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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기게 된다. 글을 남 긴다. 보라...
. 경제학 천재의 탄생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인 1915년 5월 15일,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약사였던 프랭크 새뮤얼슨과 엘라 새뮤얼슨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난다. 프랭크와 엘라 부부는 아들의 이름을 폴(Paul) 로 짓는다.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은 3형제 중 둘째 아들이었다.
새뮤얼슨은 17살에 미국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과에 합격 통지를 받고,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르기 전인 1932년 1월 2일 오전 8시, 시카고 대학교의 신입생 프로그램 수업에 처음으로 참석한다. 무슨 수업인지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그 수업이 경제학 수업이었다. 맬서스의 인구론을 진지하게 토론하는 수업이었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다고 한다. 새뮤얼슨은 이 때를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1932년 1월 2일 오전 8시, 시카고 대학교 강의실에서 나는 경제학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17살의 어린 경제학자는 이후 94살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경제학' 이라는 학문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다.
2. 전액 장학생, 경제학자로 성장하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새뮤얼슨은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참고로 당시 그를 가르쳤던 교수진의 수준이 이렇다.
1) 프랭크 나이트 : 불확실성과 위험 이론을 체계화함으로써 미시경제학에서 불확실성 하의 효용 극대화 이론의 시초가 된 학자다. 이 사람이 바로 오늘날 '시카고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새뮤얼슨은 하버드대 대학원으로 진학하면서 케인즈학파의 길을 걷는다)
2) 제이콥 바이너 : 국제무역론에서 지역무역협정의 무역창출효과와 무역전환효과를 처음 제시한 학자다.
3) 헨리 사이먼스 : 중앙은행이 경기 조절을 위해 준칙 아래 화폐 공급량을 조절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오늘날 통화 정책의 원조이다.
이렇게 경제학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교수진 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새뮤얼슨은 3년만에 조기 졸업을 하고, 미국 전체에서 성적이 가장 뛰어난 경제학과 졸업생 8명에게만 대학원 장학금을 전액 지원하는 장학 프로그램에 선발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조건이 학부와 다른 대학교의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매우 만족했던 그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학부 시절에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대학원 동료 학생 중에 경쟁이 될 만한 라이벌조차 없어서 수업을 듣기가 굉장히 편했다고 한다.
1930년대 당시 유럽에서 나치의 탄압을 피해 저명한 유대인 학자들이 미국으로 많이 이주하였는데, 이 가운데 하버드 대학교에 정착한 경제학자 3명이 있었고 이들이 새뮤얼슨의 지도교수가 된다.
1) 바실리 레온티에프 : 미시경제학의 레온티에프 효용곡선으로 유명한 그 학자다.
여기서 새뮤얼슨이 얼마나 천재인지 알 수 있는 사실이 나오는데, 향후 그가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레온티에프보다도 노벨경제학상을 3년 더 빨리 받게 된다는 것이다(새뮤얼슨 1970년, 레온티에프 1973년).
2) 조셉 슘페터 : 주로 경영학에서 창조적 파괴로 유명한 그 학자다.
3) 고트프리드 하벌러 : 국제무역론에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체계화한 학자다 (19세기에 리카도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이후 하벌러가 모형으로 만든 것임).
새뮤얼슨은 학부뿐만 아니라 이렇게 대학원에서도 후덜덜한 교수진의 교육을 받으면서 당대 최고의 학자로 성장한다.
3. 25살에 MIT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되다
이미 경제학 천재였던 새뮤얼슨은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인 1940년, 25살의 나이에 MIT 대학교의 경제학 조교수로 임용된다. 폴 새뮤얼슨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이미 25살 때 내 나이보다 많은 논문을 썼고, 그 논문의 대부분은 수학적 내용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MIT 는 공대에서 종합대학으로 확장하던 시절이라서 경제학과에 학부 교육 과정만 있고 대학원 과정도 없었다. 이러한 MIT 경제학과를 오늘날 탑스쿨의 일원으로 성장시킨 사람이 바로 폴 새뮤얼슨인 것이다.
