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 제5장 샹캬 학파
뿔리간들라 / 이지수 역 / 민족사
출처: 성철넷
▒ 목 차 ▒
제5장 샹캬 학파 ▲ 위로
샹캬 Samkhya 학파(수론)는 인도철학의 제학파 가운데 가장 오랜 것에 속한다.1) 베다에 그 뿌리를 가지고, 정통파와 비정통파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샹캬의 기본적 사상은 요가, 니야야, 와이셰시까, 베단따와 쟈이니즘에서도 발견된다. 까삘라 Kapila라는 대성인이 샹캬 학파의 창시자이다. 전통에 따르면 까삘라는 '샹캬 수뜨라(수론경)'에서 샹캬 체계를 확립시켰고, 그에 대한 상세한 해설서인 '샹캬 쁘라와짜나 수뜨라, Samkhya-Pravacana-Sutta'가 뒤이어 저작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샹캬에 대한 수많은 해설, 주석, 해석서가 나타났다. 이중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헌은 이슈와라끄리쉬나(자재흑, 5c. A.D.) Isvarakrsna의 '수론송 Samkhya-Karika'이다. 샹캬의 다른 중요 저작들은, 가우다빠다 Gaudapada의 '수론송소 Samkhya-karika-bhasya', 와짜스빠띠 미스라 Vacaspati Misra의 '수론진실월광 Samkhya-tattva-kaumudi', 비갸나빅슈 Vijnabhiksu의 '수론해설소 Samkhya-pravacana-bhasya'이다.
이 학파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한 가지는, 샹카가 '수'를 뜻하는 'samkhya'라는 말로부터 그 명칭을 도출했다고 한다는 것. 왜냐하면 이 학파는 우주의 궁극적 구성요소의 수와 본질을 규정함으로써 실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이해를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SAMKHYA'라는 말은 완전한 지식을 의미하며, 철학이란 그들에 따르면 완전한 지식의 체계이므로, '샹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1. 형이상학 ▲ 위로
샹캬는 이원적 실재론이다. 쁘라끄리띠(물질) prakrti와 뿌루샤(정신, 자아) purusa라는 두 궁극적 실재의 이론 때문에 이원적이다. 그리고 샹캬는, 물질과 정신이 동등히 실재한다고 믿으므로 실재론이다. 자아에 관해서는, 샹캬는 뿌루샤가 하나가 아니라 다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다원론적이다. 뿌루샤와 쁘라끄리띠 사이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주관과 객관 사이의 구분이다. 주관은 결코 객관일 수 없고, 객관은 결코 주관일 수 없다. 자아 purusa와 비아 prakrti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샹캬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은 경험자와 피경험자로 이루어진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부정할 수 없는 양극성에 기초한 것이다. 이제 쁘라끄리띠와 뿌루샤에 대한 샹캬의 사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세계를 다양한 대상들로 구성된 것으로서 경험한다. 샹캬는, 이들 대상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가 묻는다. 그리고 쁘라끄리띠가 우리의 신체, 감각, 마음 그리고 이지를 포함한 모든 대상들이 궁극적(제일) 원인이라고 답한다.2) 우리는 모든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부터 야기됨을 관찰한다. 그래서 응유는 우유로부터, 그리고 옷감은 실로부터 생산된다. 그러나 샹캬에 따르면 우유나 실은 응유나 옷감이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 단지 근인일 뿐이다. 그는 어떻게 우유와 실 자체가 생겼는가를 알고자 한다. 더욱 일반적으로는 세계의 갖가지 사물들을 이루는 궁극적인 질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샹캬는 쟈이니즘이나 니야야 와이셰시까처럼 대상들이 물리적 세계의 궁극적 요소로 생각되는 물질적 원자들의 결합에 의해 생산된다는 주장이 그릇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설사 조대한 사물들은 물질적 원자들로부터 생기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어떻게 물질적 원자들이 마음이나 이지와 같이 미세한 대상들도 생산할 수 있는가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살펴보면, 원인이 그 결과보다 언제나 더 미세하고 세밀하다. 그래서 씨앗이 나무보다, 그리고 달걀이 닭 보다 더 미세하다. 결국 물질적 원자는 그 자체로 마음과 같은 미세한 대상들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샹캬는 모든 물리적 존재의 기저에 놓인 어떤 극히 미세한 질료 혹은 원리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논증한다. 쁘라끄리띠가 그러한 원리이다. 그것이 조대하고 미세한 모든 대상들의 궁극적이자 제 1의 원인이다. 그것은 물리적 세계의 질료인이자 효과인이다. 궁극적 원인으로서 쁘라끄리띠 자체는 무원인적이며, 영원하고 편재한다. 또 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쁘라끄리띠는 지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결과로부터 추리될 수 있을 뿐이다.3)
쁘라끄리띠의 존재에 대한 샹캬의 추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 경험의 모든 대상들은 다른 대상들에 의존하여 그들에 의해 야기된다. 아무것도 무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전 물리적 세계가 원인과 결과의 연속이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연속은 다른 대상으로부터 한 대상의 발생은 설명할 수 있겠지만, 도대체 어떤 대상이 있다는 사실은 설명할 수 없다고 샹캬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물리적 세계의 존재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로 머무르든지, 아니면 근본적 원인으로 소급되어야 한다. 첫째 대안은 분명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수수께끼란 실재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대안만이 이성과 경험에 일치한다. 그래서 샹캬는 쁘라끄리띠가 모든 물리적 존재의 제 1원인이라고 추리한다.4)
