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위한 미니 콘서트
이 미 나
달빛이 휘황하게 쏟아져 내리는 밤이다. 달밤은 누구라도 추억에 잠기게 하는가 보다. 월요일 저녁이면 우리 집 TV의 채널은 어김없이 9번으로 돌려져 있고 신명 나는 트로트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물 흐르듯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늘 습관처럼 그러하셨듯이, “오늘 가요무대, 가요무대" 하시면서 재차 강조하신다. 혹시라도 당신께서 잊어버리시면 우리라도 당신의 세월에 무뎌져 버린 기억력을 깨워 달라는 일종의 부탁을 해 오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잊어버릴세라 부담감을 느끼고 시간이 되면 리모컨을 돌리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도통 알 길이 없지만, 그 프로그램이 생긴 지 30여 년이 된 지금까지 줄곧 그러하시다. 아마도 할머니가 이 TV 프로를 좋아하시는 이유는 30년대 일제 강점기, 6.25 한국전쟁, 그리고 급변하는 산업화까지 겪은 할머니와 같은 시대의 작사, 작곡자가 노래를 만들었기에 또한 그들의 정서를 잘 읽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노래들의 정서는 오래전 헤어진 가족, 친구, 전우들에 대하여, 어버이에 대한 효성,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사연을 담은 내용이 많다. 그 프로그램에서 인기 신청 곡인 울고 넘는 박달재, 찔레꽃, 비 내리는 고모령, 꿈에 본 내 고향, 나그네 설움 등이 그러한 내 생각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여자 가수들이 겨울인데도 어깨선이 훤하게 드러난 드레스에 치렁치렁한 귀고리를 걸고 나오는 모습이 조금은 당황스럽다는 푸념 외에는 프로그램 전체에 대한 칭찬 일색이시다.
오늘도 베개를 베고 누워 계시는 할머니의 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려는 듯 TV에 고정되어 있다.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할머니 가슴 한구석을 후벼 파듯이 들어오기라도 하는지 손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감정의 파도에 자신을 맡기는 듯하더니 이내 애잔하게 노란 나비가 꽃잎에 살포시 착륙하듯 숨죽이며 고요해지신다.
“천둥 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임아 물 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감정을 넣어 간절히 바이브레이션으로 끝맺음하는 가수를 보며, 할머니의 마음은 누추한 촌락에서 젖먹이 아들을 등에 업고 6.25 사변에 남편과 사별했던 그 시절을 헤매고 계신다. 모진 세상 풍파를 감내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몇십 번이나 몸부림치고 계시는 듯하였다.
할머니는 그때 그 시절,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았던 그 시간, 또 조건반사적으로 올라오는 뼈에 새겨진 장면들을 마주하며 그 가사들을 따라 부르고 계신다. 가사 하나하나가 할머니의 삶이고, 음의 높고 낮음이 할머니의 삶의 격정들이었다.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간다. 이를 알고나 있었는지 이번에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 흘러나왔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목청껏 뽑아내는 그 소리에 듣는 이들의 마음은 과거의 슬픔으로 잦아들어 앙금처럼 사뿐히 가라앉아 버린다.
할머니는 아마도 이 곡을 들으시며 50년대 그 버거웠던 청춘이 망막으로 떠오르실 것이다.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던 가난은 정말 신물이 났다고 속으로 읊조리고 계실까. 구슬픈 가락이 할머니의 마음을 더 애잔하게 만든다. 출연 가수는 할머니의 고단했던 삶을 위로하듯 인사하고 사라져 버린다.
이번에는 삶의 무게로 휘어졌던 허리를 곧추세우게 하는 청량제 같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인생의 혹독한 겨울이 가고 또다시 새로운 봄이 와 코스모스꽃이 만발하듯 경쾌한 음악이 시작되자, 할머니는 이내 힘겨웠던 잔상을 떨쳐 버리시고 멜로디에 신명을 내신다.
할머니의 삶에는 슬픔만 있으셨던 것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울음이 있었지만, 아침에는 기쁨이 오는 것처럼 한 많은 세월의 강줄기가 흘러가고 희망의 동이 터왔다. 힘겨운 삶의 폭풍우 속에서도 아들을 키워내기 위하여 피땀 흘리며 일군 그 노력이, 교대 합격과 교원발령이라는 아름다운 꽃으로 결실을 본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아내와 삼 남매를 둔 가장이 되었다. 할머니는 음정에 맞춰 자신의 지난 생애를 자축하듯 신명을 내신다.
그 프로그램은 이처럼 기쁨과 슬픔을 노래하며, 할머니의 삶과 어우러지는 한편의 장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월요일 저녁이면 "가요무대 하는 날이여 가요무대" 하시며 잊지 않고 챙기시는 것이겠지.
55분간의 여정을 마칠 시간인지 김동건 아나운서가 마지막 인사를 시작하자 할머니는 사랑하는 연인과 작별을 하듯 못내 아쉬워하신다. 오늘의 마지막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주말연속극 주제가 “사랑 찾아 인생을 찾아”라는 곡이다. 할머니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저것 참 좋아" 하신다.
나는 그 순간 할머니의 인생이 녹아 있는 그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노래를 내가 직접 들려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주 월요일로 시간을 맞출 것 없이 내가 그 프로그램을 같이 보았다가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기억해서 배워 수시로 불러드리면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느 날 저녁 노인정에 다녀오신 할머니께 "할머니, 제가 가수 주현미 같이는 못 불러도 그 노래 할머니한테 불러드릴 수는 있는데요. 제가 할머니 적적하실 때 불러드리면 어떨까요?" 하고 제안을 했다.
컴퓨터에서 동영상으로 우리가 보았던 가요무대 프로그램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드리며 동시에 “제가 그 노래를 따라 불러드릴게요." 하자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아이고 그려 울 애기. 울 애기가 노래 불러 줄 수 있어?" "그럼요 할머니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합창부였고, 중학교 때 아이들이 교실 분위기 띄우려면 저를 불러서 노래를 시켰는데요, 뭐, 제가 언제든지 불러드릴게요." 하며 내 과거의 못 말리는 화려한(?) 경력을 소개했다.
"와! 울 애기가 노래도 잘 부르고 용기도 있었구먼." 할머니도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시며 기뻐하셨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이내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좋아하시는 현철의 봉선화 연정 불러드릴게요." “그래 해 봐 울 애기”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내가 입을 떼고 목청을 뽑자 할머니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소풍 날짜를 받아 놓은 초등학생처럼 좋아하셨다. 어느덧 우리 집은 월요일이 되지 않아도 창 너머로 노랫소리가 흘러넘쳤다. 겨울이 다 지나간 것도 아닌데 봄날 같은 나날들이다. 기온은 올라가 개천에 개구리들이 동면에서 깨어 개굴개굴 울고 있는 밤, 노인정에서 할머니가 돌아오시는 9시가 되기 전에 나는 열심히 컴퓨터 동영상 "다함께 차차차"를 보며 노래를 불러 대고 있다.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차차차"
내가 연습하는 이 노래 가사처럼, 긴긴 세월 실타래처럼 꼬인 할머니의 감정의 선이나 마음의 짐, 상처들을 온전히 내려놓으시고, 새 희망으로 가득 찬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라며 더욱더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방안에는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가, 바깥 논두렁 가에서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