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상반기 《시사사》신인추천작품상 당선자 _ 박지우, 하보경
철학이 부족한 내일 (외 2편)
박지우
1
한 사람이 걸어온다. 기울어지는, 또 한 사람이 걸어온다. 비틀거리는, 궤도를 이탈한 소리가 광장 한쪽으로 쏟아진다. 햇볕조차 무겁게 내려앉는다. 길이 사라지고 증권시세표에 흔들리는 눈빛들, 아우성인 도시는 흉터가 많다. 한 시대의 단련된 혀들이 위태롭다. 속도를 밀어낸 자리에 화분이 진열되고, 하나 둘 조화가 피어난다. 아우성이 무리지어 걸어간다. 하늘이 몇 겹 출렁이다 무너진다. 바람은 자크처럼 찢어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바벨의 촛불들이 일렁인다. 광장이 펄럭인다.
2
시간이 부유하는 도시 오래된 기억들이 재생되어 펼쳐진다
어디서 본 듯한 막 태어난 순간들이 익숙한 발걸음으로 나를 방문한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하이힐 굽이 조금 더 낮아졌다는 것
무릎의 긴장을 엘리베이터에 떠맡기며 고공행진을 감행하는 나날
능숙하게 자본주의를 요리하는 이 도시에 빌붙은 나는
두툼한 머플러를 두르고 자라목이 되는 방법을 복습하며 집행유예를 꿈꾼다
노랑의 독점
1
순간 꽃잎이 오므라든다
획일화된 어둠들, 입모양이 똑같다
모여드는 바람 우울한 계절의 클랙슨 소리
돌돌 입을 말고 낙하하는 통꽃들
붉은 바닥은 꽃으로 위장한다
불안이 거리를 서성거린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삐삐거리는 청춘들
지난 계절 갯바람을 따라 온 상춘객의 발길
떼 지어 밀려오는 파도의 치열한 눈빛
기억의 줄을 당긴다
익숙한 후렴처럼 뻐끔거리는 오답들
당신의 취향은 직진인가 유턴인가
기억이 없다 노래하는 동박새를 본 적도 없다
꽃은 입을 다물면 끝이다
2
덜커덩, 바람이 지나간다 구름의 날개가 커졌다
먼지의 외출이 잦을수록 창백한 손들이 물감을 꺼내들었다
늘 정해진 색상이 크레파스처럼 꽂혀 있는 봄의 내부
강변에 노란 물감이 쏟아지고 3월의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노랑의 독점이다
단벌의 색, 봄은 계획적이다
황사가 밀려오고 제3의 회색빛으로 떠도는
위태로운 생각들 숨어 있는 번민들
질량 없는 표정이 대롱거린다
재고로 남아 있는 침묵을 녹음한다
빈 가지에 미끄러지는 바람
당신의 안쪽이 궁금하다
녹슨 쇠냄새
오래된 기억을 밟으면 낮은 목소리가 나지
웅크린 계단은 숲이거나 강
하루치의 양식처럼 당신을 오르지
옥타브와 옥타브 사이 계단을 접으면
또 다른 옥타브로 건너뛰지
이층과 삼층 사이 묵은 생각이 많아
숲은 깊어지지
나를 만나고 싶을 때
당신의 강을 건너지
나의 악기인 당신을 연주하고 싶을 때
나는 갈비뼈를 긁어 가려움은 상처를 덧나게 하지만
진물이 묻은 손톱을 들여다보면
상처도 힘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오선지에 쓰러져가는 나무를 껴안고
흐느끼는 바람을 강물에 띄우는
그 시간
이층과 삼층 사이 당신이 출렁이고
드라마의 식상한 사랑이 계단 끝에 서 있어
작은 얼굴 작은 목소리가 웅크린 계단
오늘도 급류에 떠밀리는 하루가 잠복해 있지
이층과 삼층 사이
|박지우| 본명 박순영. 충북 옥천 출생. 2012년 시집『롤리팝』발간.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이메일 roseyoung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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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나무 (외 2편)
하보경
나무 안에 살던 푸른 짐승이
바이올린을 켠다
바다로 흐르지만, 결코 바다가 되지 못하는 오카방고 습지의
수천 마리 물소 떼며, 코끼리 떼
기나긴 건기, 사자들에 대해
흰꼬리수리의 기나긴 비행과
그들이 건넌 낮과 밤에 대해
살아 있는 화석인 투구게의 질긴 눈망울에 대해 생각한다
삶을 관통하는 수많은 그늘에 대해
늘 맹목이었던 빛에 대해
툭툭 놓아버렸던 힘없던 팔들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푸른 짐승의
속울림이 맑게 흐른다.