4. 수리적 방법론을 경제학에 도입하다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은 역사적, 철학적, 제도적 접근 등 주로 비수리적인 방법론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케인즈 역시 본인은 수학에 뛰어났지만, 실제 자신의 저술에서는 수학을 많이 사용하지 않은 학자였다.
그러나 수학 덕후였던 새뮤얼슨은 교수로 재직 중일 때 수학적 방법론을 주제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이를 책으로 발전시켜 1947년, 32살 때 자신의 첫 저서를 내놓는다. 이 책이 바로 '경제 분석의 기초(Foundations of Economic Analysis)' 이다.
새뮤얼슨은 수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선배 경제학자들의 주요 이론을 완전히 소화하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이 책에서 경제학에 도입한다.
1) 경제학의 기본은 소비자의 효용 극대화와 기업의 수익 극대화이다.
2) 미적분 기법을 사용해 효용을 분석한다.
3) 변수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균형을 비교하는 비교정태 분석을 실시한다.
4) 균형은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안정적이다.
즉, 오늘날 전 세계 모든 경제학개론에서 다루는 내용을 폴 새뮤얼슨이 처음으로 체계화해서 1947년에 제시한 것이다.
새뮤얼슨이 등장하기 이전 20세기 초반까지의 경제학은 하나의 완전한 학문으로서 형태를 갖추지 못한, 백가쟁명의 수준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담 스미스, 알프레드 마샬 류의 고전 경제학자들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철학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이 17~19세기 사상가 중에 경제에 관심을 보였던 이들의 학문 체계를 '정치경제학'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석 대상이 개별 행위자의 효용 극대화라는 점, 그리고 그 분석 방법은 철저하게 수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때부터 경제학은 비로소 다른 분야의 영향을 털어내고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서 형태를 갖추게 된다.
5. 케인즈 학파를 발전시키고 경제학의 패권을 미국으로 가져오다
새뮤얼슨이 석사 학위를 받은 1936년, 영국에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향후 인류 지성사의 기념비적 역작이 될 책을 출간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이다.
이 책을 통해 케인즈는 대공황을 극복할 방법으로 국가의 적극적인 확장 재정 정책을 통한 유효 수요의 창출, 화폐의 유동성 선호설 등 향후 경제학계에서 '케인즈 혁명' 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또한 케인즈의 이론은 단순히 개별 행위자의 효용에 그치지 않고,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경제 지표를 분석하고 경제 정책을 다뤄야 한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일깨웠는데, 이로부터 미시경제학과 함께 현대 경제학의 두 기둥을 이루는 거시경제학이 탄생하게 된다.
케인즈의 주장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고,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학자들의 집중적인 토론 대상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케인즈의 이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이가 바로 폴 새뮤얼슨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케인즈의 주장은 빠른 속도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시작된 냉전기는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특징지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재정 부양을 강조하는 케인즈의 주장은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에 비해 사회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색채가 강했던 미국에서는 더 그러한 경향이 짙었다. 1940~50년대 미국에서 케인즈주의자는 거의 사회주의자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새뮤얼슨의 생각은 달랐다. 케인즈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것이 천재의 작품임을 직감한 그는 열렬한 케인즈주의의 옹호자가 되었다.
케인즈의 책은 하나의 완결된 이론서라기 보다는 케인즈가 다양한 주장을 펼친 정책적 제안서에 가까운데, 이를 체계적인 이론으로 풀어낸 사람이 바로 새뮤얼슨인 것이다.
새뮤얼슨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케인즈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이론화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미국 사회 전반에 배어있던 반 케인즈주의를 타파하고, 미국 경제학계에 케인즈의 주장을 널리 퍼뜨린다(당연하게도 새뮤얼슨은 강경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케인즈학파의 탄생이다.
이후 1960년대 들어서 케인즈주의가 확고한 경제학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새뮤얼슨을 비롯한 미국의 케인즈학파가 경제학의 패권을 쥐게 된다.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유럽 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이제 완전히 미국이 주도하는 학문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케인즈의 이론은, 정확히 말하자면 '새뮤얼슨이 해석한 케인즈의 이론'인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GDP 의 구성항목과 케인지언 크로스(케인즈의 삼각형)이다.
