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8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기성 가요계에 진출하여 성공한 첫 가수이다.
김광석은 대구 대봉동에서 자유당정권시절
교원노조사태로 교단을 떠났던
전직교사 아버지의 3남 2녀 중 막내로
1964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5살 때인 68년에
서울로 올라와 창신초등학교를 다녔다.
왜소한 체격이라
'반토막', '파김치'란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지만
IQ 130의 영특한 아이였다.
76년 경희중에 입학해 현악반에 들어간 그는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를 읽게 되었고,
79년 대광고에 입학해 합창단원이 되었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들어가면서
카페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친구에게서 선물받은 민중 가요집,
'젊은 예수'에 수록된 '못생긴 얼굴'이란
노래를 부르다가 울었다.
당시 우연히 접한
한돌, 김민기씨 등의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고
노래서클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래서 3학년이 된 84년
서울지역대학생의 노래연합서클인
'연합메아리'의 멤버가 되어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김민기의 주도로
대학가 노래운동의 주역들이 규합하여 만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창단멤버가 되어 1집 앨범에 참여했다.
민중가수가 된 것이다.
이후 85년 1월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 중 큰 형이 사망해
6개월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복학을 한 그는 노래인생을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87년 10월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정기공연에 참여했다.
호소력이 담긴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가수로 떠오르며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되었다.
이처럼 투쟁성을 앞세운
민중노래운동에 열심이던 그에게
본격적인 대중가수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찾아왔다.
87년 여름,
음악친구들과 모여 별 생각없이 녹음한 습작들을
록 그룹 '산울림'의 리더 김창완이 듣고
음반제작을 주선해 주었다.
그 음반이 바로
1988년에 발매된 '동물원의 1집'이다.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거다라고 생각했다"는
김광석의 말처럼.
아무 기대를 않고 세상에 던져진 그의 노래
'거리에서'와 '변해가네'가
빅히트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어리둥절했던 그와 동물원 멤버들은
그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거리에서'와 '변해 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같은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노래는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밝은 이미지를 구축,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 의 작은 대안이 되었다.
이후 동물원의 일원으로 많은 공연에 참여했다.
용기를 얻은 김광석은 89년 10월,
솔로가수로 독립하여
기성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자작곡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첫 솔로 데뷔음반을 발표했다.
그리고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열심히 음악활동을 하던 중에
1년간 연애를 해 오던 서혜순과 1990년 결혼을 했다.
이후 91년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
92년 '나의 노래'가 담긴 3집을 발표했다.
92년엔 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 프로의 DJ가 되어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 때 외설문제로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연세대 마광수교수가 방송수위를 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징계를 먹었다.
진행자 김광석은 동조를 했다는 이유로
마교수와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한 해 동안 방송출연 정지조치를 받았다.
이 사건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김광석은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주류 가수활동이 아닌 콘서트와 음반을 통해서인기가수로 성공한 그는,
"얼떨떨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노래를 처음 시작했을 때 보다
노래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다소 약화돼 가는 것을 느낀다"며
성공적 변신의 달콤함을 스스로 경계했다.
그는 특유의 소탈하고 진솔한 무대매너로
관객들과 거리감을 없애는
성숙한 공연문화의 시금석을 마련했다.
93년 7월, 노래생활 10년을 결산하는
한 달간의 장기공연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열었다.
또한 나중에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 부르기 1집'이 그 징표다.
이어 94년에는 비관주의적 몸부림을 담은
'서른 즈음에'와 '일어나'를 수록하여
그의 음반 중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4집을 발표하며
비로소 자신만의 음악색깔을 찾아갔다.
1994년 9월엔 EBS FM에서
'음악의 세계' 진행을 맡았다.
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흐름을
하나의 앨범으로 계보를 정리한
'다시 부르기 2집'을 발표하면서 히트를 터트렸다.
또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집'은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의
자리매김을 있게 해 준 명반이었다.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다.
기념으로 2개월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 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11월에는 미국 팬실베니아 대학,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은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까지 몰려들어
항상 만원을 이뤘던 흥행보증 수표였다.
그로 인해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검소했던 그는 음반과 공연수입으로
홍대앞에 4층짜리 건물을 소유하는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었다.
96년 1월 6일,
'가수 김광석, 또 자살 가요계 충격'이란 기사가 눈에 박혔다.
팬들은 경악했다.
새벽 4시 30분께 마포구 서교동의 원음빌딩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그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부인 서씨는 "남편과 함께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맥주 4병을 나눠 마신 뒤 혼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거실에 인기척이 없어 나가보니,
남편이 옥상으로 연결되는 16계단 중 8번째 계단에서
굵은 전기줄에 목을 매단 채 숨져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팬들의 가슴에 맑은 웃음과 노래를 심어놓고
그는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뒤따랐다.