쁘라끄리띠는 비아이며 의식이 없다.5) 그러므로 뿌루샤, 즉 자아의 여러 가지 경험대상으로서만 자체를 드러낼 수 있다. 샹캬에 따르면 쁘라끄리띠는 세 가지 구나 guna, 이른바 샤뜨와 sattva, 라쟈스 rajas, 따마스 tamas로 구성되어 있다.6) '구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성질 혹은 본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쁘라끄리띠와 관련해서의 구나는 구성요소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샤뜨와는 순수성, 미세함, 가벼움, 밝음, 그리고 즐거움을 본질로 하는 구성요소이다. 에고, 의식, 마음, 지성과 가장 긴밀히 연합된 것이 샤뜨와이다. 그러나 사뜨와는 의식의 필요조건이긴 하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오직 뿌루샤이기 때문이다. 라쟈스는 활동과 운동의 원리를 대표한다. 물질적 대상의 운동은 라쟈스에 기인한다. 인간에게 있어선 라쟈스가 그 활동, 불안정, 고통의 원인이다. 따마스는 물질적 대상에 있어서 무거움이나 또는 운동, 활동에 대한 반대와 저항으로서 자체를 드러내는 요소이다. 인간의 경우엔 그것이 무지, 조야, 우둔, 태만, 둔감, 무관심의 원인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구나는 정적인 실체로서가 아니라 역동적 복합체로서 쁘라끄리띠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쁘라끄라띠는 세 구성요소의 기계적인 집합이 아니라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그 가운데 세 구나는 역동적 평형 상태에 있다.7) 즉 구나들은 서로 대립될 뿐 아니라 또한 상호 의존적이다.8) 쁘라끄리띠의 동질적이고 비기계적이며, 유기적인 통일성 때문에 구나들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쁘라끄리띠는 개개의 구나들로 분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쁘라끄리띠가 아니라 구나가 모든 물리적 존재의 궁극적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각될 수 없는 동질적 쁘라끄리띠로부터 이질적인 다양성의 세계의 출현을 고려하기 전에 샹캬의 인과론을 논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샹캬는 물리적 결과가 질료인과 동일하다(혹은 그 가운데 이미 있다)고 주장한다.9) 요컨대 샹캬학파는 인중유과설 satkaryavada을 위한다.10) 인중유과설에 따라서, 쁘라끄리띠가 모든 물리적 존재의 궁극적 원인이므로 쁘라끄리띠를 구성하는 세 구나가 물리적 세계의 모든 대상을 이룬다고 샹캬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은 우리에게 즐거움, 고통, 혹은 무관심을 일으킨다.
대상의 세계로의 전개와 차별화 이전에 쁘라끄리띠는 세 구나들 사이의 완전한 균형 때문에 역동적 평형상태에 있다. 그러나 전개 이전조차도 쁘라끄리띠는 그것을 구성하는 구나들이 상호 간에 끊임없이 견제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변화와 변형 상태에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쁘라끄리띠는 결코 정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변화와 활동이 바로 그 본질이다.11) 따라서 세계의 모든 대상은 쁘라끄리띠의 결과이므로, 또한 지속적인 변화 가운데 있다. 그래서 변함없고 정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이 책상도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실체이다. 대상을 역동적 실체로 보는 샹캬의 견해가 모든 사물을 끊임없는 운동과 변형 상태에 있는 분자, 원자, 전자 따위의 복합체라고 하는 현대 물리학의 발견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흥미 있다.12) 샹캬에 따르면, 쁘라끄리띠가 다양한 대상들로 전개 evolution 한 후에는 해체 dissolution, 즉 대상의 세계가 무차별적인 원형적 쁘라끄리띠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뒤따른다. 해체 후에는 다시 전개가 따른다. 이런 식으로 우주적 순환이 일어난다. 연중유과성 satkaryavada에 대해서 전변설 parinamavada과 가현설 vivartavada의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 전자에 따르면, 쁘리끄리띠의 다양한 대상으로의 변형은 실재이다. 그러나 후자에 따르면, 그 변화는 실재가 아니라 그렇게 나타나 보일 뿐이다. 불이론적 베단따는 가현설을 지지하는 반면, 샹캬는 전변설을 옹호한다.13)
쁘라끄리띠의 전개는 세 구나 중 어느 하나의 강세나 지배에 의한 불균형에 기인한다고 샹캬는 가르친다. 쁘라끄리띠의 전개는 23의 원리로 발현된다.14) 그 중 첫째는 샤뜨와의 우세로 야기되는 지성(지 혹은 대) mahat, buddhi이다.15) 마하뜨는 우리의 모든 지적 양태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분별하고, 숙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능이다. 마하뜨에 의해 우리는 주관과 대상, 자아와 비아, 경험주체와 경험대상을 구분한다.16) 둘째로. 이만 ahamkara은 마하뜨로부터 일어난다. 아함까라는 '나'와 '내것'이라는 관념의 근원이다. 그것은 대상을 소유케 하고, 목표를 세워 그 실현을 위해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함까라로부터 두 무리의 대상이 나온다. 첫째는 다섯 감각기관과 다섯 운동기관, 그리고 마음 manas이며, 둘째는 미세한 것과 조대한 것의 두 형태를 가진 다섯 물질적 요소이다.17) 첫째 그들에 속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생활에 관련된 것이며 따라서 아함까라의 사뜨와적 요소로부터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 객관적 세계를 이루는 둘째 그룹의 대상들은 아함까라의 따마스적 요소로부터 발현된다. 아함까라의 라자스적 측면은 그 자체로서 어떤 대상도 생출시키지 않고, 다만 다른 두 구나가 각각의 대상을 생출시키도록 에너지를 공급한다.
