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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쟁탈전 격화
제 1 절 전선상황 요약
1. 개 요
'51년 동계작전은 휴전회담의 진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적의 전력강화를 방해하고, 진지를 공고히 하는 것에 대한 방해수준의 제한적 전초진지 작전이 벌어졌다.
'51. 12.28~'52.1.8일 간에 국군 제1사단이 서부전선 사미천 우측의 두매리 철모고지 일대에서 전투와, '51.12.25일을 전후하여 어은산 일대의 중공군 제204사단이 백석산 북방의 국군 제7사단 최북단 전초기지인 1090고지(북) 부근 무명고지에 공격을 가해왔다.
'52. 춘계작전은 휴전협상이 계속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쌍방이 대규모 공격작전을 보류하고 계속 정찰과 기습을 통하여 적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전투가 사천강 부근의 전투로서, 국군 제1해병연대가 '52. 3월 17일 동부전선에서 이동하여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중공군 제195사단과 '52. 4. 1일~5일어간에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또한 중부전선의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 제31사단 및 제35사단 일부와 '52. 4.16~17일 어간에 교암산 동북방 575고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사단이 '52. 1. 12일 제6사단으로부터 미 제9군단의 우익으로서 게리선 상의 949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북한강 연안 동서지역에 들어와, 662고지에서 '52. 2. 15~16일까지 중공군 제35사단 제104연대와 제203사단 제607.609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52. 5월 12일, 미국 정부는 클라크 대장을 휴전문제 해결을 위한 최적임자로 신임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임명되면서 "승리가 아니고 조속한 휴전을 실현시킨은데 노력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유엔군 사령관은 바뀌었지만 완전한 승리를 추구하지 않는 전쟁 양상은 그대로 지속 되었다. 전선은 교착된 채 쌍방은 상대방을 서로 자극하는 대규모 작전은 피하고 전 전선에서 진지보강에 주력하였다.
이때 공산군측은 군사력이 크게 개선되어 병력이 전선에 29만명, 후방에 62만명 등 91만 명을 보유하게 되고 이중에중공군이 63만 명이었다. 휴전 회담이 개시된 이래 두 배로 증가한 것이다. 더욱 달라진 것은 포병화력이 증가하는데 '52. 4월에 710문의 포가 6월에 884문으로 증가하고, 전차와 자주포는 '52. 7월 현재 520대로 3개의 기갑사단이 전선에 배치되고 만주에 항공기 1,250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유엔군은 전선에 25만 명, 후방에 45만 명을 포함하여 70만 명이었다. 이에 따라 병력과 징비의 보충이 요구되었지만 당시의 유엔군 당사자국의 반ㅇ전 운동등과 맞물려 더 이상의 병력 증원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52. 8월까지는 유엔군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격적인 입장에 있었다. 이 기간에 유엔군은 에리고지, 포크잡고지, 불모고지 등에 대한 제한공격을 실시하면서 일부 전초선을 전방으로 추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9월에 들어서 공산군은 수색정찰을 강화하면서 전 전선에 걸쳐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특히 중부전선에 9월 6일, 중공군이 수도사단이 확보 중인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탈취하기 위해 공격하고, 9월 말경 국군 제2군단이 담당하고 있는 모든 전선에서 확대된 공세를 취하게 되며 작전 주도권이 공산군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52. 6월 초에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지역에서 소규모 제한공격인 소위 "카운터 작전"을 실시하여 미 제45사단이 진지정면의 주요 감제고지를 점하고 있는 적의 전초들을 탈취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였다.
그 작전의 결과 아군은 역고천 북안의 백마고지(395), 화살머리고지(281), 티본고지(290), 불모고지(266) 등 11개 목표를 장악하여 전초진지를 강화하였다.
이후 적의 역습이 전 전선에서 시작됨에 따라 중요 전초진지 쟁탈전이 계속되면서 주진지의 변동이 없는 가운데 보다 유리한 전초진지를 장악하여 각기 방어태세를 강화하는데 주안이 있었다.
1952년 4월 전선 상황도
신계
이천
북1군
사리원 시변리 575고지 국5
중39군 중42군 평강 금성 ↓ 중12군 662고지 북3군
중15군 ● ↓ 중68군 북2군 국11
미45사 ● ●x-머스고지
국9 미7 미40 국6 수도사 국3 국7 미25 국8
금천 중64군 국1사 김화 미10군=국1군
중65군 중63군 국2군=미10군
영1사 철원 화천 양구
개성 ● 고랑포 동두천 미9군=국2군 인제
● 두매리고지 포천 춘천
사천강 문산 미1해병 미1군=미9군 가평
부근전초진지
1952년 후반기 전선 상황
신계
이천
북1군
사리원 시변리 575고지 국5
중38군 평강 금성 ↓ 중12군 662고지 북3군
중15군 ● ↓ 중68군 국11
●백마 ●저격 ●수도● 지형 ● ● x-머스고지
국9 미7 국2 국6 수도사 국3 국7 미25 국8
금천 중39군 미2사 김화 미10군=국1군
중65군 중40군 미3 국1사 국2군=미10군
영1사 철원 화천 양구 미45사
개성 ● 고랑포 동두천 미9군=국2군 인제
● 두매리고지 포천 춘천
사천강 문산 미1해병 미1군=미9군 가평
부근전초진지 미40사
1952년 후반 아군과 공산군의 전선 부대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7월초 아군은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이 미 해병 제1사단(국 제1해병연대 배속, 국군 제1사는 '52.7.6~8.1까지 후방지역 공비토벌 참가). 영연방 제1. 미 제3. 미 제2사단으로 개성 서남방의 서해안으로부터 철원 서북방까지 담당하였다.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국 제9. 미 제7. 국 제2. 미 제40사단(예비)으로 금성 방면을, 그 우측에 국군 제2군단이 국6. 수도사. 국3사단으로 화천 전방의 주저항선을 담당하였다. (미제1기병사단은 일본에 대기 중)
중동부전선에는 미 제10군단이 국7. 미 제25. 국8. 미 제45(예비)로 양구 북방을, 그리고 동해안에는 국군 제1군단이 국11. 국5사이 방어하게 하였다.
그후에 군단내에서 부대이동이 실시되어 9월 27일에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제8사단이 미 제45과 교대하여 부대교육에 임하고, 10월 2일 미 제1군단 예하 국군 제1사단이 공비토벌작전에서 복귀하여 미 제3사단과 교대하여 전선에 복귀하게 된다. 또한 동월 25일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25사단이 미 제40사단과 교대되고 제25사는 예비가 되었다.
