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5일 수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R)
제1독서 토빗 3, 1 - 11 ; 16 - 17
그 무렵 나 토빗은 1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2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3 이제 주님, 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살펴보아 주소서. 저의 죄로, 저와 제 조상들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잘못으로 저를 벌하지 마소서. 그들은 당신께 죄를 짓고, 4 당신의 계명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저희를 약탈과 유배와 죽음에 넘기시고, 당신께서 저희를 흩으신 모든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와 조롱거리와 우셋거리로 넘기셨습니다.
5 저의 죄에 따라 저를 다루실 적에 내리신, 당신의 그 많은 판결들은 다 참되십니다. 저희는 당신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당신 앞에서 참되게 걷지 않았습니다.
6 이제 당신께서 좋으실 대로 저를 다루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7 바로 그날,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자기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8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그 여종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당신 남편들을 죽이는 자는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은 이미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누구의 이름도 받지 못했어요. 9 그런데 당신 남편들이 죽었으면 죽었지 우리는 왜 때려요? 남편들이나 따라가시지. 그래야 우리가 당신의 아들이나 딸을 영영 보지 않게 되죠.”
10 그날 사라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여 울면서, 자기 아버지 집의 위층 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고서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외동딸밖에 없었는데 그 애가 불행을 못 이겨 목을 매고 말았구려.’ 하면서, 내 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만일 그렇게 되면 늙으신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슬퍼하시며 저승으로 내려가시게 되겠지. 목을 매는 것보다는, 평생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11 그러면서 사라는 창 쪽으로 양팔을 벌리고 기도하였다.
16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17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복음 마르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고통 앞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크나큰 시련이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고통 앞에 힘겨워하고 방황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인물들이 계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사셨던 신앙의 선조들, 특히 엄청난 인생의 좌절과 쓴맛을 맛본 선배들의 삶과 신앙입니다.
토빗은 쓰나미처럼 밀어닥치는 연이은 시련 앞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고통의 강도가 세기로는 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욥기 2, 13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 주야로 땅에 앉아 욥을 바라다볼 뿐 입을 열 수 조차 없었다. 그의 고통당하는 모습이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왕의 아내 이제벨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에 만연된 바알 우상 숭배를 타파하였지만 그로 인해서 이세벨의 미움을 사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광야를 방황하다 지칠 대로 지쳐 하느님께 자기를 제발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 19,4)
얼마나 감당해야할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목숨까지 거두어달라고 하느님께 청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고통의 무의미성 앞에서 자기의 생을 저주하고 죽음을 갈망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만은 저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토빗, 욥 그 누구도 자기들이 태어난 날은 저주하지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저주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하느님께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았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런 사건들을 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실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이나 다가온 고통을 피하지 말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우리가 그 고통과 직접 대면할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고통이란 어떻게 피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겪어야 하는 가의 문제라고 합니다. 즉 고통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주어진 고통을 잘 참아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로 고통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고통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꺾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죽음이나 고통을 제거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치워버리려 오신 것이 아니고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현존으로 고통을 채우러 오신 것입니다”(클로텔).
예수님께서는 비록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으셨지만 고통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우리 삶에서 눈물을 없애지는 않으셨지만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십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은 불필요한 고통을 양산할 뿐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고통이 뜻하는 의미, 해결방안,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도 우리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고통 없는 인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입니다.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밥을 먹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고통이 좀 가벼워졌을 때 이웃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통으로 인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한다면 그 고통을 나누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힘겨울 때는 그 누구보다도 고통을 보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살리시려고 또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하시며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에만 집착하기보다는 고통 그 이면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의도,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들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묵시 3,19-20)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