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미국 등 서방의 전방위적인 대러 수출 금지및 통제 조치에 대한 대응 방안을 내놨다. 임시방편이기는 하지만, 일정 부분 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된다. 특정 상품의 원천 제작사(특허및 상표권 보유자)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고도, 해당 상품의 우회 수입을 허용하는 소위 '병행 수입'(параллельный импорт)조치다.
이즈베스티야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산업통상부는 최근 '병행 수입' 대상 품목을 선정했다. 50개 품목, 약 200여개의 브랜드에 이른다. 대상 품목은 법무부의 승인을 거쳐 최종 확정될 것으로 전해졌다.
미슈스틴 총리, '병행 수입' 합법화에 관한 (행정명령) 문서에 서명/얀덱스 캡처
'병행 수입'은 나쁘게 말하면, 특허권을 침해한 '짝퉁'의 수입도 합법화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의 경우, 삼성전자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인지, 제품을 직접 수출했는지 여부를 굳이 따지지 않고 수입 허가를 내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삼성전자 스마트폰을 대량으로 구매한 제 3국으로부터의 우회 수입도 '병행 수입'의 범주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비우호적인 48개국이 생산한 제품의 경우, 기존의 적법한 수입 루트를 굳이 고집하지 않고, 폭넓게 개방하겠다고 하니, '짝퉁'의 합법적 수입도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애플 등 글로벌 기업의 대러 수출 통제로 러시아에는 현재 스마트폰의 재고가 4개월치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3월 중순 이후 스마트폰의 신규 출하가 중단됐으나, 수요 감소 등으로 현재 재고로도 3~4개월은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각종 가전 제품의 재고도 여름이면 모두 소진될 것이라고 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애플 아이폰과 삼성 가전제품, 테슬라와 벤틀리 등 고급 승용차 등이 러시아의 '병행 수입' 조치로 어떻게든 러시아로 들어올 수 있을 것으로 현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대상 품목은 스마트폰과 컴퓨터 기기, 가전제품, 자동차 등 완성된 소비자 제품과 타이어, 오일, 액세서리 등 자동차 부품이 주를 이루고, 모피와 가죽 제품, 향수 등 사치품도 포함됐다.
의류와 신발(스포츠용 포함)의 경우, 브랜드별로 특정하지 않고, 모두 병행수입 대상에 포함시켰다. 장신구과 가구 등은 러시아 제조업체가 공급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고 제외했다.
삼성 스마트폰/홈피 캡처
문을 닫은 모스크바 쇼핑센터내 아디다스 매장/사진:김원일
러시아가 '병행수입' 조치를 도입한 것은 주요 소비제 제품의 공급 부족 현상을 막기 위해서다. 러시아에 진출한 수백개의 외국 브랜드가 우크라이나 군사작전 개시 이후 철수하거나 생산및 서비스를 중단했다. 대부분이 소비재다. 삼성과 애플 이케아 나이키 아디다스 레고 샤넬 BMW 등이다.
5만 유로가 넘는 고급 자동차도 최근 유럽연합(EU)의 제재 대상에 들어갔다. '병행 수입', 우회 루트를 통하지 않으면 러시아 수입이 불가능하다고 현지 전문가는 설명했다.
'병행 수입'의 아이디어는 러시아의 최대 인터넷 쇼핑몰 '와일드베리즈'의 타티아나 바칼축(고려인) CEO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녀는 지난달 말 러시아 반독점청(우리식으로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막심 샤스콜스키 청장과 만나 주요 소비재의 공급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이 방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병행 수입'이 합법화되면 기존의 소비재 브랜드 공식 수입업자들 외에 많은 자영업자들이 소비재 수입 시장에 뛰어들어 소량이나마 물건을 갖고 들어올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바칼축 CEO는 "중소기업들이 추가로 허가를 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외국 상품을 수입할 수 있고, 소비자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더 다양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러시아 '보따리상'이 또 나타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병행 수입' 자체만으로는 서방의 대러 수출 통제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적지 않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21일 외국 기업의 철수 혹은 조업 중단이 서방의 포괄적인 대러 제재조치보다 러시아 경제에 더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냈다. 러시아를 떠나는 외국 기업을 '법정관리' 형태로 계속 가동하는 방안(대통령령)도 나왔지만, 공장 가동에 필요한 부품 공급이 끊어질 경우, 무용지물이다.
실제로 러시아에 진출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의 현지 공장도 국내로부터 특정 부품들을 공급받지 못하면 공장을 세울 수 밖에 없다.
현대자동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홈피 캡처
통관 수입시 제조사의 확인이 없는 제품은 나중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여지도 다분하다. 소위 '짝퉁'이 섞여 들어올 수도 있다. 애프트서비스(A/S) 문제도 제기된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정품 부품의 확보가 불가능해진다.
물류 비용의 증가에 따른 제품 가격 상승도 우려된다. 그것보다도 '병행 수입'으로 필요한 제품이 진짜 러시아로 들어올 것인지, 언제쯤 시내 매장에 진열될 것인지 불투명하다는 우려도 일각에서 나온다. 앞으로 2~3개월, 늦어도 6개월내에 '병행 수입'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러시아의 주요 소비재 부족현상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측된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 21일 미국과 동맹국들의 수출 통제로 러시아의 첨단 기술 제품 수입이 절반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자동차 공장은 부품 부족으로 가동을 중단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수출 통제 목록에 든 품목을 러시아에 공급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강력히 제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병행 수입' 조치를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인 셈인데, 소위 미국의 '세컨더리(2차) 제재'와 같은 효력을 발휘할 지 지켜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