반면 공산군은 7월 초 서부전선에는 중공군 제65. 63. 40. 39군 등 4개 군이 배치되고, 중서부전선에는 중공군 제39. 38. 15군이 , 중동부전선에는 중공군 제68군과 북한군 제2군단(제13.27사)이, 동부전선에는 북한군 제3군단(제45. 15 1사)과 제1군단 예하 제47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2. 피아의 군사력 증강
가. 공산군의 군사력 증강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서 공산군측은 전력을 계속 증강하여 '52. 7월 초에 91만이던 병력이 100만을 넘어섰다. 병력뿐만 아니라 포병화력도 대폭 증강되어 '52 4월에 710문이던 야포가 6월 말에는 884문으로 늘었고 포탄 사격능력이 일일 8,000발에서 43,000발로 증가되었고, '52년 말까지 고사포도 소련으로부터 10개 대대의 장비를 보충받았다.
개요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전차 및 자주포의 증강 그리고 공군력은 총 500대에서 1,250대로 늘어나 북한 상공에 출현하는 아군기에 도전해 오게 되었는데 이는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요구한 것을 대부분 받아 주어 전력이 증강되었다.
군수 보급체계도 보완되어 일일 병사 1명이 800~1,000그램의 식량 보급이 가능한 상태로 5~10일 작전지속이 가능한 정도로 향상되었다.
나. 유엔군의 전력 재정비와 국군의 전력 향상
정부는 '52년 초부터 휴전과 관련하여 유엔군의 철수 등 제반사항을 검토하여 국군의 증강이 신중하게 추진되었다. '52. 4월 5일 제2군단이 재창설한 데 이어 육군의 규모가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 안은 이미 '51. 4월에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만 대통령에게 제시한 바 있으며 당시는 미 합참의 반대로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지지하고, '52. 5월에 새로 부임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대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사령관은 앞으로 전체 실링은 20개 사단을 위해 소요되는 숫자로 증가되어애 한다고 건의 하였다. 그 숫자는 655,000명이 되었다.
국군의 전력증강과 관련하여 유엔군사령관은 먼저 6월 19일 국군의 실링을 종전의 250,000명에서 363,000명으로 상향 조정할 복안 하에 군증원병력 92,000명과 추가로 경찰의 치안유지를 보강하기 위해 6개의 경보병연대 병력 9,458명에 대해 즉각 승인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4일 후인 6월 23일 전선상황을 고려한 벤플리트와의 협상 이후에 한국군 육군 사단 2개 사단을 추가로 창설함과 더불어 병력을 415,046명으로 확장 할 것을 건의 하였다.
이러한 국군의 전력증강은 한국내 정부에서도 검토가 이루어지고, 카튜사의 정원을 27,000명(미 7개 사단과 영연방 사단에 각2,500명, 기타 전투지원 부대에 7,000명)으로 증강시키는 안 등이 복합적으로 검토되어 미 합참은 공군은 종전 수준으로 당분간 유지하고 육군 및 해병대의 실링을 463,000명으로 책정하여 9월 하순 국방부에 제출하고, 10월 30일 미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11월 말부터 사단을 증편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국공군은 4천의 병력과 F-51 17대, 기타 정찰기, 수송기 및 훈련기 29대를 보유했고, 해군은 1만 6처늬 병력과 50여척의 정찰정, 소해정, 상륙용주정을 보유했다.
해병대는 '52.10. 1일 제1연대의 지원부대를 통합하여 해병제1연대전투단을 창설하고 도서부대를 꾸준히 발전시켜 연대규모로 증강하였다.
육군은 국군의 증강안에 따라 10월 말 제12사, 제15사단과 6개의 독립연대의 창설에 착수하여, 12월 말에 제12사단과 3개 연대(제53.55.56연대)는 작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제15사단과 나머지 3개 연대(제57. 58. 59연대)는 이듬 해 1월까지 전선투입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육군은 이미 '52. 4월 28일에 3개의 경장비연대(제37.38.39연대)를 창설하여 제38.39연대는 포로수용소 경비에 임하고 제37연대는 독립연대로 전방의 미 제9군단 예비로 활용되었다. 이어 6월 13일 같은 성격의 3개 연대(제50. 51. 52연대)를 창설하여 제51. 제52연대는 독립연대로 각각 미 제1군단과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실전훈련을 쌓는 중이었다.
그러던중 10월 30일 2개 사단의 증편이 확정되자 제12사단은 제53. 55. 56연대를, 제15사단은 제57. 58. 59연대를 임시로 배속받아 자체의 부대 편성과 훈련에 돌입하였다.
이어 제12사단은, 제37. 51. 52연대가 중장비연대로 개편이 완료됨에 다라 12월 10일부 동 사단의 정식 건제부대로 편입되어 제9군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12월 27일 전선으로 투입되어, 미 제10군단 전선으로 들어가 미 제40사단의 진지를 인수하게 된다. 이 무렵 제15사단은 제38. 39. 50연대로 개편되고, 11월 8일 신편되는 연대들은 다른 사단의 기간으로 전용되었다.
한편, 클라크 대장은 한국군의 12개 사단 증편안은 임시변통에 불과하고 '53. 8월까지는 20개 사단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합참에 건의하였으며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국군은 증강되게 된다.
보병과 마찬가지로 포병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게 된다. 미 합참은 한국내의 도로와 지형을 고려 국군 1개 사단에 105mm 1개 대대만을 보유토록 하였으나(미군은 105mm 3개 대대, 155mm 1개 대대 보유) '52. 5. 27일 사단당 105mm 3개 대대와 155mm 1개 대대를 보유토록 결정하여 이에 따라 육군은 이미 지난해에 창설을 한 4개의 155mm 독립포병대대(제96.97.98.99대대)에 이어, 6월 14일 4개 대대(제91.92.93.95대대)를 증편하였다. 그리고 1월부터 시작한 2개의 105mm대대로 구성되는 포병단의 창설에 박차를 가하여 12개의 포병단(제1.2.3.5.6.7.8.9.10.11.12.15포병단)을 창설하였다.
이들 포병들은 미 제5포병단에서 포병 종합훈련(RSOP)을 마치고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각 사단에 3개의 105mm포병대대와 1개의 1555mm 포병대대로 편제되었다. 이들은 '53년 1월부터 사단 포병단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전차부대는 '51년 2개 전차중대에서 '52년에 6개 전차중대로 증강된다.
3. 피아의 작전 계획
가. 공산군측 작전계획
휴전회담을 빌미로 전 전선의 유개화와 비행장의 보수, 파괴된 철로의 복구와 더불어 병력을 증강하고 특히 포병과 대전차 무기를 획기적으로 증강시킨 공산군은 '52년 하반기에 제1선에 7개 군단이 포진하였다.
(1) 중공군 배치
제19병단 예하의 제65. 40. 39군단이 예성강 하구, 구하리, 마량산, 상포방 지역을 담당하고 제63군이 예비로서 그 후방지역에 위치했다. 제3병단의 예하 제38. 제15군이 장군동-효성산-서방산-충현산 지역을 담당하고 예비로 제60군단이 곡산부근에 위치했다. 제20병단 예하의 제12. 68군이 아심리. 금성. 문등리 북한강 동서지역에 배치되고, 제67군단이 예비로 세포리와 회양지역에 배치되었다.
