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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홍콩에서 수백만 명이 모이는 엄청난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홍콩은 1997년 7월 1일 0시를 기해 홍콩은 156년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배를 청산하고 중국정부가 1국가 2체제(일국양제)와 고도자치 준수 및 인권과 자유의 보장이라는 약속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홍콩이 자치권으로 행정장관이 행정책임을 지고 있지만 모든 정치관할은 중국정부가 하기 때문에 공산당 일당독재국가내의 자유민주주의지역이라는 이상한 상황이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수많은 홍콩주민들이 시위를 벌이는 것입니다. 2014년에는 소위 우산혁명이라는 이름의 시위에 수 십 만명이 참여했고 올해 2019년 6월에는 백만 명을 넘기더니 200만 명 가까운 인원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일에 대해 어느 인터넷 기사에서는 이렇게 중국정부를 경고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헤드라인 제목은 “지금 홍콩의 폭동사태에 대한 시진핑의 대응을 주목하자. 역사는 반드시 반복한다. 역사에서 깨닫지 못하는 자 몰락한다.”였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튀니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모하메드 부아지지라는 청년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경제 악화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노점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던 부아지지는 무허가 노점 단속을 하던 경찰에게 팔고 있던 과일과 채소, 저울, 수레 등을 빼앗겼고 이 일에 대해 민원을 제기했으나 오히려 구타를 당하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돌아왔습니다. 결국 2010년 12월 17일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 자살을 시도하여 전신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2011년 1월 4일 목숨이 끊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튀니지 국민들은 거리로 나서게 되었고 12월 18일 학생들의 주도로 벌어진 시위를 튀니지 정부는 무장 경찰을 동원해 강제 진압하였다고 합니다. 최소 219명이 죽고 510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이 시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벤 알리 대통령은 내무장관 경질, 대선 불출마 선언, 내각 해산 등으로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그 대책을 듣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군부에게 시위집압을 명령하고 시위대에 발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군부는 시위 진압 명령을 거부하였고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2011년 1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게 됩니다. 1987년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뒤 개헌 등을 통해 23년간 유지했던 독재 정권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독재정권에 짓눌렸던 튀니지 국민들의 ‘부아지지’의 봉기에 벤 알리 대통령은 1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치게 됩니다. 튀니지인들의 이 시위를 국화라는 뜻의 ‘재스민 혁명’이라 부르며 21세기에 일어나는 전 세계 각지의 반독재정권투쟁의 대표적인 이름이 되었습니다. 튀니지의 자스민혁명은 이 후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모로코, 예멘, 바레인 등 중동의 여러 독재국가에서 정권퇴진운동을 일으키는 모체가 되었습니다. 튀니지는 이 지역 민주화 열풍인 ‘아랍의 봄’의 진원지였고, 그 격동의 시기를 통해 민주주의 체제 구축이라는 염원을 이룬 나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를 들면서 기자는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가 중국에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비효과는 조그마한 움직임이 결국 엄청난 결과물로 달라지는 현상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시진핑에게 경고하는 글로 이 기사는 끝이 났습니다. “반드시 반복하는 역사는 현재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 반드시 몰락한다”라고 결말을 내고 있습니다. 역사속에서 정말 제대로 깨달으라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결국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 있다가는 언젠가는 멸망이 되고 파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시면서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참된 신앙인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고 부활의 역사성을 제대로 인식하며 참된 죽음과 부활의 삶을 되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잘 알고 있는 지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참된 신앙으로 제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뜻을 알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 첫째로, 부활은 예언의 완성입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예언되어졌던 말씀이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히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되어졌던 예언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그라페’라는 단어는 거룩한 글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로고스’가 말씀으로 번역될 때에는 근본이신 말씀이며 본체로서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헬라어 ‘레마’가 말씀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 말씀은 현실속에서 역사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기록되어진 말씀인 성경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속에 거하시게 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할 때 우리는 현실속에서 역사하시는 말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되어진 말씀을 믿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나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완성되어져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4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판단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전하는 소식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잉태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음에도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순종합니다. 우리가 잘 알지만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그 당시에서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정혼하였던 상태에서 요셉이 이 사실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는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동시에 하나님의 예언의 실현을 가르쳐주시고 그것을 받아들였기에 예언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실적인 판단을 미루고 하나님의 예언을 믿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여서 역사는 완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처녀가 잉태하였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요소를 몰라서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혹여나 미래에 자기가 얻을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한 가지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이기에 그 말씀이 그대로 이뤄져야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것이 복이 있도다라고 선언하며 마리아를 맞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언젠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때에 실제로 응답되어지고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여호수아 6장 26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주전 1400년경 가나안으로 입성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여리고성을 차지하게 되었던 여호수아는 여리고성터에서 이 성을 다시 쌓으려고 하면 그 때 성을 쌓으려는 사람의 맏아들이 죽을 것이고 마지막에 성이 완성되게 될 때 막내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고 그렇게 예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16장 3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주전 800년경의 하나님보시기에 심히 악한 왕 아합이 북쪽 이스라엘을 통치할 의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호수아가 예언했던 이 말씀을 거역하면서 여리고 성을 다시 쌓으려고 합니다. 새로 쌓을 여리고성의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세우려 할 때 막내아들이 죽었습니다. 주전 1400년경의 예언의 말씀이 주전 800년 경 약 600년이 지난 이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기록되어지고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동일합니다. 말씀을 믿는 성도에게는 그 말씀이 그대로 역사하십니다.