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는 울산암각화 박물관
예나 지금이나 돼지와 인간의 관계는 참 깊은 듯.. 거의 매일 삽겹살에 햄에 수육에 ㅋㅋ
경주최씨 문중의 정각 집청정 반구대 입구에 있다
누운거북의 머리부분에 해당한다는 반구대, 아래는 대곡천
녹조가 짙은 사인암 건너가 볼 수는 없고 설명은 열심히 하는데-- 수년 내에 방수장치를 해 보존한다나
뱀과 꽃인데 꽃뱀이라니 참
대곡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대곡박물관에는 언양 작천정에 새겨진 여러편의 시와 글이 현판에 걸려 있다는데 그 중에 마음을 움직인 시 하나...
풍월을 읊느랴고 한가로운 날이 없는데
정자는 시 짓는 선비를 위한 다락이네
이름을 쓴 바위는 이미 늙었고
잔에 가득한 물은 역류하여 흐르네
사람은 별세계를 찾는데
산은 옛날의 봄과 가을을 안고 있네
난간에 숨어서 소쩍새 울음소리 들으니
소리마다 나라를 떠난 근심이네.
(일봉 이정혁)
귀면인가 용면인가? 귀면이라 되어 있지만 용면은 아닐까?
하나씩 배워가야지
저 뒤에 보이는 대곡댐 - 울산시민의 식수원 - 건설 조형탑 " 물은 생명의 근원"
원효스님이 출가했다는 반고사 그 터에는 석재 몇 개만 널부러져 있고 설명도 안내도 없다
맨 아래 글이 새겨진 역사를 다시 보자.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역사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전리 각석은 높이 2.7m, 폭 9.5m의
바위 면에 동그라미와 마름모꼴 모양 등 기하학(幾何學-수학의 한 부분, 공
간도형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적인 문양들을 그렸는데 이것은 청동기시대
부터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글자를 모르던 시기에 자신들의 염원이나 기
원(祈願)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라고 한다.
청동기 시대 그림이 있는 바위벽 아래쪽에는 세월의 풍화 속에서도
제법 또렷한 명문(銘文)들이 보이는데 일필휘지(一筆揮之)는 아닐지라도
꽤 정성들여 쓴 글씨로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는데 그동안 ‘신라시대 화랑
들의 우정맹세 또는 로맨스’라고 알고 있었으나. (고대로부터의 통신)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책에 보면 먼저 새겨진, 오른쪽에 있는 글자를 원명(原銘),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추명(追銘)이라 하였는데 원명은 제대로 한문을 구사하지 못하
고 우리말식 어순과 표현으로 되어 있어 정확한 해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
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한다.
① 을사년(어느 날 어느 때) 사훼부 갈문왕께서 찾아 놀러오셨다가 처
]
음으로 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
②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이 없는 골짜기여서 좋은 돌을 얻어(무엇인
가를)만들게 하고는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하시고 글자를 쓰게 하셨
다.
③ 함께 놀러온 벗으로 사귀는 누이는 성스럽고 □하며 빛처럼 오묘
하신 어사추여랑님이시다.
이상이 원문이고 왼쪽 아래에 있는 추명은 원문보다 나중에 써진 것
으로
① 過去 乙巳年 六月 十八日 昧 沙喙部(사훼부) 徙夫知葛文王(사부
지갈문왕)妹 於史鄒女郞王(어사추여랑왕) 共遊來以後□□八□□年過去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에 사훼부의 사부지갈문왕과 누이 어사추
여랑님께서 함께 놀러 오신 이후 □□팔□□년이 지났다
② 妹王考 妹王過人 丁巳年 王過去, 其王妃只沒尸兮妃 愛自思(기왕
비지몰시혜비 애자사) 己未年 七月三日 其王與妹共見 畵石叱見來谷(기
왕여매 공견 화석질견래곡)
(누이님을 생각하나 누이님은 돌아가셨고 정사년에는 (갈문)왕도 돌
아가셨다. 왕비인 지몰시혜비께서 애달프게 그리워하다가 기미년 7월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고 글을 써놓았다는 돌을 보러 여기 골짜기에
오셨다.
③ 此時 共王來, 另卽知(무즉지) 太王妃 夫乞支妃 徙夫知王子郞(태
왕비 부걸지비 사부지왕자랑) 深□夫知 共來(심□부지 공래)
(이때 왕도 함께 오시고, 무즉지 태왕비인 부걸지비와 사부지(갈문)
왕의 아드님이신 심□부지께서 함께 오셨다.
별로 어렵지 않은 글자이고 책은 한글로 해석되어 있음에도 쉽게 이
해되지 않는 이유는 오랜 세월로 우리말의 문맥(文脈)이 변한데다가 글
자를 새겼던 당시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풀어보자.
자세히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여기 추명의 주인공은 왕비인
지몰시혜비다. ‘지몰시혜비께서 이미 돌아가신 어사추여랑과 정사년에 돌
아가신 사부지 갈문왕을 그리워하다가 을사년(525년) 6월 18일 새벽에 그
들이 함께 놀러 와서 글 써 놓았다는 돌을 보기 위해 기미년(539년) 7월
3일 골짜기에 오셨는데, 이때는 무즉지 즉 태왕비인 부걸지비
그리고 사부지 갈문왕의 아들인 심□부지께서 함께 오셨다.’는 것이다.
지몰시혜비는 법흥왕과 법흥왕비인 부걸지비 사이에 난 딸로 법흥왕
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과 혼인하여 아들 심맥부지(深麥夫知)를 낳았다.
심맥부지는 다음 왕위를 잇는(신라24대) 진흥왕의 어릴 때 이름이다.
‘
삼국사기’에 진흥왕은 일곱 살 때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다. 얼마 뒤에
는 왕의 어머니가 되지만 지금은 심맥부지의 어머니인 지몰시혜비가 이미
돌아가신 남편인 사부지갈문왕을 그리워하다가 아직 일곱 살이 안 된 아
들 심맥부지를 데리고 아버지인 법흥왕과 어머니인 부걸지비와 함께 여기
온 것이다.
또한 사부지갈문왕은 지몰시혜비의 남편이 되기 전에 이미 누이인 어
사추여랑을 사랑했었고, 을사년 6월 18일 새벽에 둘이 같이 여기 와서 돌
에 글을 써 놓았는데 지몰시혜비인 내가 그 돌을 보려고 오면서 생각하니
둘은 이미 돌아가셨으며, 벌써 14년 전의 일이지만 그들이 써놓은 글을
보기 위해 여기 왔다는 그런 내용이다.
화랑세기에 보면 선덕여왕도 삼촌인 용춘, 용수 형제를 섬겼다고 되
어 있는데 ‘늠름하기는 용숙(龍叔)만한 이가 없다’고 했으나 그 용이 동생
용춘인지, 형 용수인지 가늠하지 못할 뿐이다. 이렇듯 신라는 물론 고려도
왕실에서는 근친혼(近親婚)관계가 보편화되고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사부지갈문왕은 삼국사기에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으로 되어 있는
데, 신라 23대 법흥왕(514~540재위)의 동생으로 왕과 비슷한 실권을 가지
고 왕으로 불러졌으며 형인 법흥왕의 딸로 조카인 지몰시혜비와 혼인하여
다음 왕위를 잇는 진흥왕을 낳은 왕족인 것이다.
이렇게 2013년 한 세월은 흘러갔다.
첫댓글 진짜라는 말밖에는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