(2) 북한군 배치
제3군단과 제1군단이 논리-응봉-사기점에서 동해안 포외진리에 이르는 지역을 담당하고 다른 4개 연대가 고성, 통천 지역 해안방어 임무를 담당하였다. 북한군 전선사령부 예비대로 제2군단이 봉현리, 화천리 지역에 주둔하고, 서해안 사령부 예하의 북한군 제4군단이 용암포에서 해주 지역까지 해안방어 임무를 담당했다.
중공군 제9병단이 담당하던 동해안연합사령부 예하의 중공군 제20. 27군단과 북한군 제7. 5군단이 고저. 원산. 퇴조 지역의 해안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이밖에 중공군 제47군단이 강동. 성천 지역에 주둔하며 총예비대의 역할을 담당했다.
(3) 작전계획
반격개시 시간은 9월 20일부터 10월 20일 사이로, 각 군단별 3~5개의 유리한 목표를 설정하여 연속 반격을 전개하여 대량의 적을 살상하도록 계획하고 이를 위해 다음 4가지를 강조했다.
(가) 반드시 준비가 철저한 상태에서 공격하라. 이를 위해 반복적인 정찰을 실시하고 정예병력을 투입하여 적의 측후방을 관찰하고 전투력 위치를 분석하여 주공 방향(가능한 측후방공격)을 선정하되 반드시 제2제대가 제1제대를 바짝 따라야 한다.
(나) 전투 중 보병과 포병의 합동작전이 승부의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그래서 반드시 주도면밀한 합동작전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다) 각 군단에서는 모두 일정 수량의 탱크가 배속되어야 한다.
(라) 공격이 성공한 후 반드시 적의 연속 타격을 격퇴할 준비와 반복적인 공방전을 며칠 더 전개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이와같은 강조사항에 입각하여 공산군은 '52. 9. 18일부터 10월 5일까지 1단계, 제2단계는 10.6일부터 31일까지였다.
나. 유엔군측 작전계획
1952년도 전선은 수색 및 정찰전, 간헐적인 포격전, 그리고 유엔공군에 의한 차단작전을 제외하고는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51년 동계작전은 휴전회담의 진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적의 전력강화를 방해하고, 진지를 공고히 하는 것에 대한 방해수준의 제한적 전초진지 작전이 벌어졌다.
'51. 12.28~'52.1.8일 간에 국군 제1사단이 서부전선 사미천 우측의 두메리 철모고지 일대에서, '51.12.25일을 전후하여 어은산 일대의 국군 제7사단이 최북단 전초기지인 1090고지(북) 부근 무명고지에 전투를 했다.
'52. 춘계작전은, 사천강 부근의 전투로서, 국군 제1해병연대가 '52. 4. 1일~5일어간에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또한 중부전선의 국군 제6사단이 '52. 4.16~17일 어간에 교암산 동북방 575고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사단이 662고지에서 '52. 2. 15~16일까지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52. 5월 12일, 미국 정부는 클라크 대장을 휴전문제 해결을 위한 최적임자로 신임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임명되면서 "승리가 아니고 조속한 휴전을 실현시킨은데 노력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리지웨이 전임사령관은 '52. 5. 12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전임되고 그 후임으로 클라크 대장이 신임 유네군사령관이 되었으며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 진주군사령관직을 역임한 바 있으며 그때 소련측과 2년간에 걸쳐 협상경험을 가졌던 장군이다.
클라크는 판문점회담이 돌파구를 타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52. 10월 초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즈에게 조속한 휴전회담 성립을 위해서는 군사적 압력의 필요성과 그에 따르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건의했으나 미국정부는 휴전회담을 통한 전쟁 종격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작전계획
공산군측이 '52. 9. 28일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안을 거부함과 아울러 미 합참은 지상공세작전이 아닌 공중작전을 통한 군사적 압력을 늦추지말라고 지시했다.
이에 벤플리트 장군은 김화북방의 "철의 삼각지" 고지군을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계속되는 적의 국지적인 공세에 겨울이 오기전 진지를 개선하려는 의도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현재의 작전주도권을 공산군측이 갔고 있다고 전제하에 "현 사태를 역전시키고 적으로 하여금 수세를 취하도록 소규모 공격작전으로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매우 요망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 판단하에 밴플리트 장군은 소규모 공격작전으로 "쇼다운 작전(Operation Showdown)"을 계획했다.(미 제1군단은 '52. 8월에 소위 카운터 작전을 실시하여 역곡천변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여 적의 역습을 받아 고지쟁탈전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 제8군이 계획한 "쇼다운 작전"을 실시 하기 전에 중공군이 먼저 추계공세를 개시했다. 국군 제2군단이 방어중인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미 제9군단 정면의 백마고지, 글리고 미 제1군단 정면의 니키고지와 텟시 고지 등 일제히 집중됨으로서 전 전선에서 격전이 재현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의 추계공세를 맞아 이를 물리치는 한편, 미 제9군단은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준비시켰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은 서부전선에서 방어를, 중동부 전선에서 공격을 수행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제 2 절 임진강-역곡천 부근 전투
1. 개요
임진강-역곡천 부근 전투는 '52. 7월부터 12월까지 서부전선 미 제1군단이 중공군 3개군단(제65.40.39군단)과 전초진지 및 주요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고지쟁탈전이다.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1군단은 '52. 7월 중순, 미 제9군단으로부터 미 제2사단을 배속받고 미 제45사단을 미 제10군단으로 전환조치했다. 이에 따라 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국1해병연 배속), 영연방 제1사, 국군 제1사, 미 제2사단순으로 임진강하구에서 철원에 이르는 전선에 배치하고 미 제3사단을 예비로 하였다.
공산군은 전술적 반격계획에 따라 추계공세를 준비하여 9월 18일부터 10월 5일까지 1단계작전을, 제2단계는 10. 6일부터 31일까지 실시할 계획이었다.
미 제1군단은 지난달까지 미 제45사단이 수위 "카운터 작전"을 전개하여 철원 서쪽 역곡천변의 주요고지를 확보한 뒤로 적의 역습에 고지쟁탈전을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미 제1해병사단이 벙커고지에서, 미 제2사단이 불모고지 일대에서, 국군 제1해병연대가 사천강 일대 전초기지에서, 국군 제1사단이 테시와 닉키 양 고지에서 쟁탈전에 이어 베티와 노리 고지에서 쟁탈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불모고지, 포크찹고지, 티본고지 일대의 전투는 7월 중순 미 제2사단이 진지를 미 제45사로부터 인수한 이후에 여름내내 전투가 게속되었다. 특히 포크찹고지는 미 제2사단에 배속된 태국군 대대가 11월 1일부터 11일까지 중공군 2개 연대의 공격을 격퇴하여 "리틀 호랑이 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반면 임진강 일대에서는 장마로 인하여 7월까지 비교적 소강상태로 유지되었으나 장마가 끝나자 전초진지에서 전투가 시작되어 8월에는 미 해병대가 벙커고지를 사수하고, 9월에는 사천강변에서 국군 제1해병연대가 11월 초까지 격전이 계속 되었다.
