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기혼샘
예루살렘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입니다. 무려 기원전 19-18세기 이집트 문서에 ‘류샬리뭄’(rushalimum)으로 기록되었을 정도지요. 예루살렘의 별칭 ‘시온’은 ‘메마른 곳’이라는 의미로 추정됩니다. 그만큼 건조한 지역이지만, 놀랍게도 예루살렘에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있습니다. 바로 기혼샘입니다. 이 샘의 중요성을 말해주듯,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왕위를 이을 때 이곳에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열왕 1,38-39).
기원전 8세기, 히즈키야 임금은 아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기혼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공사를 합니다. 기혼샘이 성 바깥에 있었으므로, 적이 침공해와도 물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약 500미터의 터널을 뚫어 기혼샘물을 끌어와 성안에 못을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내어 눈을 뜨게 해주신 곳, 바로 실로암입니다(요한 9장). 지금도 예루살렘의 ‘다윗 성’ 유적지에 가면, 이 수로 터널을 걸어 기혼샘부터 실로암 못까지 순례할 수 있습니다. 히즈키야 임금의 터널 공사에 대해 기록한 실로암 비문은 현재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혼은 성경에 에덴 동산과 관련된 지명으로도 언급됩니다. 창세 2,10-14에는 에덴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이 나오는데요, “피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그리고 “기혼”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은 실재하는 지명입니다. 그에 비해 피손과 기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실재했던 강은 아닌 듯합니다. 에덴 동산이 원조들의 죄로 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되자, 성경에서는 실제 지리에서 찾을 수 없는 강 이름을 써서 위치를 숨기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의 강 가운데 하나로 기혼이 언급된 점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왜냐하면, 옛 성전이 봉헌된 곳이 예루살렘 성의 가장 높은 곳이었는데, 위치적으로 기혼샘은 성전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원조들이 상실한 에덴 동산을 재현하는 장소가 바로 성전이라는 암시입니다. 실제로 에덴 동산과 성전 사이에는 공통점이 여럿 존재합니다. 원조들이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을 자유롭게 뵐 수 있었듯이, 성전 역시 하느님께서 인간을 공식적으로 만나 주시던 공간입니다. 커룹의 존재도 공통됩니다. 에덴 동산의 입구에서는 커룹들이 불 칼을 들고 지켰듯이(창세 3,24) 성전에서는 지성소에 모셔진 계약 궤 위에 커룹이 장식되어 속인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요컨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에덴 동산을 다시 접할 수 있었으며, 이후 예수님께서는 금지된 지성소마저 우리에게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상징성을 생각하면, 기혼샘은 아담이 상실하였지만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되돌려 주신 에덴 동산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성지입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2024년 6월 9일(나해) 연중 제10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