물질적 요소들은 미세하고 조대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위에서 말했다. 따라서, 다섯 가지의 미세한 요소 tanmatta와 다섯 가지의 조대한 요소, 즉 지, 수, 화, 풍, 공이 있다. 조대한 요소들은 미세한 요소들의 결합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다섯의 미세한 요소란 소리 원소, 접촉 원소, 색깔 원소, 맛 원소, 냄새 원소이다. 성유로부터 소리의 속성을 가진 조대한 원소인 허공이 생산된다. 풍대는 성유와 촉유의 결합으로 생성되며, 양자는 소리와 접촉의 속성을 갖는다. 조대한 불의 원소는 성유, 촉유, 색유의 결합에 의해 생산되며, 소리, 접촉, 색깔의 세 속성을 모두 소유한다. 조대한 수의 원소는 처음 네 가지 유 tanmatra의 결합으로부터 생기며, 그에 상응하는 네 속성을 갖는다. 그리고 다섯 번째 조대원소인 지는 다섯 가지 모든 유 tanmatra의 결합의 소산으로서 다섯 속성을 갖는다. 모든 조대한 대상들은 다섯 조대원소의 갖가지 결합에 의해 생산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오직 조대원소와 그들의 결합으로 형성된 사물만이 지견되며, 유는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샹캬 학파는 두 종류의 분해 disintegration을 구분한다. 즉, 조대한 대상이 그 구성요소인 조대원소로 환원되는 것과 그 조대원소가 다시 미세한 원소인 유 tanmatra로 환원되는 것이다. 전자는 쁘라끄리띠의 전개기에 일어나며, 반면에 후자는 물리적 세계가 원질인 쁘라끄리띠로 분해될 때 일어난다. 달리 표현하여, 일단 쁘라끄리띠가 전개하면, 모든 역동적 변형은 조대한 차원에서 일어난다. 오직 분해에 있어서만 미세한 차원에서의 변형이 일어난다. 모든 조대한 대상들이 조대원소로 분해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조대원소들이 미세 원소로 분해되며, 그것은 다시 분해되어 무차별적, 동질적 쁘라끄리띠의 역동적 평형 상태로 돌아간다.
대 mahat, 아만 ahamkara, 심 manas으로 형성된 복합체는 내적 기관 antah karana 이라고 하며, 감각, 지각, 개념 작용, 요컨대 우리의 모든 심적 생활의 기반이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내적 기관과 그 구성요소들은 모두 물리적 실체들이며, 따라서 그것들을 뿌루샤와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기관은 세계에 대한 자아의 경험 가능성에 필요한 것일 뿐이며 충분한 것은 아니다. 생리학적 관점에서 내적 기관은 감각과 행동기관과 더불어 두뇌와 신경체계로 간주될 수 있다.