이 기간 임진강 북방 고왕산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캐나다 제25여단이 중공군의 기습으로 한때 위기를 맞았으나 돌격부대의 역습으로 위기를 넘기고, 미 제3사단은 9월에 켈리전초를 적에게 넘기고 군단예비였던 국군 제사단과 교대되었다.
10월에 들어서, 공산군 추계 2단계 공세가 이어지는 가운데10월를 맞아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미 제2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화살머리고지에서, 우인접에서는 백마고지에서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과 , 국군 제1사단은 고양대 부근에서, 국군 제1해병연대는 사천강에서 격전을 치렀다.
11월은 대체로 소강상태였으나, 12월 초에 국군 제1사단이 노리고지 및 베티고지에서 적을 격퇴하면서 전 전서는 쟁탈전이 반복되는 가운데 주진지는 큰 변동이 없었다.
2. 전투 경과
가. 벙커고지 전투
대덕산(236) *120 *110
*요크고지 *123
벙커고지(122) 58A 48A
56A 52
*124 3대대 2대대 50
판문점
백학산(229)
'52년 7월 초, 미 제1군단의 좌익으로 김포-판문점-사미천에 이르는 진지를 방어하게 된 미 제1해병사단은 8월까지 국해1연대를 사천강-판문점에 배치하고 예하 3개 연대는 주기적으로 부대교대를 실시하며 판문점-사미천 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 해병1연대 지역인 전초기지인 벙커고지(122). 58고지. 56고지가 격전장이 되었다.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40군 예하 제194사단 제180연대가 전개하고 있었으며, '52. 8. 9일 01 : 00시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58고지 일대로 밀어붙여 피탈되었다. 두번에 걸친 역습으로 이날 아침에 재탈환했으나 적의 재역습에 피탈되었다. 그러나 다시 역습에 역습을 거듭하며 결국 적에게 내주고 그 서남방 122고지(벙커고지)를 전초기지로 선정하고 8월 11일 기습을 감행하여 새벽녁에 탈환하였다.
그러나 122고지를 탈환하여 노무자(KSC)까지 동원하여 진지 공사를 하였으나 적의 재역습에 결국 내어주고 물러났다. 다시 재역습으로 탈환하기를 반복하며 벙커고지 일원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8월 9일부터 16일까지 적의 7차례에 걸친 침공을 격퇴하고 전초진지를 지키어 주진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벙커고지 부근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적 사살 570명, 부상 1,500명의 전과를 달성한 반면 아군 전사 92명, 부상 659며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
가-1) :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 비무장지대로 활동제한
나. 사천강전투
사천강
칠정동
국해1연 미해7연
*87 덕산리 외촌
소대
소대 방축동
덕물산 288 *58 1/10소대 원당리
*36 2/10소대 *155
서장리 *45 3/10소대
천덕산 203 등장리 HB소대 문산
사천강 주촌 임진강
1개소대 칠정동
군장산 278
여니산 241 사천강 1개 소대
미 해병 제1사단이 판문점 동남방 임진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에 사단의 좌익 사천강에서는 국군 제1해병연대가 지난 4월에 이어 재차 격전이 벌어졌다.
국해1연대는 '52. 3월 중순 이래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익으로 임진강구에서 판문점 남쪽까지 11km 주저항선과 김포반도 방어를 담당하여 2개 대대를 사천강 동쪽에 1개 대대는 예비로 확보하는 한편, 김포반도에 1개 대대를 전개하고 있었다.
연대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65군으로 제194사단 제582연대와 제195사단 584연대였으며 중공군이 '52. 9월 6일 18:00시에 전초진지에 포탄을 집중하면서 증강된 1개 중대 규모가 사천강을 도하하여 10중대의 전초기지를 포위하였다. 당시 도하작전간에 적은 전차와 자주포가 대안에 출현하여 도하부대를 엄호하였다.
당시 아군 전초기지는 적의 감제하에 있기 때문에 화기엄체호와 개인호, 포진지 등을 모두 이중으로 구축하여 포격에 견딜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도하한 적이 혼비고지(36고지)을 포위하여 진내로 일부가 진입, 피아간에 총검의 육박전이 벌어지고 아군의 진내사격 요청으로 적은 혼비백산하여 물러났다. 이렇게 하여 "혼비고지(36고지)"가 되었다.
이후에 적은 다시 9월 19일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주간에 기만작전까지 하면서 재 공격을 가해왔다. 고지 쟁탈전이 반복되면서 국군과 미 해병은 전폭기까지 동원하여 적의 진출을 억재하여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다시 적은 10월 초에도 공격을 해왔고 31일에도 전례없이 강력한 집중포격 후에 강습하여 일시적 피탈되었으나 과감한 역습으로 재탈환하여 고수하였다. 그동안 전투에서 약 1,550명의 적을 사살하고, 아군은 전사 66명에 부상262명의 피해를 입었다.
나-1) :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혼비고지 36고지(도라관측소에서 관측이 가능) : 1개소대가 휴전무렵 적에게 피탈되면서 엄체호 안에 매몰되었다고 증언
나) 칠정동, 정동리, 석곶리 일대 탐사
이 지역은 미확인 지뢰지대다. 하지만 이곳을 방어중인 국군 제1사단과 협조하 방탄조끼를 입고 일대를 탐사했다. 탐사는 대성동 자유마을 분이 제보한 것에 기초했다. 본인이 전쟁 직후에 이 일대에서 사냥을 했다는 것과 많은 유해를 목격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지형분석을 통해서 탐사를 구역별로 일정구간 진행했다.
전지역이 구릉형 야산으로 높지도 않고 평탄지다. 그런 곳에 개인호나 포탄 탄흔으로 형성된 호가 상당헤 분포되어 있다.
전방GP밖에서 실시되는 탐사는 정말 긴장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유해발굴 완장을 차고 몇번 드나들며 내심 북한군도 우리를 보면 쓸데없는 짓은 안하리라 믿으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탄흔과 가매장 흔적은 있지만 기초굴토는 하지 않았다. 잘못 하면 지뢰를 건드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노상리, 백연리 일대 탐사
결과부터 말하면 노상리 일대에서 '11년도에 18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높지도 않은 야산 구릉에 호가 대량으로 형성되고 그곳에서 많이 목격했다는 제보다. 아마도 이곳은 '51~'52년 전투가 아니라 개전초기에 임진강을 철수하지 못한 국군 제1사단 병력이 최후까지 버티다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판단 된다.
