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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 6가지 2
4. 고통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온다!
바울의 경우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바울은 신실한 종이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훌륭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이룩한 놀라운 사업과 희생에 대하여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높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높여질 위험을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다. 우리는 그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매우 바울의 육체를 매우 괴롭혔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가시를 몸에 가지고 다녀 보았는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가? 바울은 세번이나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의 육체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가시는 바울의 육체 속에 일평생 동안 남아서 고통을 주었다. 바울이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던 그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구원을 위하여 남겨진 바 되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후 12:7~9).
바울은 많은 계시를 받았던 사도이다. 그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자고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슬픈 일은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일수록 교만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경우들을 다루시는 법을 아신다.
가장 많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였고, 제자들과 사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전도 여행을 하였던 위대한 사도 바울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부족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려도 치유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정말 순수한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진정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한다면,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섭리와 계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바울이 자신의 육체 속에 박혀 있는 가시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 지에 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기 위한 경험이 어떤 것이며, 또한 언제 그러한 경험들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바울을 생각하면서 “하물며 바울과 같은 사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는데, 나처럼 연약하고 쉽게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도록 하자. 바울과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찾아온다. 교만은 우리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치료책은 우리의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왜냐하면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낼 수도 있고, 그분의 뜻에 감사하면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께서 우리의 몸에 가시를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몇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하였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그 때까지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시는 그분의 위로를 받음으로써 견디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우리와 동일한 시험과 고통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시험을 겪었던 사람만이 시험받는 자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대는 지금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고통의 훈련학교에 입학한지도 모른다. 마음을 낮추고 왜 그대에게 이러한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지를 기도해 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71).
5. 고통은 더 나은 봉사를 위해서 온다!
대리 고통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대가 고통과 질병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고통 중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치있는 고통인데,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대리 고통”(vicarious suffering)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모든 면에 있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 종이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고통에 관하여 더 높고 많은 교훈을 배운 사도이었던 것 같다. 다른 제자들은 어려움과 고통을 인내하라고 권면하였지만, 바울은 한걸음 더 나가서 고통의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였다(롬 12:12; 골 1:24). 이러한 면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1).
예수님의 고통은 대리적인 고통이었다. 그분의 고통은 자신의 유익이나 죄로 인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인내하시고 모욕을 당한 것도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분의 전 생애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러한 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고통을 받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다.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웠노라.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3~29).
24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고 말한 바울의 간증을 주목해 보자. 바울은 타인을 위하여 고통을 받았으며, 또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육체에 채웠다. 그의 이러한 소원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바울은 “고난에 참예함과 그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열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생애의 최고의 목표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받다가 죽는 것. 물론, 바울은 고난을 통과하는 자신의 희생이나 공로를 통해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구세주께서 주신 진리와 함께 고통당하기를 원했으며,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했다. 그리스도처럼 자신도 대리적인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경험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원했던 것이다.
고통을 기뻐해야 할 이유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냈던 두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고난을 통하여 어떻게 승화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경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찰 정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바울의 봉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많이 받을수록 시련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동정하실 줄을 배우셨던 것처럼, 바울 역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 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 1:3~7).
여기에서 바울은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받는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이 좀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바울은 고통을 통하여 고통받는 자들의 심정을 좀더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더욱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고통은 봉사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고통을 받으셨던 것이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육체를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를 위한 봉사를 위함이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함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2).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과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8,9).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투병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병자들의 느낌과 절망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셨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히 2:18). 예수께서는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고난의 왕이시며, 또한 위로의 왕이시다.
바울이 그토록 선망했던 것이 바로 이 경험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셨던 그 방법 외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고 은혜스럽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경험을 알게 되기를 소원하였다.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으며, 남겨진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만족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고통은 특권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29,30). 바울은 여기서 고난을 특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특권도 받지만, 그분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 특권도 동시에 받는 것이다. 고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적다. 만일 그대가 고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인하여 당하게 되는 모든 고통 속에서 오히려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낙심하게 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위로해 줄 수도 없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도와줄 수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 중에 있는가?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하나님께서 그대를 더 나은 봉사를 위해서 준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명상해 보라.