이제 샹캬학파의 뿌라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18) 샹캬학파는 물리적 세계인 쁘라끄리띠와 자아, 영아인 뿌루샤라는 두 가지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는 이원적 체계이다.19) 물리적 세계는 미세하며 의식이 없는 쁘라끄리띠의 현현이다. 다른 한편, 뿌루샤는 내면의 자아로서 순수의식이다. 샹캬는 뿌루샤를 쁘라끄리띠로, 혹은 쁘라끄리띠를 뿌루샤로 환원시키려는 어떠한 제안도 우리의 경험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거부한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언제나 즉 경험자와 피경험자, 의식과 의식의 대상이라는 양극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샹캬는 논한다. 따라서 뿌루샤와 쁘라끄리띠 사이의 구분은 절대적이고 불변적이다.20) 뿌루샤는 육신이나 감각, 마나스 manas, 에고, 그리고 지성 조차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모두는 물리적인 것이다. 자아는 의식을 속성으로 하는 어떤 대상으로 생각되어선 안된다. 정반대로 자아란 순수의식 그 자이다. 자아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원칙적으로 그것을 많은 대상들 가운데 하나로서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 주관이며, 따라서 결코 대상일 수 없다. 그것은 대상을 우리에게 현시해주는 것이다.21)
항상 변화하며 활동적인 쁘라끄리띠와는 전혀 달리, 자아는 불변적이고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의지도 인식도 가질 수 없다. 그런만큼 자아는 순수한 형수자이지 행동자 kartr가 아니다. 그러나 쁘라끄리띠와 같이 자아는 영원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편재하는 것이다. 어떤 샹캬 철학자에 따르면 자아는 형수자도 피형수자도 아니며, 따라서 쾌락과 고통, 기쁨과 슬픔을 넘어선 것이다. 희열조차도 초월한 것이라는 자아관은 자아를 희열의 의식으로 보는 불이론적 배단따의 견해와 매우 대조적이다. 어떻게, 그리고 왜 사람들은 고통, 슬픔, 쾌락, 그리고 행복을 경험하는 것이 자아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무지속에서 자아는 자신을 경험의 대상과 동일화하며, 그로써 쾌락과 고통, 기쁨과 슬픔의 경험주체라는 착각에 빠진다고 샹캬학파는 답한다.
쁘라끄리띠와 마찬가지로 뿌루샤도 지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후자의 존재도 전자와 마찬가지로 추리되는 것이다.22)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란 우리의 모든 경험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하고 명백한 경험이므로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고는 부정할 수 없다. 의심하는 행위 자체가 바로 의심하는 주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자아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자명하다고 샹캬는 결론짓는다. 자아의 존재에 대한 샹카의 논증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까르뜨의 언명과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데까르뜨에겐 사고자 자아의 속성임에 대해, 샹캬에 있어선 자아가 속성을 소유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순수의식 그 자체이다. 샹캬에 따르면 사고는 자아가 아니라 내적 감각 manas에 속한다. 그렇다면, 데까르뜨가 자아 혹은 '나'라고 부른 것은 샹캬의 자아가 아니라 아만 ahamkara에 해당될 것이다. 자아의 존재에 대한 샹캬의 두 번째 논증은 언어학적 고찰에 근거한다. 어떤 사람이 '나는 뚱뚱하다'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자아가 아니라 몸이 뚱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아와 육신 사이의 차이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우리의 언어 속에 반영되어 있다. 세 번째 논증은 명백히 목적론적이다. 미세하거나 조대한 갖가지 대상으로의 쁘라끄리띠의 전변은, 만일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것이다. 물리적 세계의 각 대상들은 이런저런 목적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여한다. 그러므로 샹캬는, 쁘라끄리띠가 물리적 세계로 전개하는 목적이 되는 의식적 주관 혹은 자아가 있어야만 한다고 논한다.23) 요컨대, 쁘라끄리띠의 전개는 뿌루샤를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전개의 첫 번째 산물인 이른바 대 mahat, 아만 ahamkara, 의 manas가 의식적 생활을 돕는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쁘라끄리띠의 전개의 순서를 지배하는 의식적 주관이 있어야 함을 피할 수 있다고 샹캬는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만일 의식적 주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쁘라끄리띠가 전개되어야 하며, 왜 처음의 소산들이 의식적 생활에 필요한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아의 존재에 대한 네 번째 논증은, 인간이 무지와 악에도 불구하고 자아완성의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그러한 충동은 완성을 추구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해할 것이라고 말한다.24) 그러므로 샹캬는 완성을 향해 노력하는 의식적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논한다.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샹캬가 그 형이상학에 있어서 제일원인과 목적인 개념을 함께 구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쁘라끄리띠는 물리적 세계의 제일 원인이며, 쁘라끄리띠의 전개는 궁극적 원인, 이른바 뿌루샤의 목적에 지배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뿌루샤의 목적인가? 샹캬에 따르면, 뿌루샤의 목적은 쁘라끄리띠와의 연루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불완전과 한계로부터의 해방이다. 여기서 우리는 샹캬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자아의 불완전함이 쁘라끄리띠와의 연루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쁘라끄리띠의 전개가 자아가 불완전으로부터 해방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 남겨둔다면, 샹캬 체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겉보기에 역설적이고 모순된 이러한 입장이 뜻하는 바는, 자아가 무지 때문에 쁘라끄리띠와의 얽힘이 실재라는 착각에 희생물이 되었으며, 구원이란 그러한 얽힘에 수반되는 불완전은 비실제이고 쁘라끄리띠와의 그릇된 동일화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깨닫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해방은 그것이 쁘라끄리띠로부터 영원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독립된 것이라는 인식으로 성취된다.