제보자 인적사항은 밝히기 못했다. 이유는 대성동 마을 분인데 인적사항은 물어보지 말고 기록에 남기지도 말라했다. 다만 우리 차에 동승하여 본인이 사냥하러 다닌 곳은 모두 다니며 그 실태를 알려주었다. 사냥도 본인이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원하는 고위직이 있어 묵시적 협조하에 워낙 총을 잘 쏘아 쉽게 이야기하면 팔려다니며 멧돼지나 여우등을 잡아주곤 하고 돈을 챙겼다고 한다.
라) 해병대 참전용사님 증언('15)
1) 오영환(제1-11중대-3소대)
'52년 말 경 장단역 전투간 전초임무를 받고 36고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을 대에 중공군과 혈전이 계속되는과정에 인접 소대인 제2소대의 피해가 컸다.
2)심수인
'52. 10. 3일 경기 장단 일대에 수많은 아군 사상자들이 임진강변에 널려 있었으며 희생된 중대원도 80여 명이다.
3)여태호
52. 10. 1일 장단역 1.5km의 36독립고지 한 구덩이에 10여 명이사의 전사자 신분증, 사진, 인식표 등을 매장했다.
라) 판문점 옆 어룡리 일대 탐사
바로 앞에 북한군 경비초소가 보이는 곳에서 나는 탐사를 했다. 해병대 참전용사님이 지금 판문점 바로 우측 옆에 있는 벙커에서 1개분대가 중공군 포격으로 폭삭하여 전원 수습하지 못하고 현장에 가매장하고 철수해야했다고 증언을 해주었다. 이 벙커는 종전 후에 미군이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관리했는데 주변을 보완하고 보강하는 과정에 유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제한된 수색정찰로를 따라 탐사결과 포탄 탄흔이 개인호보다 훨신 많았고 아직도 유품들은 여기저기 목격되고 있었다.
다. 불모고지 부근 전투
효성산
내석교 역곡천 역곡천 백마고지
395
화살머리고지1/9연
역곡천 281 미1군단 미9군단
*290
티본고지
*265 *191 아스널 *324 9연(-)
*187 *에리고지 *야월산
23연 9연
*255 포크찹고지 천덕산
*275 불모고지 *347 1/23연
2/23연 타이대대
미3 미2
미 제9군단 예비로 있다 미 제1군단으로 배속된 미 제2사단은 '52. 7. 17일, 미 제45사단과 교대하여 덕은동-281고지 일대의 역곡천 남쪽 주진지 및 전초진지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미 제2사는 제23연대(프랑스 대대 배속)를 좌전방 역곡천 동안 진지에, 제9연대(타이대대 배속)를 우전방 동광리 동쪽 천덕산 일대에 배치하고, 제38연대 3대대와 네덜란드 대대(배속)를 예비로 확보했다.
당초 미 제45사단은 6월의 카운터 작전으로 역곡천 남안의 적을 격퇴하고 유리한 전초진지를 확보했으나 이를 되찾으려는 적의 역습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불모고지가 강 남안의 주요감제고지로서 가장 전투가 치열했다.
중공군 제38군 제113사단 제338. 339연대와 제117사단 제349. 제350연대 및 제115사단 제344연대를 전선에 배치하고 포병 10개 대대 이상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적은 아군의 부대 교대를 틈타 7월 17일에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불모고지(제23-F중대)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18일 적에게 피탈되고, 다시 역습부대를 투입하여 전차의 역습을 실시했으나 적의 집중적인 포화에 역습은 실패하고 , 특히 B중대의 경우 20여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7월 19일, 계속되는 역습이 실패하는 가운데 부대교대가 완료되고 제23-1대대의 "리틀 조"라고 명명된 반격적전 훈련이 계속되는 강우속에서도 지속되었다.
마침내 7월 31일, 비가 개이자 공격을 개시하여 09:10분에 백병전으로 고지를 탈환하여 진지 보강작업속에 적의 지속적인 침투를 막아내고 있었다.
다-1) :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타문결과
가)진명산 일대(연천 신서면 부흥리 일대와 중면 덕은골 전방 지역)
불모고지 일대는 비무장지대 안으로 탐사나 발굴은 제한되었다. 다만 현 GOP철책선 바로 남쪽일대가 300고지군으로 엄청난 개인호와 포탄 탄흔, 비행기 폭격 탄흔이 너부러져 있다. 미확인 지뢰지대를 홈코트 작업으로 지뢰를 식별하여 제거하고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이곳은 '52년도 전투가 아니라 '51년도 추계작전시 미 제1군단의 역곡천변으로 끌어올리기 작전으로 제임스타운선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시 전투지역이다.
나)에리고지 탐사
현 국군 제5사단 책임지역으로 비무장지대다. 비무장지대를 수색정찰하던 수색대대장의 제보로 많은 유해가 정찰로상에 있다는 제보로 완전무장을 하고 직접 들어가 탐사를 했다. 이곳은 어느 지역은 우리 국역이 적지역보다 북측에 위치하는 위험한 지역이다.
"고지는 유개화되어 있고 무너져 있지만 누구도 작업을 할 수가 없다. 3중으로 철조망이 둘러있고 그 안으로 수색로가 있다. 통문을 통과하여 수색대원의 호위속에 진출하는 과정에 당시 면사무소 자리로 있고 떡방아간과 기계가 녹슬어 있는 모습도 봤다."
라. 고양대 . 임진강 부근 전투
*117
*대노리고지
*소노리고지(1개소대) 15연 12연
고장리 10중대
*닉키고지 *69(1개소대)
*텟시
고양대 *버들고지(1개소대)
*105 *베티고지 임진강
마량산(315) 10중대
영1사 국1사 1대대 2대대 임진강
국군 제1사단은 불모고지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52. 10. 1일, 군단 예비에서 군단 중앙의 미 제3사단 작전임무를 인수하여, 좌로는 영연방 제1사단, 우로는 미 제2사단과 병행하여 임진강 동서안, 역곡천 남안의 주저항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사단장 박임항 준장은 제15연대를 좌전방, 제12연대를 우전방, 제11연대를 예비로 제임스선상의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텟시(150), 닉키(130), 소노리(110), 199고지, 250고지, 168고지 일대의 전초진지를 점령하였다.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39군 제116사단으로서 거의 국부군의 투항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이 부대교대한지 1주일만에 '52. 10. 6일 제348연대 제2대대가 텟시와 닉키고지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공격준비사격에 준비된 진지가 파괴되어 가고, 이에 따라 전초소대가 동굴속으로 들어가고 적이 투항을 강요하는 가운데 10월 8일 연대수색중대가 양 고지로 역습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단은 포병지원사격과 F-80전폭기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배속받은 제11연대 제10중대까지 투입하며 고지위의 중공군을 타격했지만 고지 탈환에 실패하였다. 따라서 제15연대는 3일간의 혈전에도 불구하고 전초진지인 텟시. 닉키고지를 피탈된 가운데 역습을 중지하고 그 남쪽 약 500m 지점의 105고지-베티고지 선에 전초기지를 새로이 편성하였다.
