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동태
박상화 지음|푸른사상 시선 105|128×205×10 mm|154쪽|9,000원
ISBN 979-11-308-1449-0| 2019.8.2
■ 도서 소개
박상화 시인의 첫 시집 『동태』가 <푸른사상 시선 105>로 출간되었다. 시인의 주제의식과 작품들의 표현력은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아도 끄떡없는 동태처럼 단단하다. 우리 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후려갈기는 통쾌함과 소외된 생명들이 한데 모여 숲을 이루려는 연대의식은 그지없이 소중하고도 아름답다.
■ 시인 소개
박상화(朴橡樺)
1968년 서울, 첫눈 펑펑 오던 날 태어났다. 본명은 흥열, 호는 위야(爲野), 필명은 상화.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뿌림글’ 동인 시집 『거대한 뿌리』, ‘해방글터’ 동인 시집 『땅끝에서 부르는 해방 노래』, 『다시 중심으로』, 『하청 노동자 전태일』 발간에 함께했다.
■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등
동태 / 등 / 풍경(風磬) / 매화가 피면 / 숲 / 나무는 걷는다 / 웅덩이 / 전봇대에게 / 손걸레질의 힘 / 의자 / 반달 / 공짜 / 결 / 만둣국 / 봄눈 / 사과나무 그늘 / 엽차 / 비상(飛翔) / 나무라 하듯이 / 삼십 년
제2부 꽃은 바닥에서만 핀다
나무의 사랑 / 햇살이 차려진 식탁 / 마트 계산대에서 / 춘묵(春墨) / 꽃은 바닥에서만 핀다 / 생의 굴뚝에 서서 / 악착(齷齪) / 슬픈 대문짝 / 돌멩이 / 먼지 / 덫 / 보도블록 / 뼈다귀해장국집에서 / 기다리는 사람 / 나무가 뿌리를 내릴 때 / 반행목(伴行木) / 사당동 족발 형님과 오향장육 김치찌개 형수님 / 개미 / 한 사람 / 약장수 / 지옥도(地獄圖) / 사무직 2
제3부 하피첩(霞帔帖)
할아버지의 꽃 / 하피첩(霞帔帖) / 그리운 거인 / 엄마 생각 / 봄 / 빈손 / 상갓집 / 소 / 시래기 / 가을볕 / 지게불(佛) / 시간의 문
제4부 지브크레인 85호의 노래
바다 / 돌담 / 고공에서 피는 꽃 / 그는 / 그 사람 / 500일 / 밀양 할머니 / 고(故) 백남기 선생님 / 평화의 섬 제주 강정 / 굴뚝 아래 장작 / 누룩꽃 투쟁 / 부산 반빈곤센터 윤웅태 / 부산정관지회 / 지브크레인 85호의 노래
■ 작품 해설:등의 시간과 화쟁의 숲 - 정우영
■ 시인의 말
언젠가 수국을 만난 적이 있다. 푸르지도 분홍빛이지도 희지도 않았다. 갈빛으로 꼿꼿이 마른, 목화된 꽃. 꽃이었으나 말라 나무가 돼버린 꽃. 꽃이 피어난 그 순간 그대로 시간을 멈춰버린. 세상에. 아무도 멈출 수 없던 시간, 그 시간을 멈춰버린 꽃이었다. 사랑하였으므로 피었고, 핀 그대로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버린 꽃이었다. 모든 시간은 순간이다. 너의 화양연화는 어쩌면, 힘든 삶을 버티고 말라가면서도 네가 꽃이었을 때 그 모습을 그대로 버티고 있는 고집은 아니었을까. 불안해하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있다면 넌 잘하고 있는 거다. 잊지 말길. 지지 말길
■ 추천의 글
그가 미국으로 홀연히 떠난 지도 참 오래되었다. 그는 내게 <알함브라의 궁전>으로 기억된다. 국내 처음으로 이주 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았던 책, 이란주의 『말해요. 찬드라』 홍보 배너에 그가 배경 음악으로 넣어준 곡이다. 그는 문예지들이 아직 종이 권력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노동자들의 딱딱한 시를 멋지게 디자인해 사이버 벽시 운동을 처음 만들던 진취적인 벗이었다. 오랜 시간을 지나 그가 내게“ 서로 어깨 걸어 단단한 돌담…… 네가 버텨야 네 동료들도 무너지지 않는 걸” 다시 새기라 한다.“ 큰 나무가 되려면 삼백 번쯤 헐벗어야 하고/하늘을 날려면 뼈를 비워야” 하는 삶의 투명한 고투와 비애를 사랑하라 한다. 꽃도 나무도 자신을 찢고 터트려 새로운 꽃과 열매를 내듯“ 아프지 않고 나아갈 길”은 없어“ 아픈 건 (비로소) 나아간다는 것”임을 명심하라 한다.태평양 건너 머나먼 곳까지 가서도 밀양, 강정, 구미 아사히글라스, 평택 쌍용차, 부산 생탁과 한진중공업 등 전국 노동자 민중 투쟁의 모든 현장에 함께해온 정의로운 자. 이제 와 고백이지만 나는 그의‘ 과학’보다 대책 없는, 그러나 금강석처럼 빛나고 단단하던‘ 순정’을 더 사랑했었다. 긴 이별의 시간 동안에도 그는 우리가 살며 끝내 간직해야 할 정치적 당파적 인간애적‘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시적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이젠 그만 아프길.“ 잎이 없어도/가지가 …… 없어도” 우뚝 선 겨울나무들의 아름다운 시의 집으로 나를 다시 초대해준 그가 오늘 몹시 그립다 .