샹캬에 따르면,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뿌루샤 혹은 자아가 있다. 이런 까닭으로 샹캬 학파는 정신적 다원주의 spiritual plualism이다. 샹캬는 인간이 서로 구분되는 독자적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아의 다수성을 옹호한다.25) 개개인의 구분성과 독자성은 또한 그들 사이의 심적, 도덕적 차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이해 뒷받침된다. 요컨대, 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똑같은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샹캬는 서로 다른 자아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자아의 다수성에 대한 샹캬의 논증엔 다음과 같은 반박이 가능하다. 만일 자아가 지각될 수 없는 초월적인 주체라면, 어떻게 샹캬학파는 경험적 개체의 다수성의 사실로부터 자아의 다수성을 주장할 권리가 있는가? 매우 대조적으로 불이론적 베단따는 다만 경험적 자아(=ego)만이 다수이고, 진아, 즉 아뜨만은 하나라고 가르친다.26) 샹카의 자아설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반박은 자아의 편재성에 관련된 것이다. 만일 '편재'라는 말이 어느 곳에서나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라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신체에 연합된 자아가 어떻게 동시에 다른 신체와도 연합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자아가 편재적 all pervading이라는 샹캬의 주장은 자아가 다수라는 주장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샹캬는 오직 해탈 상태에서만 자아가 편재적이라고 답변할 수 있다. 샹캬의 형이상학에 대한 가장 유효한 비판은 쁘라끄리띠와 뿌루샤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27) 샹캬에 따르면 쁘라끄리띠는 비의식적이며, 전개 이전에는 세 구나가 완전한 균형상태에서 존재하는 역동적인 평정상태이다. 더욱이 쁘라끄리띠는 그 자체로 전개를 주도할 수 없으며, 뿌루샤와의 접촉을 요구한다. 뿌루샤와 관련됨으로써만 쁘라끄리띠가 전변을 시작한다. 여기서 이런 문제가 야기된다. 즉, 만일 샹캬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쁘라끄리띠와 뿌루샤가 전혀 다른 것이라면, 어떻게 그 둘이 상호 작용할 수 있는가? 또 만일 뿌루샤가 전적으로 비활동적이고 불변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쁘라끄리띠의 전변을 선도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샹캬의 답변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반론에 대한 샹캬의 답변은, 쁘라끄리띠와 뿌루샤가 정글에서 길을 찾고자 조화롭게 협동하는 절름발이와 맹인 사이의 관계와 같다는 정도이다.28)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논증이 아니라 비유에 불과하다.
이밖에 다른 해답이 없으므로, 샹캬가 말하는 쁘라끄리띠의 뿌루샤의 관계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중관 Madhyamik학파가 이룬 중요한 성취는, 철학적 체계가 개념을 절대화시킴으로써 생성시키는 바로 이런 종류의 곤란에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샹캬의 경우에는 쁘라끄리띠와 뿌루샤가 절대화되었고, 전적으로 독립되어 버렸다. 절대적으로 독립자존하는 두 실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샹캬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디야미까 학파는 여기서, 무엇보다 쁘라끄리띠와 뿌루샤를 절대 독립적이고 전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존재로 생각할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연기설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을 어기는 자는 누구나 부조리와 모순에 떨어지는 무거운 대가를 지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관학파는, 샹캬가 쁘라끄리띠와 뿌루샤를 상대적, 의존적, 조건적 존재로서 주장할 수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2. 인식론 ▲ 위로
샹캬학파는 거의 모든 다른 인도철학 학파들과 같이 지각, 추리, 증언의 세가지 바른 인식의 근원과 표준 pramana을 인정한다. 샹캬에 따르면, 자아는 감관과 마나스(의) manas, 그리고 마하뜨(대) mahat라는 수단을 통해 인식을 갖게 된다. 감각과 인상은 감관과 대상 사이의 접촉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마나스는 감각과 인상을 갖가지 형태로 분석하여 마하뜨로 넘긴다. 그리하여 마하뜨는 특수한 대상의 형태로 변형된다. 그러나 마하뜨는 물리적 실체이므로 의식을 결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는 인식을 생성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마하뜨는 사뜨와적 성질이 지배적이므로 자아, 즉 뿌루샤의 의식을 반영한다. 이런 식으로 비의식적이나 탁월하게 사뜨와적인 마하뜨는 형태를 의식하게 되며, 그에 따라 변형된다. 그리하여 인식 활동으로서의 지각이 일어난다. 비유로써 이 점을 좀더 예시해보자. 캄캄한 방에 있는 거울은 비록 대상 앞에 있더라도 우리에게 그 대상을 드러낼 수 없으며, 대상을 반사하여 드러내기 위해서는 불빛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비의식적이고 물리적 실체인 마하뜨도 인식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뿌루샤의 의식을 빛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순수의식으로서의 뿌루샤가 없이는 어떤 인식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샹카학파는 순수감각 pure sensation과 지각 perception으로 명명되는 두 종류의 지각을 구분한다. 순수감각으로 우리는 무엇인가의 현전을 인식한, 그것이 무엇이라는 인식은 없다. 즉 순수감각엔 감각자료에 대한 범주화나 분석, 종합이 없다. 그러므로 순수감각엔 개념적 요소가 전혀 없다. 달리 표현하면, 감각에는 재인식 recognition이 아니라 오직 인식 cognition이 있을 뿐이다. 재인식은 감각된 것을 확인함을 뜻하며, 그러한 확인 identification은 반드시 감각에서 주어진 것에 대한 범주화, 분석, 종합, 해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아의 세계 경험이란, 윌리암 제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왁자지껄한 혼란이다. 어린아이에겐 다양한 감각자료 sense-data에 딱지를 붙이고, 그로써 동일성과 대상, 개체의 관념을 생성시키는 개념이 없다. 반대로 언어의 획득과 더불어 우리는 자신의 감각에 명칭을 붙이고, 그것들을 이런 저런 대상으로 확인하기를 배운다. 예를 들면 '이것은 붉은 꽃이다', '저것은 코끼리다'라는 식이다. 샹캬 문헌에서는 가각과 지각을 각각 비결정적 inde-terminate 지각과 결정적 determinate지각으로30) 부른다.