이후 제11연대가 전방에 투입되고 제15연대는 예비로 사단의 후방과 주보급로 경계를 담당하였다. 이후 11월에 다시 제15연대가 전방에 투입되고 적도 부대교대를 하여 중공군 제47군 예하 제140. 141사단이 대치하고 제139사단은 예비가 되었다.
12월 11일, 오랜 침묵을 깨고 01:00시에 소노리고지와 대노리고지 방향으로 공격을 해와 소노리고지는 피탈되고 베티고지만 고수한 가운데 소노리고지에 대한 역습작전이 실패하고 여기에 제11연대가 투입되어 계속적으로 역습을 개시헤 된다.
국군 제1-11연대의 역습은 12개 포병대대의 포병지원과 B-26공군기 6대가 목표지점을 폭격하면서 제11-3-9중대의 역습이 진행되어 결국 대노리고지는 피탈되고 소노리고지를 탈환하여 진지강화를 하게 된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 비무장지대 및 북한지역으로 제한, 참전용사 증언 일부 수록
가)참전용사 증언
(1) "야, 영옥아 나다" : 하병렬 당시 소대장(제1-11-1-3중대, '53.6월)의 오열
베티고지 동쪽, 임진강변에 밥풀고지가 있다. 바로 그 위가 소노리고지다. 베테고지전투의 김만술 소위 신화도 할 말이 많은 분이 바로 하병렬 소대장(예비역 대위, 얼마전 사망)이다. 전쟁다운 전쟁은 본인과 소대원들이 했고 모두가 전사상자가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가운데 김소위가 왔고 이걸 미군이 바로 그때와서 보고 상부에 보고하여 얻어진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라한다. 사실 이미 전쟁은 끝났다. 중공군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는데---(본인은 후송)
이곳 일대는 '53.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전초진지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대노리고지는 이미 전에 피탈되었고 '53.6.23일 중공군이 대노리고지에서 소노리고지로 공격을 해왔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이문세 상사외 11명을 남기고 그 밑의 밥풀고지로 철수했다. 그런다 24일 재역습으로 소노리고지를 탈환했는데 이문세를 찾아보니 모두 땅굴속에 매장되어 있는데 추측건데 중공군이 땅굴 속에 파괴통을 투척하여 매장된 것으로 판단했다.
나는 적어도 세번은 태풍전망대, 그리고 군포 산본의 하선배님 아파트에 찾아가 대면으로 당시 실상을 인터뷰했다. 지금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밥풀고지 바로 위 강변에 웅덩이가 있는데 바로 그 위가 소노리고지이고 그곳에 이상사와 11명이 묻혔다며 본인이 죽더라도 나에게 꼭 발굴해 달라고 당부하셨는데 얼마전에 작고 하였다.
(2) 베티고지 근방의 탐사
나는 베티고지 일대를 탐사하러 해당 제28사단과 협조하에 최 근방 비무장지대를 들어가 주변을 탐색했다. 비록 미확인 지뢰지대라 제한적이었지만 눈탐색으로 용사님들의 충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당시의 많은 유해들은 삼곶리 일대 강변에서 아마도 화장되어 자가봉송 된 것으로 판단된다. 제37사단을 역임한 분이 중대장 시절에 전방도로를 확장하는 가운데 엄청 많은 유해가 나와 처리했다(당시는 무명인으로 인근에 가매장 되고, 일부 군인으로 판명된분은 무명용사로 화장되어 현충원에 보내짐)는 제보도 직접 들었다.
이 베티고지 일대는 정말 구릉성 진지로 평탄하여 적의 전차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고 그래서 당시에도 엄청난 화력이 솓아졌다고 했다. 사실 이 일대는 아무데나 굴토하면 유품은 나오는데 과연 발굴되는 유해는 국군인지 중공군인지는 애매하게 된다. 비록 마지막에 우리가 전초진지를 사수는 못했지만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곳이다.
GP에서 동료를 살해하고 북으로 월북한 곳이 바로 베티고지 맞은편, 그러니까 임진강 동안에 있다. 벌써 이곳은 두번째의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과연 그 사건의 인연은 어디서 이어질까---,
비무장 지대에 백골이 나타나 직접 들어가 수습하여 GOP철책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어느날 제28사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비무장지대 수색정찰 중에 해골이 수풀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방탄조끼를 입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좌측 강건너에 베티고지다. 임진강이 옆에서 흐르는데 정말 떨렸다. 혹시 북한군이 물속에서 나타나 나를 잡아당기면---
들어가면서 강변을 살피니 무수히 많은 탄흔이 보인다. 분명 저 곳에 누군가는 있다고 믿어지지만 지뢰라는 살아있는 무기앞에 삽질을 할 수가 없었다. 신고된 장소로 안내받아 가 보니 해골이 완전히 백태가 되어 있다. 아마도 수해로 묻혔던 유해의 일부가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다른 유품이 없으니 무명용사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수습하여 밖으로 나와 일단 해당 부대에 양지바른 곳에 정중히 매장하도록 통제했다. 언젠가 이곳 일대의 발굴을 기다리며---
(3) 참전용사 정찬욱님 증언(제1사단,'15)
본인은 '52. 10. 6일부터 4일간 고양대부근 전투에 참가했다. 그 중에서도 노리고지전투가 치열했는데 전투를 한 번 하면 우리 병사 천여 명중에 삼백여 명은 전사, 삼백여 명은 부상, 나머지 삼백여 명만 살아남는다. 유해수습은 모른다. 살아있어 살은 것이다. 당시도 유해수습은 일부 하지만 엄체호안에서 전사한 인원은 그대로 묻혀버린다.
제 3 절 철원-김화- 금성천 부근의 결전
1. 개 요
철원-김화지구는 중서부전선에서는 미 제9군단이 7월 중순 국군 제9. 국7. 미 제2사단을 전방에 배치하고 미 제40사단을 예비로 확보하여 중공군 제15. 38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나 별 접전없이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가을이 접어들면서 북한군과 중공군이 아군 전초에 대대적인 선제공격을 전개하였으며 국군 과 유엔군도 이에 맞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되면서 고지쟁탈전이 10월 들어 절정에 들게 되었다.
기간중 군단 좌익의 국군 제9사단이 10월 6일부터 백마고지에서 혈전을 벌이었고, 이날 좌인접 미 제2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 1개연대로부터 화살머지고지 공격을 받았으나 물리쳣다. 군단 우익에서는 국군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이 10월 14일 김화 북쪽의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선제공격하였다.
