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증인이 되기 위해(행1:6-8)
-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① -
2024.5.19 오순절 성령강림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예전에 어느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면서 전도팀을 이끌 때의 일이다. 그 교회의 성도들 중에 종말의 때를 강조하면서 거의 날마다 모여 신비적인(?) 기도에 집중하는 몇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분들 중의 한 분과 대화를 하면서 “집사님은 종말의 때가 가까웠다고 하시면서 기도를 많이 하는데, 전도는 왜 안하셔요? 종말이 가까웠으면, 전도에 더 힘써야 하지 않나요?”라고 질문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런 대답을 했다.
“내 구원 유지하지도 바쁜데, 전도는 무슨 전도예요?”
과연 이런 대답이나 행동들이 성령충만한 모습일까? 그 대답을 듣고 고개가 갸우뚱해 졌었다. 그러면 성경적인 진짜 성령충만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주님은 왜 우리(나)에게 성령충만을 주시기 원하시고, 또 우리(나)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까?
성령충만이란 글자 그대로 우리(나) 안에 성령으로 가득찬(Full)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를 보통 성령의 지배하심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성령충만한지 안한지를 스스로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마음에 가득찬 은혜가 나의 실생활에서 넘쳐흐르고(Overflow)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실례 : 전도, 구제, 섬김, 성령의 8가지 열매들 등). 그래서 우리들이 성령충만을 받아야할 이유들 중에 이 시간에는 ”증인되기 위한 것“을 나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이 그림은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을 컵(마음)에 부어지는 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현재 나의 영적인 상태는 어느 위치인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만약 예전에는 성령충만한 상태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역주행하고 있다면, 속히 돌이켜서 첫 사랑과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 1번 컵(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마음 상태) -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성령님이 그 사람 속에 계시지 않다. 그 대신 자신의 자아, 욕심, 염려, 걱정 또는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 2번 컵(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마음 상태) -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성령님을 보내주신다(요1:12). 그러나 아직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오히려 세상적인 가치관과 욕심과 성품들이 더 많이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믿기는 믿지만, 여전히 거친 언행이 앞서고, 대부분의 결정들은 내 생각대로 한다.
■ 3번 컵(성령충만에 가까운 마음상태) - 믿음이 점점 성장하는 상태로서 거의(Almost, 올모스트) 성령충만에 가까운 상태이다.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을 신학용어로는 성화(聖化)라고 한다. 예배하고, 찬송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말씀이 들을 때는 은혜를 받는다. 기도응답과 같은 신앙체험도 종종 한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기쁘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삶이 부담되기도 한다. 아직 자아가 살아있어서 가끔 옛날 성품과 혈기가 폭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까지는 맺지 못하고 바램으로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거의(Almost)"는 "충만(Full)"이 아니다. 서두에 언급한 분들의 영적상태는 겉으로는 “충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거의” 상태에 해당했던 것이다.
■ 4번 컵(성령충만한 마음상태) - 나의 마음에 성령으로 가득한(full) 상태, 그래서 성령님께 나를 복종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의 특징은 은혜가 생활 속에서 넘쳐흐르는(Overflow) 것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성도로서 거룩한 영향력을 끼친다. 주님을 믿으면서 사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행복으로 여겨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서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긍휼의 마음이 생겨서 돕고 싶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말과 찬송들이 계속해서 입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온다. 심지어 성도들을 대접하고, 복음전하는 일에 재정을 쓰고도 행복해서 싱글벙글해 진다. 어떤 때는 불신자들의 눈에 예수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행복의 비결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들과 나의 영적인 상태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다시 오늘 본문을 보자. 주님께서 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하셨는가? “내 증인”, 곧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말씀을 보면,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하셨다. 여기서의 권능은 “증인이 되게 하는(또는 증거를 잘할 수 있게 하는) 권능”이다. 여기서 쓰인 “권능”이라는 단어는 “듀나미스”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다이너마이트”가 파생되었다. 복음을 위한 권능의 범주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각종 예체능의 재능들, 재물을 얻는 능력을 주신 것(신8:18)과 같은 것들도 다 포함된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세상에서는 별 볼일 없어 보이던 사람도은혜가 넘쳐 흘러서 얼마든지 돌산이 무너뜨리는 복음의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 있다. 오순절 이후의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성도들의 삶이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
서울신학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박명수 박사에 의하면, 19세기 미국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 중에 팔머 부인(Mrs. Palmer)이 있다. 본래 팔머는 감리교 출신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녀는 신혼 때 아들을 낳았지만 잃었고, 두 번째 아들도 잃었다. 그 후 두 딸을 낳았는데, 그중의 둘째딸이 화재로 인해서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서 팔머는 깊은 충격 속에서 방황하던 중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깊은 성령충만의 은혜를 경험했다. 그래서 평생 복음전도를 위해 헌신하는 전도자(증인)가 되었다.
특히 그녀는 전도 집회를 할 때,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구약시대 제사를 드릴 때, 단 위에 제물을 올려놓으면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서 제물을 태우신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완전한 포기하고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제단에 전적으로 드리기로 결심한 사람은 강대상 앞으로 나오기를 초청했다. 이것을 제단초청(Altar Call)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서 수많은 결신자와 선교사들이 배출되었다. 이때 팔머의 전도집회에서 많이 불렸던 찬송이 바로 찬송가 254장(“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내가 주께 지금 가오니”)과 327장(“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 등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팔머 부인은 본래 극히 평범한 가정 주부였고, 심지어 두 아들과 딸을 잃어버린 상처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님이 그 안에 충만히 부어지니까, 그녀는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복음의 다이너마이트로 변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또는 이 글을 읽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얼마든지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어떤 사람은 아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1번 컵과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영적인 마음의 상태가 2번이나 3번 컵과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 누구든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제물로 드리면, 그 사람은 성령의 권능 즉 복음의 다이너마트같은 증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영적인 태만 상태를 방치하면, 오히려 역주행하면서 침체에 빠지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제단 앞에 우리(나)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자.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말고, 마음의 두 손을 번쩍 들고, 주님 앞에 항복하며, 나를 산 제물로 주님 앞에 드리자. 내가 살아있는 만큼 성령의 역사는 제한된다. 그렇게 하면 주님은 기꺼이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고, 변하여 다시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 있는 주님의 증인들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주시는 이유이자,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야할 이유이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