이제 샹캬의 추리론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겠다. 추리는 우리가 세계에 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을 때만 요구된다. 그것은 우리가 지각한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아직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주장하는 과정이다.31) 지각된 것과 주장되는 것 사이의 연결은 불변적 관계 invariabla relation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연기와 불이 반드시 틀림없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관찰한 후에 연기의 지각으로부터 불의 존재를 추리한다. 그러나 지각된 것과 추리된 것 사이의 관계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또 경험에 근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다만 우연적인 공존 현상의 발생이나 고립된 실례만으로는 한편의 지각으로부터 다른 편의 존재를 추리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
넓게 말해서 샹캬는 모든 추리를 긍정적 vita인 것과 부정적인 것 avita의 두 부류로 나눈다. 첫 번째는 전칭긍정명제에 근거한 추리고 그리고 두 번째는 전칭부정명제에 근거한 추리로 이루어진다. 첫째 부류는 다시 실제적 경험에 바탕한 추리로 이루어진 그룹과, 경험에 바탕하지 않은 보편명제에 근거한 추리로 이루어진 그룹의 둘로 분류된다. 이 세 종류의 추리를 각각 예시해보자.32) 위에서 주어진 연기-불의 예는 첫째 부류의 첫째 그룹에 속한다. 다음은 첫째 부류의 두 번째 그룹 추리의 예이다. '어떻게 우리가 감관을 갖고 있음을 아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샹캬에 따르면 우리가 감관을 지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갖고 있다고 안다는 답은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관으로써 모든 대상들을 지각하나, 감관 자체는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은 그 자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샹캬는 다음과 같은 논증에 의해 감관의 존재를 추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활동은 그 수행을 위해 어떤 도구 혹은 수단을 필요로 한다. 지각도 일종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각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각의 수단 혹은 도구인 감관을 소유해야만 한다. 샹캬에 따르면, 이 추리는 정당하다. 왜냐하면 감관이 지각 활동에 필연적으로 관계됨을 관찰했기 때문이 아니라 활동이 도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생각 때문이다(혹자는 지각이 활동이라는 샹캬의 생각에 의문을 가질지 모르나, 이 문제는 여기서 더 이상 다루지 않겠다). 이제 전칭부정명제에 근거한 추리를 예시하겠다. 이것은 가능한 대안 하나만 남기고 다른 모두를 하나씩 소거해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실체라는 것을, 그것이 속성도 관계도 운동도 기타 다른 것도 아님을 보임으로써 추리한다. 샹캬는 니야야의 5단 논법을 가장 적합한 추리형식으로 받아들인다. 이 형식은 니야야에 관한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샹캬는 지각이나 추리가 인식수단이 될 수 없을 때는 증언 testimony을 적합한 수단으로 인정한다.33) 증언엔 일상적인 것 laukika과 종교적인 것 vaidika의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원칙적으로 지각과 추리에 의해 확인 가능한 것이고, 후자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구성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에 관계되며, 후자는 초감각적이고 초월적인 실재의 인식에 관계된다. 그래서 지리학자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대륙이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원칙적으로 그것을 지각과 추리에 근거하여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생물학자가 적합한 이론과 도구의 도움으로 어떤 미생물의 존재를 주장할 때, 우리 자신도 원칙적으로 이 주장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지각과 추리를 넘어선 문제에 있어서 샹캬는 베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샹캬학파가 베다의 리쉬(선인)를, 세속적 생존의 불완전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궁극적 실재에 대한 통찰을 획득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언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 직관적 인식이 표현이다. 따라서 베다는 초월적 실재에 대한 가장 권위 있고 틀림없는34) 지식의 원천이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샹캬학파는 베다를 영원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초월적 경험 가운데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다가 결함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의 직관적 통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샹캬학파는 베다적 지식을 초시간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살고 있는 특정한 집단이 베타적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변치 않는 영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샹캬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결론짓기 전에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샹캬의 형이상학은, 쁘라끄리띠와 뿌루샤라는 두 개의 궁극적 원리에 근거한 이원론적 실재론 dualistic realism이다. 따라서 샹캬 학파는 유물론적이든 관념론적이든 이원론 monism을 거부한다. 그 까닭은, 유물론적 일원론은 쁘라끄리띠(물질)의 실재를 긍정하면서 뿌루샤(정신)의 실재는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며, 다른 한편 관념론적 일원론은 뿌루샤의 실재를 긍정하면서 쁘라끄리띠의 실재를 부정하는 반대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이 두 일원론의 어느 것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우리 경험의 엄연한 사실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샹캬는 지적한다. 샹캬학파에게 인식이란 쁘라끄리띠와 뿌루샹의 결합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쁘라끄리띠와 뿌루샤는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서, 전자가 인식의 대상을 제공한다면 후자는 의식의 원리이다. 쁘라끄리띠와 뿌루샤의 어느 한편도 그 자체만으로는 인식을 생성시킬 수 없다. 샹캬의 인식론은, 외적 대상이 우리가 지각 가운데서 인지하는 속성과 관계를 실제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실재론이다.