2. 주요 전투
가. 백마고지 전투
*효성산 619 *459
상전명동
가단동
낙타능선 하전명동
1개 중대
역곡천 장송동 *395 백마고지
1대대/30연 28연
약산동 2중대/30연
*284
화살머리고지 218 사후동
역곡천 역곡천
백마고지 전투는 '52. 10월 6일부터 철원 북방 395고지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 혈전을 수행한 끝에 이들의 격퇴에 성공한 전투이다.
군단 좌익의 제9사단은 이 전투가 벌어지기 1년전인 1951년 10월 17일부터 철원지역의 주저항선에 투입되어 좌로는 395고지(백마고지), 우로는 중강리까지 11km의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4사단 제340, 제324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제113사단이 좌인접 미 제2사단 정면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9월 22일 좌전방에 제30연대, 우전방에 제29연대를 배치하고 제28연대를 예비로 주저항선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이중 백마고지 방어를 담당한 제30연대는 395고지에 제1대대를, 중마산 일대에 제2대대, 역곡천 남안에 예비 제3대대를 각각 배치하고 있었다.
10월 6일 아침부터 국군 제9사단 정면에 포격을 집중하던 적은 봉래호 뚝을 파괴하여 역곡천을 범람시키며 중공군 제38군 제114사단이 395고지를 공격하여 왔다. 이날은 3회의 격전에서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중공군은 이날밤 395고지 공격에 앞서 좌인접 미 제2사단 방어지역인 화살머리고지를 공격하여 프랑스대대와 격전속에 격퇴되었다.
10월 7일, 중공군의 재역습으로 일시적 피탈되었고, 국군 제9-28연대가 투입되어 탈환하여 성공하고 진지강화를 하는 가운데 10월 8일 중공군 제112-334연대가 다시 공격을 해왔다. 그러나 제28연대는 결국 10월 9일 새벽에 피탈되고 다시 역습으로 주봉을 야간에 탈환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5차례의 전투로 국군 제9사단 연대가 많은 피해로 재편성이 불가하게 되었고 이에 당시 국군 병력 증강계획으로 새로 편성된 독립 제51연대를 우일선에 투입하고 제29연대를 백마고지에 운용할 계획으로 사단 예비로 전환시켰다.
10월 10일, 중공군이 역습을 재개하여 피탈되었다. 그러자 국군 제9사단이 고지정상에 17,700발의 포탄과 항공기의 화력의 집중으로 제29연대가 역습을 재개하여 고지를 탈환하였다. 중공군이 다시 백병전으로 역습을 감행하여 처절한 전투가 전개되고 11일 새벽에 다시 탈환하였다.
10월 11일, 밤에 중공군의 기습으로 피탈되고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공격함으로서 다시 탈환하였다가 다시 적의 공격으로 피탈되었다. 다시 제28연대가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여 적을 완전히 격멸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10일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하여 고지를 확보 하였다. 백마고지란 395고지가 전쟁 중에 쌍방의 포탄과 비행기 폭격으로 초토화되어, 멀리서 바라보는 모습이 맥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처럼 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제38군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고 그중 1만여 명이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가-1 :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395고지(백마고지) 탐사 결과
현재 백마고지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21)
비무장지대라 남북한 협의하에 발굴 작전이 진행 중이지만 내가 발굴을 진행한 것은 비무장지대내의 매복작전을 위한 개인호를 굴토하는 과정에 유해가 식별되었다는 신고에 현장 탐사를 진행했고 이어서 발굴을 진행했다.
또한 참전용사 일행이 전우를 가매장했다는 증언에 실제 그 분들을 모시고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현장에서 증언도 청취를 했다. 현재 백마고지에 GP는 구GP가 있고 신GP가 있는데 주로 구GP 철책 주변에 가매장된 유해가 있다.
당시의 유엔군 전차가 접근하는 진격로는 약산동 방향에서 정상 능선으로접근하게 된다. 포병의 화력도 철원평야지역에 전개하여 집중으로 포탄을 퍼붓게 되는데 참전용사님들의 증언이 국군 포병뿐만 아니라 중공군 포탄도 비오듯이 쏟아져 피아간 구분도 없다고 했다.
나)"참전용사 증언(당시 제30연대 중대장과 그 휘하 병 2명이 현장 동행)" : 대량으로 전사상자가 생겨나다 보니 노무자들이 전사상자들을 들것에 들고 내려가고 있지만 실제 비오듯 퍼붓는 포탄속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중공군의 경우는 시체를 그대로 방치하다보니 주변이 비록 10월이지만 그 부패정도가 심하여 숨쉬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 시체를 그대로 굴토되어 있는 교통호에 밀어넣고 흙으로 긁어서 덮어야 했다.
"중대장 조영국 대위의 제보(추진철책 작전간 26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4줄로 직접 묻고 술을 따랐다) : 예비역 조대위는 나의 사관학교 동기생이다. 백마고지 우측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고 추진철책 작업을 현장지휘했다. 그런데 진출입로를 개설하는 가운데 유해가 식별되었다는 신고를 접하여 현장에 가보니(284고지 우측으로 평지임) 전투화를 싣고 있는 유해 등 여러 형태로 유해가 식별되어 모두 거두어서 일정한 곳에 4줄로 6구씩 매장했다"
나는 조 동기를 부천 수산물 시장에서 만나 함께 철책선으로 가서 위치를 확인하고 해당 부대와 협조하여 현장확인을 위해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탐사를 했다. 하지만 4줄의 묘역은 찾자 못했고 한 지역에 4개의 봉분이 있는 묘역을 확인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유해를 다시 발굴하여 일정한 곳에 재매장했다는 제보를 들었다. 그러나 일부 당시 가매장에 참여한 부사관 중에 그 유해 중에는 군인이라 볼 수 없는 유해도 있었다는 제보를 접하여 발굴을 하지 않았다.
다) 김영신 장군(전 3사교장님 증언) : 당시 대대장으로 참가했다. 얼마나 포탄이 머리위로 떨어지는지 고개를 들고 지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명령하달시 중대장들에게 발로 신호하는 법을 알렸다. 오른발로 하면 우측 중대가, 왼쪽발로 하면 좌측 중대가 전진하고 멈추는 식으로 했다. 기어서 그 낮은 산을 오르는데 손으로 잡으면 중공군 시체다. 그렇게 사워서 지켰다.