6. 고통은 법을 범한 결과 때문에 온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과 질병이 일어나는 다섯가지 이유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이유들은 특별한 경우들이며, 대개, 고통이나 질병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이나 자연법칙들을 범하는 결과로서 온다. 고통이나 질병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 스스로가 그들의 고통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다. 노아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그리고 바로의 군사들이 홍해에서 수장당한 사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과 공의 하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넘칠 때, 멸망이 이르러 온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며 대개의 경우 고통의 원인은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
그러므로 질병이 발생하면 먼저 자신이 율법과 자연 법칙 중에서 어떤 것을 범했는지를 신중하게 살핀 다음에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거나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건전한 상식이자 올바른 신앙 자세이다. 여기서 자연 법칙이란 생명의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복종하면 살고, 범하면 죽게 되는 철칙을 의미한다.
율법이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도덕률을 말하며, 자연 법칙이란, 물고기가 물에서 살면 살고, 물 밖으로 뛰어 나오면 죽는 것과 같은 법칙을 말한다. 고압선을 만지면 죽는다는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고의적으로 전깃줄을 만져서 죽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독버섯을 먹는다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의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경우에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법칙을 지키면,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충실한 종이 되지만,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는 무서운 주인이 된다.
불변하는 자연 법칙
자연 법칙을 어겼다고 해서 항상 즉각적인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몇 년 후에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전혀 그 결과가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어긴 결과를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그것은 항상 결과를 남긴다. 그러므로 자연 법칙은 그것을 어겼을 경우, 그 결과가 지연될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20대에 무엇을 뿌렸다면, 40대 혹은 50대에 가서는 그 결실을 거두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려 놓고서, 그 결과가 생기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헛된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 또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홍해를 갈라놓는 기적을 행사하심으로써, 자연 법칙을 파괴하셨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워놓으신 법칙은 결코 파괴하는 분이 아니다. 공기보다 가벼운 물체는 중력에 의해서 공중에 뜰 수 없다는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그러나 공기보다 훨씬 무거운 보잉 747 점보 제트기가 하늘을 날지 않는가? 비록 공기보다 무거운 쇠덩어리일지라도 그것에 적당한 크기의 날개를 부착하고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를 달려가면 양력을 받아서, 공중에 날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쇠덩어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자연 법칙이 존재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유조선을 조선공학적으로 잘 설계하면 부력을 받아서 바다 위에 뜰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법칙 안에서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간의 어리석은 꾀 안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당신께서 이 우주에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 안에서 자유롭게 기적을 행사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불변하는 율법
하나님의 율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도 결코 변경되거나 폐하여질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를 가리키면서, 이제는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지금도 선언하고 계신다(마 5:17,18). 자연 법칙을 범하였을 경우에 고통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율법을 범하였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데, 성경은 그 대가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에는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 결과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다섯째 계명을 범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용서의 정신이 사라지게 된다. 미움과 원통함이 온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그 결과, 혈압이 올라가고, 심장에 무리가 가며, 갑상선에 이상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서, 결국에는 각종 질병과 고통이 그대를 찾아오게 된다.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한동안 아무런 형벌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간 다음, 그 결과로 인하여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120년을 지낸 후에 갑자기 홍수가 이르러 왔던 것처럼, 쾌락과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는 어떤 특별한 징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죄악의 잔이 차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헤어나오기 어려운 고통과 고뇌의 경험을 갖게 된다.
비록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자연 법칙에 불순종할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결과를 받게 된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수확을 거두게 된다는 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좋은 열매와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유전법칙에 의거하여 병약한 유전인자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을 수 있다. 그들도 사고를 당하고, 불신자들이 걸리는 똑같은 질병에 들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불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질문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자연 법칙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통과 불신자의 고통 사이에 눈에 보이는 어떤 차이가 있다면, 각자가 어떤 반응과 태도를 나타내는가에 있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적용시키는 자연 법칙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의 생애에 다가오는 재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사람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조건적인 영적 원칙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복종함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통하여 고난 속에서도 안정된 마음으로 고난의 끝을 기다릴 수 있으며, 그러한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하여 더욱 더 고결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활용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다거나 자연 법칙에 따라서 받게 되는 고통을 경감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자연 법칙을 적용시키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영적인 원칙을 적용시키고 계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인 법칙에 따라서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고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져 있지만,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오기로 선택하는 사람에게만 조건적으로 제공된다.
그러므로 고통이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그대의 양심과 생활 가운데서 어떤 법칙이 범하여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그대의 죄와 잘못을 지적해 주실 때, 즉시로 회개하고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라. 그리고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맡겨라. 바로 이것이 그대가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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