― 송경동(시인)
■ 작품 세계
새삼 시를 다시 생각한다. 시가 뭘까.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채워야 시가 되지만 비우지 않으면 사라진다. 한편으론 무겁고 한편으론 한없이 가볍다.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럽다. 마성이되 순정한 삶 아니면 헛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란, 순연한 통증들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시인들은 이 시라는 걸 붙들고 한 삶을 건너간다.
박상화 시인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랫동안 시를 앓고 있는 것 같다. 시를 넘겨받기 전까지 나는 박 시인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력을 보니 과거에 한 번쯤은 서로 맞닿았음직하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들은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는 시만이 그와의 유일한 소통 면이다. 그래서 참 자유롭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의 시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 나를 뒤척이게 한다.
(중략)
등은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듣기는커녕 등의 존재조차 무시하고 산다. 우리는 거의 매 순간 앞만 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앞을 향한 채 앞면만으로 산다고 여긴다. 등에는 별 관심조차 없다. 앞쪽의 얼굴과 가슴과 손과 발에만 집중한다. 어찌 등뿐이겠는가. 등으로 상징되는 모든 ‘등의 세계’에 무감하다. “어떻게 해도 손이 안 닿는 곳에/보이지 않는 곳에/한 번도 멀어지지 않았던/네가” 살지만, 거기는 딴 나라, 다른 시간인 것이다. 등을 잊은 나라, 등을 잊은 시간이다. 무릇 등이 존재하지 않는 나는 있을 수 없으나, 등을 잊은 나는 이처럼 가능하다. 이것이 현대이고 현대인이며 이 때문에 현대인의 비애가 생성되는 것 아닐까 싶다. 현대인의 소외는 이런 데에서 배어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박상화가 바로 이 ‘등’을 우리 앞으로 소환한다. 그는 등으로 세상을 읽고 등으로 세상을 본다. 등에 대한 관심을 이처럼 본격적으로 드러낸 시인을 나는 본 적이 거의 없다. 등을 얘기한다고 해도 대체로 피상적인 접근에 머물렀다. 등짐 진 자의 서글픈 생애와 그에 따른 연민쯤을 내보였다고 할까.
하지만 박상화는 이에서 더 깊숙이 들어간다. 등의 시간, 등의 삶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등은 사실 그늘의 영역이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의 관심 밖이다. 앞이 중심인 현대사회에서 등이라는 그늘에 대해 누가 얼마나 눈 기울여줄 것인가. 잘못하다가는 공허한 메아리이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렬히 등을 설파하며 등의 시간을 살고자 한다. 시 「등」이 대표적이지만, 얼핏눈에 띄는 시 구절만 해도 여기저기 뻗어 있다.
“길은 누군가의 등”「(꽃은 바닥에서만 핀다」),“ 화가 나서 등에 뿔이 돋더라도”(「먼지」)“, 곧추세워볼 일 없었던 등뼈”「(뼈다귀해장국집에서」), “시든 등도 쓱쓱 쓸어주던 것을 기억했어”「(시래기」),“ 굽은 등에 철탑을 지고/동지(同志)에게 마실가는 밀양 할머니”「(밀양 할머니」) 등등. 여기에 시 「지게불(佛)」까지 포함하면 가히 그를, ‘등의 시인’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자, 그러면 이제 물어야 한다. 박상화는 왜 이렇듯 등에 마음 바치는 것일까. 시 「등」에 그 이유가 밝혀져 있다. “소멸하는 순간까지/끝내 남아 뒤를 지키는/묵묵한 사람들이 사회를 밀고 간다”고 그는 믿는데,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 얼굴보다/등이 더 눈에 박히는 사람”으로 그에게는 다가온다. 이들의 등은 “꿈을 잃고/얼굴을 묻고 절망할 때”조차 “표정이 되어주는/미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의 힘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등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알지 못한다.” 박상화는 이에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등의 사람들과 그들의 ‘등의 시간’이 펼쳐놓은 크고 아름다운 세계를
(중략)
그의 말대로 혼자서는 숲을 이룰 수 없다. “큰 나무 혼자서도 안 되고/앞장선 나무 혼자서도 안 된다.” “차비가 없어서 농성장에 오지 못하는 나무”도 데려와야 하고, “밥을 굶고 연대하는 바위”도 초대해야 한다. “피켓을 든 작은 풀도 있”어야 하고, 먼 데서 함께 우는 새와 “공장에서 일하는 마음을 띄”우는 구름도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야 숲이다. 숲의 세상이다. 어디 이뿐일 것인가. “일자리 찾아가는 냇물들도 모여/함께 다 같이” 생명의 숨결 맞비벼야 진정한 삶의 숲일 것이다.
