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면에서 뜻이 깊은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침이 미치지 못함만 못할 수도 있다.
배부름이 배고픔보다 좋지만, 배가 너무 부르면 병이 나게 된다.
속담에 “박색 소박은 없어도 일색소박은 있다.”고 했다.
얼굴이 너무 예쁜 것보다는 못난 편이 낫다는 결론이 된다.
《논어》선진편(先進篇)에 나오는 말인데, 자공(子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사(師: 자장의 이름)와 상(商: 자하의 이름)은 누가 더 어집니까?”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하고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럼 사가 낫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반문하자 공자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라고 말했다.
자장과 자하는 《논어》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퍽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자장은 기상이 활달하고 생각이 진보적인 데 반해,
자하는 만사에 조심을 하며 모든 일을 현실적으로만 생각했다. 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서도,
자장은 천하 사람이 다 형제라는 주의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반해,
자하는 “나만 못한 사람을 친구로 삼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은 굳이
두 사람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원칙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그 지나치다 혹은 미치지 못한다 하는 표준은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중용(中庸)인 것이다.
미치지 못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은 중용이란 말은 다시 시중(時中)이란 말로 표현된다.
시중은 그때그때에 맞게 한다는 뜻이다.
어제의 중용이 오늘의 중용일 수는 없다.
‘이것이 꼭 옳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원불변의 진리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손으로 만져 쥐어 보일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환히 통해 아는 성인이 아니고서는 이 시중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자는 말하기를, “천하도 바로 잡을 수 있고, 벼슬도 사양할 수 있고,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만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과유불급”이란 말과 중용이란 말을 누구나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공자의 이 참뜻을 안 사람은 드물다.
공자를 하늘처럼 받들어 온 선비란 사람들이 고루한 형식주의와 전통에 빠져
시대를 그릇 인도하고 나라를 망치게 한 것도 이 과유불급과 중용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고사 성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