그러나 인식하는 주관은 세계에 대한 수동적인 관조자가 아니라 인식의 생성에 있어서 능동적 역할을 담지한다고 샹캬는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 순전히 주관적이며, 어떤 객관적 기반을 결여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샹캬가 말하는 '인식하는 주관의 능동적 역할'이란, 세계를 구성하는 대상들의 무수한 측면과 속성, 그리고 관계중에서 주관은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에 집중하며, 다른 것들은 무시함을 뜻한다. 이것은 각양의 사람들이 그 관점의 차이 때문에 실재를 다르게 지각한다는 인식의 관점설 perspective theory of knowledge로 귀결된다. 더욱이 동일한 사람이 세계를 다른 시간에 다르게 경험한다.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시간에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는 많은 요소에 달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전생의 까르마(업)으로부터 형성된 그 사람의 성향이다. 요컨대 중요한 점은 샹캬가 실재를 어느 한 관점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풍부하고 복잡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관점들 perspectives은 단지 주관적이며, 따라서 실재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샹캬는 상기시킨다. 정반대로, 각 관점들은 우리에게 세계의 특정한 측면을 드러낸다. 이 생각을 변호하는 것으로서 샹카는 다른 관점들이 겹치기도 하며, 관점에 대한 객관적 기반이 실재하지 않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35) 관점들이 빈번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샹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모종의 일치가 없이는 불일치도 있을 수 없다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진리를 재빨리 지적한다. 일치란, 각기 다른 사람들의 감관과 마나스(의), 아함까라(아만), 붓디(지)가 단일한 쁘라끄리띠로부터 전개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불일치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무지의 정도와 성질의 차이로써 설명된다.
3. 신 ▲ 위로
까삘라가 체계화시킨 샹캬 철학은 명백히 무신론적이다. 까삘라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37) 다음은 신의 존재에 반대하는 샹캬의 논쟁이다. 이것은 신의 비존재에 대한 증명이라기보다는 신의 존재 논증에 대한 반박이다.
샹카의 비판의 주요 표적은 신이 세계의 제1원인이라는 견해이다. 만일 신의 존재의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이 영원, 불변한 것이라면, 그것은 세계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샹캬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원인이 된다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것이고, 따라서 시간 속에서 변화를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영원하고 불변하면서 또한 세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도 또 할 수도 없다. 이 결론은 또한 샹캬 학파가 견지하는 인과론인 인중유과론 satkaryavada으로부터도 도출된다. 쁘라끄리띠는 언제나 활동적이고 변화한다. 만일 신이 쁘라끄리띠의 원인이라면 인중유과론에 의해 신도 또한 활동적이고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란 불별이라는 주장과 상충된다. 샹캬에 따르면, 쁘라끄리띠는 물리적 세계의 제일원인이며, 그 존재와 전개, 혹은 소멸을 위해 신이 필요치 않다.38)
샹캬의 반대자들은 쁘라끄리띠가 물리적, 비의식적이므로 지적인 존재의 지도가 없이는 전재할 수 없으며, 그런 존재가 바로 신이라고 주장한다. 샹캬는 이 논증이 앞서의 논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배척한다. 무엇을 지도한다는 것은 하나의 활동이고, 활동한다는 것은 곧 변화를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쁘라끄리띠의 지도 주체라면, 그 신은 영원, 불변한 존재일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샹캬는 또한 신의 선성에 근거한 논증도 거부한다. 이 세계속에 엄청난 양의 고통과 슬픔이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전적으로 선한 존재라면, 쁘라끄리띠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세계로 전개시킬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신은 완전히 선한 존재일 수도, 또 세계의 원인일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혹자는 신이 쁘라끄리띠와 뿌루샤 모두의 창조자라고 샹캬에게 논박할지도 모른다. 샹캬는 만일 어떤 것이 창조가능하다면, 파괴도 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이 논증에 맞선다. 그러나 쁘라끄리띠나 뿌루샤는 모두 영원하며 파괴될 수 없다. 그런만큼 그들은 신을 포함한 어떤 것의 피조물일 수 없다.