오늘날 폐쇄경제에서 국가의 총수요를 측정하는 GDP 의 대략적인 구성항목을 소비(C), 투자(I), 정부지출(G)의 3가지로 나눈다. 이것은 케인즈의 이론을 바탕으로 새뮤얼슨이 처음으로 분류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GDP 에 근거하여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직관적 그림을 케인지언 크로스라고 한다. 아래 그림을 경제학 교과서에서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이 그림을 처음으로 그린 사람이 새뮤얼슨이다.
6. 신고전파 종합 분석을 창시하다
그런데 새뮤얼슨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새뮤얼슨은 케인즈의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경제학을 배운 상태였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고전학파의 경제학과 케인즈의 경제학이 반드시 극한 대립을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시장의 균형은 단기적으로 깨질 수 있어, 케인즈가 말한대로 정부가 개입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시장이 다시 균형을 찾아갈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계획경제처럼 정부가 장기간에 걸쳐 모든 것을 결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새뮤얼슨은 "내가 천재적인 두뇌로 생각을 해 보니까, 단기적으로는 케인즈의 분석이 맞고, 장기적으로는 고전학파의 분석이 맞는 거 아닌가?" 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체계화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중심을 형성하는 '신고전파 종합(neoclassical synthesis)' 이다.
경제학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히 뚜렷한 학문 체계이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은 크게 두 학파, 정부 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즈의 전통을 잇는 새케인즈 학파(New Keynesian School)와 시장 자율을 강조하는 고전학파의 전통을 잇는 새고전학파(New Classical School)로 나뉜다.
이 안에서도 각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많은 공통점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두 가지 학파가 주류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류 경제학의 전통을 새뮤얼슨이 세운 것이고, 우리나라 4년제 대학교 경제학과 학생들이 배우는 학문이 이 주류 경제학이다.
그리고 비주류 경제학에는 하이에크를 필두로 하는 오스트리아 학파, 마르크스 류의 공산주의 경제학, 베블런 류의 제도주의 학파(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장하준 교수가 여기 속한다), 케인즈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케인즈 학파와 해석이 달라서 비주류로 밀려난 포스트 케인지언 학파 등이 있다.
7. 현대 경제학의 모든 분야에 이름을 남기다
그렇다면 새뮤얼슨은 과연 케인즈와 고전학파를 비롯한 선배들의 이론만 잘 정리한 학자인가? 물론 그 정도로는 새뮤얼슨이 현대 경제학을 만들었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새뮤얼슨은 현대 경제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자기 이름을 남겼는데, 잘 알려진 내용 위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시경제학에서 행위자의 추상적이고 사전적인 효용만 분석할 것이 아니라, 실제 시장에서 선택된 결과를 보고 효용을 역으로 분석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이 현시선호이론으로 발전한다.
2) 재정학에서 공공재의 최적 공급을 달성할 수 있는 조건을 분석하였는데 이를 '새뮤얼슨 조건'이라고 한다.
3) 국제경제학에서 고전학파의 구매력 평가설에 대응하여, 교역재와 비교역재의 상대가격 변화로 인해 구매력 평가설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를 체계화했는데, 이를 발라사와 새뮤얼슨의 이름을 따서 '발라사 - 새뮤얼슨 효과'라고 한다.
4) 국제경제학에서 무역의 효과로 인해 재화의 상대가격 변화가 생산요소의 소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는데, 이를 스톨퍼와 새뮤얼슨의 이름을 따서 '스톨퍼 - 새뮤얼슨 효과'라고 한다.
5) 주식시장에도 관심이 많아 '시장은 항상 정보를 즉각 반영하기 때문에 주가의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재무경제학의 효율적 시장 가설의 기초가 된다.
