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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1-11)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힘든 때가 없었던 것같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고통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복음이 들어온지 130년이 넘었지만 한번도 주일예배를 쉰적이 없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주일예배는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쉬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입니다.
아직도 쉬어야 한다고 여기저기에서는 소리치지만 오늘 우리가 이처럼 주일에 교회당에 모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우리에게 이와같은 역경이 왔습니까? 우연입니까? 시대의 흐름에서 어쩔 수 없이 다가온 위기입니까? 아닙니다. 요즘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시대 종말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경고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먼저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앞에 나아와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막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하는 날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한 시편기자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낙망상태에 빠졌습니다.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4절 끝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마음에 고통이 너무나 많이 쌓여서 주체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도 낙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치고 낙심을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불안해서 떨지 아니한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이 있어도 떱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위대한 성인들도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불안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낙심합니다. 만약에 낙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천사이거나 저능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도 낙심합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낙심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낙심 때문에 더 집요하게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할수록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더 가까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이런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낙심하면 그 낙심 속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인 우리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낙심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 눈에는 낙심할 만한 일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여러분, 아무리 곤고하고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면 그것은 더이상 낙심일 수가 없습니다. 에머슨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곤고한 삶의 현실 앞에서 낙심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내 반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어야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더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너무나 낙심이 되고 불안하기에 5절과 11절에서 이런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까? 본문 5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5절,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낙심이 되느냐?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찾아라. 불안한가?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찾아라. 곤고한 삶이 나를 힘들게 하고 그래서 낙심이 올 때마다 하나님 찾고, 불안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으면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낙심되고 불안할 때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랄 때 바라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존 피터슨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 예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며 늘 지켜 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맡겨라. 슬플 때에 주 예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만 바라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다(1-2절)
1-2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도합니다. 아마 그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할 수 밖에 없어서 지금은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릴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하고 탄식하는 것은 성전에 올라가 예배할 수 없는 심각한 환경속에서 그 때를 떠올리며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내 영혼의 하나님, 곧 어떤 하나님입니까? 살아계시는 하나님,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은 건기가 되면 비가 잘 안 옵니다. 더욱이 남부 지역은 거의 사막이기 때문에 비가 안 오는 때는 물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시편의 기자는 그렇게 가물 때에 사슴 한 마리가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을 찾느라고 옆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온 사방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이 언덕 저 언덕, 골짜기마다 다니면서 물을 찾는 모습을 본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그것을 연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낙망이 될 때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떤 식으로 찾을까? 그래, 바로 저 사슴처럼 찾아야 되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실 물을 찾아 헤매이는 사슴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집요합니까? 얼마나 간절합니까? 물 아니면 죽음입니다. 물을 찾으면 사는 것이고, 못 찾으면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절박합니까? 그러니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물을 찾을 때까지 그는 쉬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물을 추구하고 사방으로 뛰어 다닐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저렇게 찾아야 되겠다. 곤고한 삶으로 힘이 들어서 내가 낙심이 될 때에는 저런 식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이 낙심과 절망의 자리를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설 수가 있겠다." 기자가 이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고통속에 빠지니까 영혼이 깨어난 것입니다.
육체가 고통속에 빠지면 영혼이 일깨워집니다. 그래서 환란을 주신 이유는 영혼이 깨어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신호인 것입니다. 지금 시편기자는 바로 그렇습니다. 많은 역경과 어려움속에서 하나님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환경에 처하니까 성전제사가 그리웠던 것입니다. 아니 절박했습니다. 마치 목이 말라 헐떡되는 사슴처럼 시냇물을 찾아 헤멥니다. 시냇물은 주로 골짜기 아래에 있습니다. 사슴이 골짜기로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앞다리가 짧은 사슴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쉽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다 골짜기 아래 시냇물에는 맹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물을 먹기위해 시냇물을 찾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 아니면 죽음이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갈급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영적이 갈급함이 있다는 것은 영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 육체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도 건강하면 갈급함이 있습니다. 특별히 육체가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면 영혼이 깨어 나의 창조자,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갈급함으로 성전을 향한 시편기자의 마음을 절박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있습니다.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시편 기자처럼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과거 2,000년 전에만 계셨고 지금은 계시지 않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주님이 살아서 지금 나와 동행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과, 주님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동행하고 나와는 동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또 주님을 과거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기적과 이적을 행하신 분으로만 믿는 사람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믿는 사람의 삶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저 멀리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엡 3:20,21)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저도 하나님이 가까이 느껴지지 않고 저 멀리 계신 분이라고 믿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찾고 찾던 저에게 나는 너와 함께 보이지 않는 공기가 너의 호흡이 되는 것처럼 나도 너의 호흡처럼 함께 있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느낄 때 다가오는 마음은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두렵지 않습니다.