캐나다 유학문제 고민,
음악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발생한 조울증,
여자문제, 심지어는 타살설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더욱이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 서지원에 이어
김광석의 죽음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연 은퇴선언 등이
줄을 이어 벌어지자
조직폭력과 연관설까지 불거져 나왔다.
이에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김광석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이 이루어졌고
경찰전담반이 긴급편성이 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들은
급격하게 비대해진 대중문화 속에서
연예인의 자기관리의 한계에 대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앞에서
유가족들과 김민기, 백창우, 안치환, 노찾사, 동물원 등
50여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제가 치러졌다.
노래 패 '노래 마을'의
대표 백창우는 조시를 낭송했다.
벽제에서 화장을 마친 후,
팥알 크기의 대형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었던 그의 유골은
서울 서초구 수안사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부활이었다.
49제 날엔 60명의 가수가 참여해
연세대 대강당에서 추모콘서트가 열렸고,
9월엔 팬클럽 '둥근 소리'를 중심으로
그의 유작 라이브 CD 앨범
'인생 이야기'와 '노래 이야기' 등 2장이 발매되는 등,
그를 아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자살 전날 밤 늦게까지 함께
음악을 이야기했던 선배 백창우는,
김광석의 미발표곡 '부치지 않는 편지 1, 2'를 담은
추모 음반 '가객'을 1주기 기념으로 발표를 했다.
이 음반은 음악적인 지평을 넓히고 싶었던 김광석이
노래마을의 리더 백창우와 시인 정호승 등과 함께
시와 노래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담긴
'노래로 만나는 시' 앨범을 위해 녹음한 최후의 음원이었다.
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는 때이른 죽음을 예견한 듯 한이 담긴
애절한 목소리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이 음반은 10만장이 팔려 나가며
각종 방송 차트에 올라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98년 말, 김민기를 회장으로하여
선후배 50여명이 모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대학로에 추모비 건립과
신인 포크 가요제 개최를 논의했다.
그 결과 99년 3주기 때는 30여 팀이 참가해
'김광석 다시 만나기 - 99 포크 페스티벌'을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개최했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그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가 수록되어 다시 한번 그를 추억하게 했다.
이 노래는 입대를 앞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공식 주제가가 되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는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과 가족 혹은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모두의 가슴을 울리며 파고 들었다.
2000년 12월에 발매된 추모 음반,
'김광석 앤 솔로지1 - 다시 꽃씨 되어'에선
거칠고 지친 듯한 그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희망의 불씨처럼 아련함이 살아 있었다.
생전의 김광석 목소리와 박학기, 안치환, 윤도현,
이소라, 김건모, 강산에, 권진원 등
그의 음 악 동료와 후배 가수들의 참여로
더빙 제작된 이 음원은 의미있는 시도였다.
2001년엔 미발표곡,
'틈', '외로운 밤', 애창곡 '먼지가 되어' 등을 수록한
2장의 앨범 이 김광석 클래식'으로 발표가 되어
그를 그리워 하는 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요절 가수 김광석은,
1990년대에 이르러 힘없이 주저앉은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 문화에
소생의 기름진 자양분을 공급했던 아티스트였다.
"더 이상 나의 음악을 포크로 보지 말라"던
생전의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댄스와 발라드 음악에 밀려 고사상태에 빠졌던
모던 포크를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의 음악활동은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외롭게 벌였던 그의 음악 독립전쟁은
요절로 인해 완성을 보지못한 아쉬움을 남는다.
쇠로 만든 '도브로' 라는 기타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요절 포크 가수 김광석.
헤어질 때면 누구에게나 '행복하세요' 라는
인사말을 남겨주었던 아름다운 심성만큼이나
그의 노래들은 팬들의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01 거리에서02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03 기다려줘
04 사랑했지만
05 사랑이라는 이유로
06 슬픈노래
07 그날들
08 나무
09 나의 노래
10 잊어야한다는마음으로
11 서른즈음에
12 일어나
13 바람이 불어오는 곳
14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15 그녀가 처음 울던 날
16 이등병의 편지
17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18 새장속의 친구
19 내사람이여
20 변해가네
21 불행아
22 바람과 나
23 너에게
24 잊혀지는 것
25 먼지가 되어
26 그대의 웃음소리
27 광야에서
28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29 말하지 못한 내사랑
30 그루터기
첫댓글 귀중한 자기 목숨을 왜 끊을까...
피치못할 사정이 있긴 하겠지만...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