라 일러준다. 무례함에 합장하고 가던 길을 뒤돌아 내려오니 별도로 마련된 새집에 홀로 크지 않은 빈 방을 지키며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투명유리 액자 속에서 이놈 후세의 미천한 잡놈을 옆으로 지켜보며 있다.
무량사에서 자신이 직접그린 초상이라 한다지만 알 길은 없는 일이나 믿으면 믿는게지 무슨 의심이 그리도 많은가?
*매월당 김시습 초상
선 하나하나가 5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지적 내면의 갈등과 자신만의 세계를 지니고 다녔던 스스로의 모습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는 미천한 중생의 미련한 눈높이가 안타까울 뿐이다.
떠나오기 전 자꾸만 떠오르던 모습과는 다소 동떨어진 모습이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음이라 억지 자위를 하고, 어느 날 한명회가 갈겨 놓았다는 글귀에 붓을 들어 두 글자를 고쳐 놓았다는 구절 머리에 맴맴 돈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이 시를 보고 부(扶)자를 망(亡)자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 버렸으니,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는 뜻으로 바꾸어버린 그 기개와 재치로 한을 달랬던 글 구절을 생각하며 잠시 현실의 어떤 님들이 사직을 망치더니 여직 강호를 더럽히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니 울분이 치솟는다.
아서라, 고만 김시습의 묘소에나 가서 고이잠든 님께 하직인사나 올려야 겠다.
죽어 장사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받들어 시신을 그냥 두었다가 3년 뒤에 열어보니 살아있듯 생전의 모습에 놀라 모두들 부처가 되었다고 하였단다.
그리고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웠다. 지금은 그 사리는 모 박물관에 옮겨 보관 중이라 한다.
주차장 공터를 마주하고 작은 다리를 지나 버섯재배 양식장 입구에 작은 터를 두고 몇몇의 부도와 함께 놓여있는 김시습의 부도가 단연 눈에 띈다.
예쁜 달걀모양의 부도나, 배불뚝이 부도나, 석종형(石鐘形) 부도가 아닌 신라 선종이 들어오며 생겨난 부도의 초기 팔각원당형 모습을 하고 있다.
하대석엔 연꽃이 돋을새김 되어있고, 중대석에는 용 두 마리가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서로 다투어 노니고 있으며, 상대석 연꽃잎이 윤회를 상징하듯 위로 올려진 모양의 앙련 조각위에 그의 모습처럼 아무런 장식도 없는 민무늬 몸돌과 팔각의 지붕돌에 모서리 귀꽃만이 돋아 있다.
특이하게도 그 위에 다시 둥근 보주를 놓고 다시 팔각의 지붕돌을 하나 더 얹었다.
덕분에 가로와 세로의 균형감은 다소 떨어지며 악센트가 없는 듯 이런저런 굴절 된 세상살이를 살다가 간 님의 갈등을 대변하는 듯 하여 서글프다.
급한 정성은 불균형과 부조화를 낳게 마련인 것을....
가까이 가서 보니 석재의 질감은 다소 거칠며 색감 또한 떨어지나 하나하나 조각에 정성을 다한 모습을 볼 수 있어 다소 마음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한참을 앉아 노니고 싶은 마음은 꿀떡같으나 기다리는 선생님이 있어 김시습의 흔적과 마지막 족적을 남긴 무량사의 발길을 접는다.
*김시습 부도 중대석 - 용 두 마리가 구름속에서 서로 여의주를 다투고 있다.
그의 생애는 역사적 그 본류에 흐르기를 거부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독창적인 삶을 살아오며 선구자적 문학을 창출함과 동시에 지식인의 정신세계가 지향해야하는 교훈을 우리 후세들에게 제시함으로써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이방인처럼 낮은 지적소양에 의한 갈등은 그 흔적도 없음이나, 작금의 용기 없는 지식인이나, 편율(篇率) 된 지식인이 지성을 가장한 행태를 보며 더욱 어두워지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내려오는 길, 성종임금께서
“매월당은 하루 석 잔 이상의 술은 마시지 말라”
는 엄명에 말통 크기만 한 큰 잔으로 석 잔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이참에 나도 하루를 접고 석 잔의 술로 미련한 가슴을 달랠까 하다가 너무도 까분다 싶어 참는다.
첫댓글 3년전 들렸던 무량사를 자네로 인해 다시금 되새기게 하네 역시 좋군...
어디 댕기 오셨수?ㅎㅎㅎㅎ
비오는데 심란해 집니다.....
무량사 석탑에서 느꼈던 그 느낌 그대로 살아납니다 천왕문안으로 보이는 풍경도 넘 아름다웠는데
부도에 비석까지 세워져 있네요. 자세한 소견 감사히 읽었습니다.
거~~댕겨 왔수...?? ...난 또 집 나갔는 줄 알고...ㅎㅎ 잘 읽고 갑니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면 .....
초시님! 언제 댕겨 온겨, 같이 가기로 약속 했었는데.... 지때문에 혼자 떠난것 아니우, 8월에 떠나몬 연락이나 주오 그땐 같이 할 수 있으니..... 늘 그렇듯이 음악도 글도 사진도 다 좋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