손
내밀어 보세요
그건 혀에요
혀는 조롱과 감동을 구분 못해요
조롱 속에 든 새도 그건 알지요
나는 따스함을 원해요
슬며시 잡아 주는 법
체온에 체온을 보태는 것
슬며시 스미는 것
노을이 하늘에 스미고 바다에 스미고
스며든 자신조차 없이 사라져 버릴 때
산양은 왜 가파른 절벽만 좋아하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날개가 달렸다면 참 좋을 텐데
뿌리가 있어요
흙을 단단히 움켜쥐었죠
흙이 움켜쥔 건가요?
뿌리의 힘이 풀릴 때면
아마 서로 자연스레 놓아 주겠죠
입춘
터널의 매력은 끝이 있다는 거다
길 가다 낮달 한 번 바라보듯
터널의 입구에선 늘 낯선 냄새가 난다
터널을 통과하는 길에는 수많은 내가 있다
오른손이 왼손을 꼭 잡고 있는
터널의 끝에는 긴 속눈썹을 가진
낙타가 자라고 있다
낙타의 눈들이 황홀하게 자리를 잡을 동안
터널의 끝은 순식간에 다가온다
극락조가 까만 치마를 동그랗게 펴서
떨잠을 흔들고 춤을 추며
거친 강을 거슬러 온 연어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터널의 통증을 망각하는 일
터널의 끝에서 비스듬히 터져 들어오는 빛의
각도를 껴안는 일
터널을 견뎌온 자만이
터널의 끝에서 쏟아지는 빛의 만찬에
거뜬히 초대를 받는다
|하보경| 서울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 이메일 bomul5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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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공동주간들의 추천과 응모작 예심을 거쳐 다섯 분의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분들의 이름을 밝히면 고은주, 김경미, 박지우, 신정순, 하보경 씨이다. 작품의 우열이 두드러져서 심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숙독을 거친 후 우리는 이 가운데 김경미, 박지우, 하보경 씨의 작품을 놓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 결과 박지우 씨와 하보경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시단에 소개하기로 합의하였다.
박지우 씨를 추천한다. 「철학이 부족한 내일」외 9편을 응모한 박지우 씨는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현실과 환상의 세계, 또는 의미와 무의미의 세계를 넘나든다. 낯선 감각의 발명을 통해 존재를 발생시키는 이러한 창작법은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만만치 않은 시적 수련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능숙하게 자본주의를 요리하는 이 도시에 빌붙”어 살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그 철학은 일상으로부터의 계획적인 일탈이다. 박지우 씨의 시는 그 일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때로는 길이 사라진 도시에서 고공행진을 감행하고 때로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녹슨 쇠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들 중에서 낯선 것들을 새롭게 읽어내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 감각이 “두툼한 머플러를 두르고”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깊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원구식)
하보경 씨를 추천한다. 「가문비나무」외 9편을 응모한 하보경 씨는 카멜레온의 혀처럼 뜬금없이 뱉어진 시어들로 의미를 조합하거나 해체하여 탄력적으로 튀게 하는 독특한 언술을 보여준다. “터널의 매력은 끝이 있다는 거다”(「입춘」)라고 툭 던져버린 어투에서 잊을만하면 다가오는 터널의 끝을 장식하는 빛의 만찬을 짐작한다. 거친 강을 거슬러 오른 연어가 뿜는 한줄기 산란 같은 시를 꿈꾸며 긴 터널을 지나온 시인의 이력은 때로 악어나 사자의 목구멍에 드리워진 세월의 그늘을 감지하고 있다.
또한 “바다로 흐르지만, 결코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오카방고 습지”(「가문비나무」)를 유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흰꼬리수리의 시야에 포착되는 물상들이 지닌 특이점을 자신의 내면을 관통하는 터널과 그늘로 끌어들이는 끈끈함이 있다. 터널은 늘 낯선 냄새로 다가오지만 터널 끝에는 긴 속눈썹을 가진 낙타, 구애의 현장에서 춤을 추는 극락조에 대한 기대, 쥐어짜서 뿜어내는 연어의 산란 같은 출구에 대한 기대가 있다. 어둡고 습한 터널을 견뎌온 언어들이 덩굴식물처럼 의식의 내면을 타고 올라와 “내밀어 보세요/ 그건 혀”(「손」)라는 딴전을 피우는 여유로 보를 넘는 피라미처럼 튀고 있는 것이다. 먼 산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갑자기 툭툭 불거져 난데없는 의미가 파닥거리면서 노을 지는 산자락에 우련히 번지는 잔영을 남기는 섬세함이 시의 골목 곳곳에 존재한다. 하보경의 당선을 축하하며 넉넉한 울림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심훈)
본지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며, 다음 기회에 다시 뵙기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 원구식, 박주택, 이심훈
—《시사사》2014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