자, 그러니 이제 어쩌겠는가 하고 그가 내게 묻는다. 당연히 함께한다. 내 등 기꺼이 내어놓고 이땅의 분투를 해소하는 화쟁의 숲에 들겠다. 당신은 어떠신가.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도 등을 내어주고 그와 함께 등의 시간에 올라타시라. 현대인들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아 보인다.
―정우영(시인)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동태
동태는 강자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아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동태를 다루려면 도끼 같은 칼이어야만 했다
아름드리나무 밑둥을 통째로 자른 도마여야 했다
실패하면 손가락 하나 정도는 각오해야 했다
얼음 배긴 것들은 힘이 세다
물렁물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한때 명태였을지라도,
몰려다니지 않으면 살지 못하던 겁쟁이였더라도
뜬 눈 감지 못하는 동태가 된 지금은
다르다
길바닥에 놓여진 어머니의 삶을
단속반원이 걷어차는 순간
그놈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갈긴 건
단연 동태였다.
꽃은 바닥에서만 핀다
바닥에 닿으면
입안이 헐어 꽃이 핀다
먹을 수 없다
살려면 먹는 것도 줄이라고
꽃은 바닥에서만 핀다
밟기만 하고
바닥을 살필 줄 모르면
길이 끊긴다
길은 누군가의 등이었으므로
엎드리지 않으면 이을 수 없다
눈물이 바닥에만 고인다고 해서
고이면 차오르는 바닥의 힘을
없다고 할 수 없다
바닥이 아닌 높은 데 것들은
모두 침몰하는 중이다
술 한 잔을 받쳐 들고
밥도 담는 바닥에서
더 이상 가라앉지 않는 바닥만이
일어설 수 있다
가만히 엎드려
단단해진 바닥이 일어서면
벽이 된다
인정사정없이 밟아 다진 바닥이었으므로
그 벽은 뚫을 수 없다
엄마 생각
엄마가 보고 싶으면
나는 엄마를 보러 갔다
집 뒤 골목을 내려가
국수가게를 지나
만화가게 앞에서 한참
청수약국 사거리를 건너
문방구 창에 붙어서 한참
철조망을 친 성당 놀이터를 지나
(그 놀이터는 꾀죄죄한 아이들은 들어가면
혼나는 놀이터였다)
길 건너 문화원은 서예 전시회를 했는데
들어가서 한참을 보아도 괜찮았어서
액자 족자에 쓰인 글씨를 읽지도 못하면서
다리가 아플 때까지 들여다보았다
냉차 리어카를 지나
질척한 시장길
무거운 짐 실은 오토바이, 십자가를 진 고무줄 장사가 지나가고
수없이 많은 수직 기둥들 사이
그 어느 틈새에
드러누운 고등어 갈치 몇 마리 놓고
쪼그려 앉은 엄마가 있다
바다
바다는 완강하고 단단하였다 시간이 불어와
파랑이 일고 물결 주름이 잡혔지만
많은 일을 겪은 노인이 그렇듯 바다도 결코
입을 벌리는 법이 없었다 하나 남은 이를 보이지 않고도
뭍은 바다로 빠져 들어갔고 쓰레기들은 뱉어져
부유했다 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품어진 아이들은
개똥불빛이 되어 바닷속을 날며 놀았다 그 웃음소리가
하늘에 비춰져 별빛이었다 어미와 아비가
그리워 눈물 일렁일 때면 별빛도 흔들려 어디선가
꽃 내음이 났다 아픔은 산 자의 것일 뿐이라고
함박눈이 내리면 누군가는 아무도 오지 않는 길을 쓸었고
아이들이 혀를 내밀어 눈을 받아먹는 동안
빈 운동장 같은 바다 어디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