샹캬는 목적에 의한 신의 존재 증명도 불합리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 만일 신의 존재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이 완전하다면, 그는 아무런 결핍도 없고, 따라서 어떤 욕망이나 목적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존재들만이 욕망이나 목적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완전하고,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서 목적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39)
그런데 모든 샹캬 철인들이 까삘라의 무신론을 시인한 것은 아니다. 샹캬 체계에 대한 후대의 어떤 해석은 분명히 유신론적이다.40) 예를 들면 비갸나빅슈 Vijnanabhiksu는 그의 Samkhya pravacana bhasya에서 신이 없이는 쁘라끄리띠의 전개를 설명할 수 없다고 논한다. 요가 장에서 샹캬에 대한 다른 유신론적 해석을 논의할 것이다.
4. 속박과 구원 ▲ 위로
샹캬에 따르면 자아란 영원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편재적임을 이미 보았다. 이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의지도 인식도 갖지 않는다. 자아는 순수의식이다. 그러나 무지 때문에 자아는 쁘라끄리띠의 소산인 마나스, 아함까라, 마하뜨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한 그릇된 동일화를 통해서 자아는 착각의 희생물로 전락하며, 고통과 아픔의 경험주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자아는 세계의 대상들에 대한 집착을 증대시킨다. 그러한 집착이 그것의 속박과 비자유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아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모르는 한, 비자아에 대한 집착과 그에 따르는 속박 상태는 까르마 karma의 법칙에 따라 지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아는 생사의 윤회에 얽혀든다. 샹캬 학파도 다른 모든 인도 철학 학파들과 같이 무지를 속박과 고통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구원이란, 자아가 무지와 착각의 사슬을 부숨으로써 쁘라끄리띠로부터 전혀 독립적이며, 영원, 불사, 자유로운 뿌루샤로서의 참된 존재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해탈지란 자아가 에고도 마음도 지나 그밖에 어떤 쁘라끄리띠의 소산도 아니라는 인식이다. 자아는 공간과 시간, 괴로움과 즐거움을 초월한 것이다. 그러한 지식을 구별지 vivekajnana42)라고 부른다. 자아가 쁘라끄리띠와 절대적으로 별개라는 인식이기 때문이다.43) 반대로 무지는 자아와 비아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비구별 ariveka이다. 샹캬는 자아의 해탈과 자유가 덜 완전한 상태로부터 더욱 완전한 상태로의 발전의 결과라는 생각에 대해 경고한다. 그 이유는, 뿌라샤라는 참된 존재로서의 자아란 기쁨과 슬픔, 따라서 완전과 불완전을 영원히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샹캬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도덕적 혹은 지적 완전의 성취가 아니라, 자아가 비자아로부터 전적으로, 영구히 독립된 것이라는 인식으로 이루어진다.44) 이것은 도덕적, 심성적 완성이 해탈의 성취에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정반대로 쁘라끄리띠에 속박된 동안 자아는 지성의 작용을 통해서만 그 속박 상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지적 완성은, 자아가 지금의 속박 상태가 무지에 기인함을 인식하는데 필요하다. 특기할 점은 자아가 쁘라끄리띠로 비롯된 대상과 그 대상이 가져오는 쾌락과 고통에 집착하는 한 그것의 속박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을 평정시키고, 욕망과 격정을 통제하는 것이 자아가 그 참된 성품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도덕적 완성도 자유와 구원의 달성에 관련된다.
샹캬에 따르면 자아란 쁘라끄리띠로부터 영구히 독립되고, 자유로운 것이므로, 구원이 육신의 사후에 달성되거나 추구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시공적이고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사건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자아가 그 참된 모습에 있어서 영원하고 자유롭다는 샹캬 학파의 말은 자가당착일 것이다. 정반대로 구원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달성되는 것이라고 샹캬는 말한다. 우리가 육신을 갖지 않을 때 어떤 것을 실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아의 쁘라끄리띠로부터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독립을 실현한 사람을 생해탈자 jivanmukta, 즉 살아 있으면서 해탈한 자라고 부른다. 생해탈자는, 육신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의 자아의 참된 본성을 깨달은 때문에 모든 격정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는 자신을 쁘라끄리띠에 묶는 까르마의 사슬을 부수고, 생사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난 자이다. 생해탈자의 죽음은, 결국 쁘라끄리띠의 미세하거나 조대한 모든 현현으로부터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해탈이다.45) 자아가 쁘라끄리띠로부터 최종적으로 벗어난 상태를 편재 kaivalya (혹은 육신없는 해탈 videhamukti)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면 고통과 속박의 근원인 무지의 장막을 뚫고, 영원히 자유로운 뿌루샤로서의 자신의 참된 성품을 실현시키는 방법, 수행, 혹은 기술이 있는가? 샹캬는 실로 그런 수행법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바로 다음 장의 주제인 요가이다. ▲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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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