6) 거시경제학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케인즈학파의 이론이 새뮤얼슨의 케인즈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표적으로 IS-LM 곡선의 경우, 또다른 케인즈학파인 힉스와 한센이 각각 초기 모델을 완성해 놓은 것을, 새뮤얼슨이 합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형태(우하향하는 IS, 우상향하는 LM)로 다시 그린 것이다.
7) 또한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율의 역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필립스 커브도, 뉴질랜드 경제학자 윌리엄 필립스가 처음에 아이디어 형태로 제시한 것을 새뮤얼슨이 분석해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8)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 자식을 낳으면서 세대 간에 중첩되는 인간의 경제적 생애주기를 분석하기 위해 '세대 간 중첩모형'을 체계화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정년 연장과 인구 고령화 등의 경제적 효과 분석에 사용되고 있다.
8. 전세계에 경제학을 전파하다
새뮤얼슨은 단순히 학문을 체계화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대중화하는 데도 나섰다. 그 결과 탄생한 책이 1948년에 나온 경제학 개론서 'Economics' 이다.
이 책은 1980년대까지 경제학개론의 필수 교재로 자리잡으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 서적의 위치에 오른다. 새뮤얼슨은 이 책에서 수학의 사용을 자제하고 그래프 위주의 직관적 설명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기의 요인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대학교에서 교양, 혹은 전공과목의 기초 과목으로 배우는 '경제학개론'의 내용, 그리고 경제학을 따로 배우지 않았더라도 여기저기서 듣고 보고 되는 경제 관련 내용이 대부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의 3가지 기본 과제로 흔히 1)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 2)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3)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인가를 꼽는데, 이 책의 초반부에서 새뮤얼슨이 처음으로 쓴 내용이다.
이 책의 패권을 50여 년만에 무너뜨린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맨큐의 경제학'인데, 맨큐의 경제학 내용 상당수는 이 책의 내용을 참조하고 있으며, 맨큐의 경제학이 1997년에 처음 출간될 때 출판사에서 내세웠던 홍보 문구가 '새로운 새뮤얼슨(the new Samuelson)'이었다.
(참고로 맨큐는 새뮤얼슨과 상당히 행보가 비슷한데, 케인즈의 전통을 따르는 학자라는 점, 그리고 20대 젊은 나이에 경제학계의 천재로 떠올랐다는 점이 그렇다. 거시경제학에서 유명한 이론 중에 하나가 맨큐가 27살에 발표한 메뉴비용 이론인데, 이것은 맨큐가 하버드 로스쿨과 MIT 경제학과 대학원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절 식당에서 식사하던 도중에 메뉴판을 보고 휴지에 끄적인 그래프를 바탕으로 전개한 이론이다.)
9. 심지어 칼럼까지 잘 쓰고 한국 경제까지 관심을 가지다
못 하는 게 없었던 새뮤얼슨은 심지어 글까지 잘 썼다. 수학 덕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글은 수학적 난해함없이 이해하기 쉽도록 잘 쓴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에서 1966년부터 1981년까지 15년간 매주 칼럼을 쓰면서 경제학을 쉽게 해설하고 경제적 사고방식을 많은 이들에게 퍼뜨리는 데 힘썼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우리나라 언론에도 15년간 매주 경제 관련 칼럼을 쓴 지식인이 있는지 살펴 보면 알 수 있다.
그냥 학자도 아니고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일생에 걸쳐서 388편의 논문을 쓴 학자가 15년간 쉬지 않고 칼럼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뉴스위크 칼럼만을 말한 것이다. 새뮤얼슨은 뉴스위크 칼럼이 종료된 이후에도 세계 곳곳의 언론에 글을 기고했는데, 그 중에는 우리나라의 YBM시사영어사에서 발간한 영어 학습용 월간지 'YBM English' 도 있었다.
이것은 시사영어사 사장이었던 민선식 씨가 MIT 유학 시절에 그의 제자였던 인연에서 기인한 것인데, 민 사장의 부탁을 받고 새뮤얼슨은 1990년부터 매달 YBM English 에 한국 경제에 대한 조언을 비롯한 칼럼을 기고했다. 2009년 별세할 때까지 20년을 쓴 것이다.
