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人類文明)의 역사(歷史)
21.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Abbaye de Cluny)
클뤼니 수도원(프랑스 부르고뉴)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은 정복왕 윌리엄 1세(William I, AD 910년) 때 기욤(Guillaume) 공작이 베네딕투스(Benedictus)파 수도사들을 위해 세운 수도원(修道院)이라고 한다.
초대 수도원장으로 베르노(Berno)를 임명했는데 베르노 수도원장은 베네딕도 규정을 철저히 지켰고 군주(君主)들이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을 인정하는 등 수도원 개혁 운동에 앞장섰던 분으로 지금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구교(舊敎)와 개신교(改新敎) 간의 분쟁인 위그노(Huguenot) 내란(內亂)과 봉건제도(封建制度)에 대항하는 공화정(共和政)의 선포 이후, 대 혼란의 정국으로 빠져들어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7~99)을 거치며 수도원 건물이 거의 파괴되고 말았는데 현재는 일부 몇몇 부분만 남아있지만, 역사적인 의미와 건축기법 등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인 해프닝 ‘카노사(Canossa)의 굴욕(屈辱-1075)’ 사건을 잠시 조명해 보는데 중세(中世)에는 종교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 카노사(Canossa)의 굴욕(屈辱>
중세(中世) 초기, 교황(敎皇)과 각국의 국왕(國王)들 사이에는 미묘한 흐름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를 지속했는데 11세기 후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는 각국의 국왕과 제후들이 갖고 있던 성직자들의 임명권(任命權)을 박탈하고 교황이 직접 임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다른 국왕들은 그런대로 수긍하는 자세였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Heinrich IV)는 왕권(王權)도 신이 직접 내린 것인데 교황의 주장은 신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런데, 결론을 말하면, 대부분 로마제국의 황제인 자신의 결정에 동조하던 각국의 국왕과 제후들이 모두 교황의 편을 들고 나서자 하인리히 4세는 설 곳을 잃게 된다.
1077년, 교황이 주최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회의에서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를 추방하기로 결의하자 하인리히는 교황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발표하지만,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왕비와 왕자,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몇몇 신하들을 데리고 추운 겨울 라인강을 건너고 알프스를 넘어 교황에 용서를 빌러 직접 간다. 마침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Canossa)성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은 절대로 만나주지 않고 아무리 요청해도 막무가내로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황제는 카노사의 성문 앞에서 모자도 없이 맨발에 얇은 겉옷만 걸친 채 3일 동안을 꼬박 눈 속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를 불쌍히 여긴 교황은 마침내 접견을 허락하고 모든 것은 교황의 허락을 받는다는 조건을 수락받은 후 파문(破門)을 취소했다는... 웃지 못할 희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