골리앗앞에 선 다윗을 보십시오. 이스라엘군대가 두려워서 나서지도 못하고 토굴속으로 숨고 진지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그 때 어린 다윗은 형님의 전쟁터에 면회하러 왔다가 하나님을 모욕하며 이스라엘군대를 조롱하는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그는 키가 여섯규빗 한뼘이라고 하였습니다. 계산해보면 283미터입니다. 그러한 골리앗앞에 선 다윗은 이렇게 말하면서 저를 대적하여 쓰러트립니다.
삼상 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코로나19라는 전염병앞에서 모두가 움츠리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리라” 이 말은 예레미야 외친 고백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오늘 시편기자 역시 이렇게 고백합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주님은 2,000년 전 유대 땅에서만 역사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이 곳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생존하시며,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과 동행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반석이신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9절).
9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혼란한 환경속에 처한 시편기자는 좌우사방을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분은 변함이 없고 흔들리지도 않으시는 나의 반석되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반석은 기초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기초를 두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물질이 기초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기초였습니다.
세상의 명예가 기초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의 삶의 기초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반석이신 하나님을 삶의 기초로 삼으면 낙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낙망하지 않습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변함도 없으십니다. 천지는 변하여도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기초로 삼는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의 권력이, 인기가, 학식이, 물질이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연약함은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납니다. 여러분!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구별하는 줄 아십니까? 가장 간편한 한 가지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물속에 넣는 방법입니다. 보석 감별사들이 다이아몬드를 육안으로 보아서 얼른 구분이 되지 않을 때 물속에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물속에 넣으면 넣는 순간, 가짜 다이아몬드는 빛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다이아몬드는 물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진짜와 가짜는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가짜는 역경 속에서 환란 속에서 흔들리게 되어있습니다. 세상 것이 우리의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반석이 되신 줄로 믿습니다.
세계에서 고층 빌딩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대표적인 곳은 미국 뉴욕의 맨해턴을 들 수 있습니다. 라디오시티 빌딩을 위시해서 크라이슬러 빌딩이라든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라든지, 지난 2001년 9월 11일 테러에 의해 무너지기는 했지만, 월드 트레이드 센터같은 초고층 건물들이 이곳에 운집해 있습니다. 일종의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지역에 이러한 초고층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지반이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층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처럼 기초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시편 18편 2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비록 그가 왕으로 엄청난 권력과 수많은 신하들과 굉장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반석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반석임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것들도 우리 인생에 반석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같은 반석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에 영원한 반석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도우시는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11절)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로 사모하고, 사모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내 얼굴을 도우셨다"는 말은 내 얼굴을 들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낙심이 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자꾸만 고개가 숙여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땅만 쳐다보게 되고 그것도 지치면 눈을 감아 버리게 됩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얼굴을 들게 만듭니다.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얼굴만 들게 하시고 얼굴에서 광채만 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입을 열어서 나를 낙심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신 하나님, 곤고한 내 현실을 변화시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찬송이 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는 반드시 이런 은혜가 따라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밥맛도 없어지고 잠도 못 잘 정도로 고민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 신앙생활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곤고한 삶의 현실 앞에서 날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날마다 부르는 예수님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 예수를 왜 믿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처럼 거짓말하실 리도 없고 변덕을 부리실 리도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이것이 천국에 가서 쉬는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찾는 자마다 우리 주님이 안식과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평안을 곤고한 삶 때문에 낙심하면서 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예수 믿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또 약속하셨습니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와 같은 약속이 나의 삶을 통해서 현실로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상식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낙심할 때 믿음이 아무 소용 없더라. 예수를 아무리 불러봐도 소용이 없더라" 하는 생각을 여러분 중에 하시는 분이 계시면 자기를 깊이 돌아보십시오.
"내가 과연 어려울 때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았는가? 내가 어느 정도 말씀을 사모했나? 어떻게 기도했나? 어떻게 내 자신을 맡겼는가?"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그대로 안했지 않습니까? 적당히 하다가 말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 효험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 효험이 없으니 예수 믿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도 절박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바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강한 신념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또 수많은 전쟁에서 쌓았던 경험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고난 가운데에서도 건지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그의 음성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은혜 받기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곤고한 삶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문제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를 통해서 체험하고 문제를 통해서 만나고 문제를 통해서 그분의 은혜 속에 흠뻑 젖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낙심하지말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내 힘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변함이 없으신 반석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나의 주권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때마다 돕는 은혜를 부어주시며 우리를 가르치시도 인도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괴로우십니까? 힘드십니까? 어려우십니까? 지금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한 심정으로 하나님앞에 기도하십시오. 나는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