10. 노벨경제학상을 받다
이쯤되면 노벨경제학상을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사실 노벨경제학상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 출발점이 늦어서 1969년에 처음 개시되었는데, 폴 새뮤얼슨은 1970년 제2회 때 상을 받는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새뮤얼슨은 노벨 경제학상 이전에도 이미 경제학계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은 적이 있다(32살 때인 1947년에 수상).
이 메달은 미국이 배출한 최초의 거장 경제학자라 할 수 있는 존 베이츠 클라크를 기리기 위해 2년에 한 번 40세 이하의 미국 국적의 경제학자에게만 수여한다. 수상자 상당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노벨경제학상의 전초전으로도 여겨진다.
11. 천재 잠들다
이렇게 일생에 걸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새뮤얼슨도 운명을 벗어나지 못 하고 2009년에 자택에서 9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모차르트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흔히 천재의 특징 중 하나는 요절이 꼽히곤 한다. 그런데 새뮤얼슨의 경우에는 천재가 장수까지 할 경우에 얼마나 엄청난 업적을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새뮤얼슨은 94년을 살면서
1) 선배들의 이론을 전부 정리하고
2)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3) 학문의 토대를 닦고
4) 자신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제자들을 길러내고
5) 자신이 재직한 대학을 세계 최고로 만들고
6)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교과서를 쓰고
7) 평생 칼럼을 쓰고
8) 논문 388편을 발표했다.
12. "내가 현대 경제학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새뮤얼슨의 업적을 이렇게 정리했다.
"모든 학자들은 단 한 편의 중요한 논문이라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 이슈에 있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논문 말이다. 새뮤얼슨은 이런 논문을 수십 편이나 썼다. 국제무역, 성장, 금융, 투기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새뮤얼슨의 논문은 여러 세대에 걸친 학자들에게 중요한 아젠다를 제시하였다."
이 글의 마무리는 폴 새뮤얼슨의 회고 강연에서 스스로에게 내린 평가로 대신한다.
"현대 경제학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내 영향력이 모든 분야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I can claim that in talking about modern economics I am talking about me. My finger has been in every 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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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 도 책 상 -중 -하를 지니고 있었지요... 폴 새 뮤 얼 슨의 다소 길 다란 책이었습니다.
해석이 안되는 건 한 문으로 쓰여진 것은 출 판 사의 사 장이 직 접 전 화를 받 길래 받 으 시 길래 한 문으로 되어 있는 것 은 본인이 알려 주 겠다고 하시더군요..
중 책은 없어지고 있는데.
경 영 마 케 팅 세일즈 시 장 의 규 모 판 단 홍 보 판 매 기 획 생 산 재무 하고는 거리 가 다 소 있 는 .
호랑이 가 죽 2천 만원, - 대
양 대 축이 대 표 격으로는
자 유 시장 경제의 표 본의 저 작 권의 거의 일 인 자 지 적 재산권이 다른 언 론 매 체에서는 지 적 자산권이라고 표 하시는 분들도 계 시면 아무또록 엄 연 히 이제는 존 재 하고 거 머쥘 정도로의 그 오 스트리아의 경 제 학 자의
프리드 리히 하이에크의 분이 시고 한 국에 다 소 쉽 게 풀어서 해석을 내놓는 분의 자유 경제원의 김 정 호 박 사 !! 그리고 한 분의 세 계적인 분의 또 다른 분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아마도 손 꼽을 수 가 있으 실 것 입 니다.
정 해 진 질 서에서는 고 만 한 실 적과 업 적을 낼 수가 있는 반 면에
불 확실 한 경제와 예측 불 허의 상황에서 인 간은 적 응도 오히려 더 빠르게 할려고 하는 하려고 하는 습 성들을 다 분 히 내어 보일 수가 있으면 적 응을 나중에 하든 지 바로 하든 지 간에 상관없이 도
이런 불 확실한 비예측성의 경제에 크게 치 중을 하시는 분이 바로 이 하이에크 석 학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