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말씀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약의 수많은 말씀은 예수님의 메시야로 오심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언 당시에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었습니다. 때가 차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태를 고지하는 천사의 말을 믿었던 마리아의 믿음을 따라 출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인 실체가 되어 나타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도 계속적으로 예언되어져 왔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여 왔습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고린도전서 15장 3,4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예수님의 삶은 말씀의 성취 그 자체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창세때부터 계속적으로 예언되어져 왔고 결국 사탄마귀의 모든 계략을 무너뜨리며 죽음의 권세,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약속의 위대한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고 약속을 이루시며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고 예언을 완성하시며 부활하셨습니다. 예언의 완성되시며 말씀의 실현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감사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 또한 부활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 둘째로, 부활은 모든 아픔과 고난후에 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32,33절입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위해 희롱과 능욕과 침뱉음의 수치를 감수하셨습니다. 채찍질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과정이 있어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희롱을 당하셨고 능욕도 당하셨고 침뱉음을 당하는 비참한 지경에도 묵묵히 십자가의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살이 찢기고 십자가위에서 죽으시는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어떤 해안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이상하게 해초가 많아서 고기를 잡는데 방해가 된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나이가 많고 어부로써 잔뼈가 굵은 늙은 어부가 말했습니다. “해초가 없었다면 조그마한 새우도 없었을 것이네, 그리고 그 새우가 없었다면 고기들은 이 바다에 있지 않았겠지”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우리 생활 가운데 해초 같은 장해물, 인생의 고난들이 많이 놓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애물, 고난이 오히려 우리 성도들에게 축복을 가져오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쓴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산을 향해 날아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산을 떠나면 죽을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 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존 후랭크린 경이 인솔하는 탐험대가 북극에 도착했을 때 허리에 차고 있던 알콜이 병 속에서 얼어버리는 영하 70도의 극심한 추위였습니다. 추위와 피곤에 지친 대원들은 오두막 속에 들어가서 누워 자려고 했습니다. 이들이 30분 동안만 누워 잠들면 누구나 얼어 죽는다는 것을 잘아는 후랭크린 경은 그들이 잠을 자지 않도록 지시했으나 저마다 “잠을 자지않고 잠시만 쉬겠습니다.”라고 하며 일어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후랭크린 경은 대원들을 발로 걷어찼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먹으로 때려주었습니다. 얻어 맞고 멍이 든 사람도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잠을 못자게 하려는 대장의 무서운 노력으로 대원들은 비틀거리며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걷어찬 대장의 발도 아팠을 것입니다. 그들을 때린 대장의 주먹질은 가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을 구해 준 것은 대장의 그 발길질과 주먹질이었던 것입니다. 추위에 얼어 죽기 바로 전에는 정신이 몽롱해지고 구름을 타는 것처럼 평안하고 기분이 좋기 때문에 자기가 얼어 죽는가보다 하면서도 못 깨어나고 그대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9절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부활은 죽음이 있어야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영광은 고난뒤에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생명의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18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죽으면 생명이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다시 사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그 영광을 위해서는 고난이 있고 고통의 과정을 겪습니다. 또한 죽음이라는 단계도 경험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고난, 고통, 죽음의 과정에서 절망하지 마시고 오히려 이것이 부활과 영생의 과정임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 마지막 셋째로, 첫 부활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3절입니다.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첫 번째 열매로 우리에게 신앙으로 부활하는 삶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후에 새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둠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밝음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하며 돌고도는 생명관을 말하지만 우리는 절대 인생이 돌고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한 번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삶의 결과로 죽은 후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지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21절을 읽으시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이 확실히 존재함을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와 지도자들은 모두 죽었고 그들의 무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묘지는 모두 성지가 되어 있고 수많은 순례객들이 성지순례라는 명목으로 종교창시자의 무덤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무덤터는 있지만 예수님의 무덤과 시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분은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터키에서 선교하시던 선교사님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모하메트를 찾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빌립보서 3장 21절입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목사님이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 소년을 보았습니다. “새를 어떻게 할래?” 스펄전목사님이 묻자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펄전목사님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냈습니다. 이틀 후 부활주일에 스펄전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2천년전 잠시 이 땅에 살다가신 분으로만 알고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이후 부활하신 사건을 분명한 사건으로 확신하고 우리 또한 죽음이후에 부활하는 신앙인임을 확신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 신앙인으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을 말씀하시는데도 그게 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한 번 더 말씀하시는 것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또 말씀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이 부활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4절입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부활의 역사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부활을 받아들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첫 걸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오래전에 예언되어진 대로 예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믿겨지도록 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당하고 죽음을 당한 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또한 완전한 부활, 영원한 생명을 위해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죽은 이후 부활이 있기에 예수님을 믿으며 고난과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하며 고난과 고통도 감사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또한 기적입니다.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로만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신앙인이 모두 부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저와 여러분, 부활을 믿고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기적의 깨달음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