나. 저격능선 및 삼각고지의 쇼다운 작전
(1) 작전경과
오성산 1052
*679
상소리
상감령
Y 하소리
삼각고지 저격능선580 돌바위능선
(제3봉 900)*파이크봉 *제인러셀고지(800, 제2봉) A
*598 (제1봉) 센디능선
하감령 *538 남대천 32연 31연
제17-2대대
1/32연 2/32연 미7 국2
상리
망소 남대천
송동
철원 계웅산604 신촌
김화
남대천
철원을 방어한 국군 제9사단의 우측에는 미 제7사단과 국군 제2사단이 김화를 방어하고 있었다. 미 제7사단은 철원평야 동쪽의 중가산으로부터 김화 북쪽 하감령까지, 국군 제2사단은 하감령에서 동북쪽으로 하소리에 이르는 주저항선에서 오성산(1062)을 확보하고 있는 중공군 제4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의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의 중공군 전초와 유엔군의 전초간 거리는 불과 200m거리로 아군진지를 감제관측하기에 용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52년 여름부터 중공군이 공격작전을 진행하여 주도권을 잡고 아군 전초기지에 서네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아군이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국군과 미군이 각 1개 대대가 각각 오성산 부근의 중공군 전초에 대해 공격을 하되 군단의 화력과 항공근접지원을 최대로 투입해 단기간에 작전을 종료하도록 하여 '52. 10. 8일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았다. 이 작전은 힘의 과시라는 의미에서 소위 "쇼다운 작전(Showdown)"작전이라 했다.
국군 제2사단은 '52. 6월 29일부로 김화지역으로 진출하여 미 제40사단으로부터 진지를 인수받았다.('52.3월에 인계한 부대) 국군 제2사단은 제32.31.17연대를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독립연대인 제37경보병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여 제32연대를 저격능선 남쪽에 배치하였다. 미 제7사단은 한탄강 좌우로 서방산(717)과 오성산(1062)에서 뻗은 고지군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15군 예하 제44, 45사단으로 삼각고지와 그 전방에는 제45사단 제135연대가, 저격능선과 그 전방에는 동사단의 제133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52. 10. 14일 05:00시에 미 제9군단은 16개 포병대대의 280문의 포가 공격준비사격을 개시하고, 유엔항공기의 근접항공지원이 개시되었다. 당시에 서쪽의 백마고지에서는 전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제2사단장 정일권 중장은 좌익 제32연대로 공격을 개시 저격능선의 중심부인 매봉과 돌바위를 점령한데 이어 Y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적의 역습에 밀려 결국 야간에 고지를 철수해야 했다.
이에 따라 사단장은 제17연대와 제32연대로 15일~16일에 연속으로 저격능선을 점령하였으나 계속적으로 적의 야간 역습에 결국 10월 19일 다시 원진지로 되돌아서게 되었다.
이 무렵 삼각고지를 공격한 미 제7사단 제31연대도 제인 러셀고지와 598고지를 점령하려 참호선까지 진출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원위치하게 되었다. 사단은 16일 다시 598 제1봉을 점령하고 이어서 제3봉인 파이크봉을 점령했으나 19일 이를 상실 하였다. 중공군이 10월 23일 파이크봉에서 삼각고지로 공격을 가해왔으나 배속된 이디오피아 군이 서측에서 접근하는 적을 저지하면서 삼각고지를 방어했다.
이 무렵 10월 25일부로 국군 제2사단은 군단지시로 미 제7사단의 삼각고지를 인수하게 되어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어 사단 예비인 제37경장비연대(독립연대)를 주저항선 우측의 외야동에 배치하고 제31연대를 삼각고지에 투입하였다.
미군이 탈취한 삼각고지에 10월 25일, 투입된 국군 제2-31연대는 중공군과 고지쟁탈전을 계속하는 가운데 30일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고지를 빼앗기고 계웅산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군단은 10월 31일부로 국군 제9-30연대를 국군 제2사단에 배속시켜 11월 1일부로 삼각고지 탈환임무를 부여하여 수차례 공격에도 많은 병력 손실만 발생하고 탈환하지 못했다.
결국 미 제9군단장은 11월 5일부로 삼각고지 탈환작전을 중지하여, 국군 제2사단은 저격능선 작전에 집중하게 되었다. 11일사단은 A고지를 확보한 상황에서 부대교대로 17연대를 예비로 돌리고 제32연대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대규모 역습으로 피탈되고 몇차례 역습에도 실패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이 곳에 사단규모의 전투력을 증강하였다.
사단은 다시 제17연대로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A고지와 돌바위고지를 일거에 탈환하였다. 11월 13일, 22:00시에 대규모 공격으로 상호 쟁탈전이 반복되는 가운데 17일 아군의 제1야전포병단의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여 A고지와 돌바위고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적은 25일까지 계속 공격하였으나 국군 제2사단은 A고지와 돌바위고지선을 방어하였다.
결과적으로 "쇼다운 작전"의 일환으로 한 5일정도 작전을 예상했던 전투가 무려 42일간이나 저격능선과 삼각고지 일대에서 벌어졌고 사살 3,772명, 추정사살 11,023명, 포로 72명의 전과를 올렸고 국군 제2사단은 전사 1,096명, 부상 3,496명 , 실종 97명의 큰 피해를 입었다.
(2)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유해발굴작전이래 최초로 비무장지대에서 발굴된 유해의 봉송작전을 카메라에 담다
현 국군 제3사단에서 여러건의 유해발굴 관련 신고가 들어왔다. 계웅산 전사면 구릉지대의 땅굴탐사 작전을 위한 도로 개설과 순찰로 화장공사에 유해가 노출되었다는 신고다. 방탄조끼를 입고 철모를 쓰고 현장에 들어갔다.
(가) 삼각고지밑의 경계근무중인 용사님을 발굴하다
수색정찰로상인데 매복진지를 굴토하는 과정에 유해가 보였다는 신고로 우리가 들어가 발굴작전을 진행결과 칼빈총을 들고 무릎자세로 전방을 직시하는 자세로 전사한 용사님이었다. 이 유해를 발굴하여 통문을 통과하는 과정이 카메라에 담기어 언론에 공개되었다.
(나) 보급로상에 노출된 유해와 현장모습
보급로상에 유해가 보인다하여 계웅산 전면으로 들어가는 도로상을 조사를 하게 되었다. 가서 보니 유해가 아니라 이곳이 마을 단의 집단 묘지로 판단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길 좌우측 배수로상에 무수한 유품들이 널려 있다. 차량 부속품부터 탄통등이 나오고 있고, 평탄작업을 하는 도쟈의 작업구역에서는 누군가의 세면백이 나왔는데(휴전이후 근무한 장교의 것) 많은 유품이 쏟아졌다.
(다) 추진철책 앞에 남겨진 "무명용사비와 무덤"
하지만 발굴결과유해는 보이지않고 있다. 바로 저 앞에 북한군 GP가 우리를 지켜보는데 위험부담이 크다. 이곳 어딘가에 그들이 준비하려던 땅굴이 있다하여 여기저기 천공들이 즐비하다.
(라)계웅산 능선에서 발굴된 유해(6구), 그리고 자동화기 진지와 황금 빛 / 현장 앞에 선 용사님
계웅산 관망대를 올라서는 곳에 무명요사 묘비가 있었다. 이곳을 발굴하는데 갑작스레 빛이 뛰어올라 지원병을 엎드리게 한 후에 세밀히 보니 땅속이 지동화기 진지였고 그대로 사수와 부사수 두 명이 전사하여 있고 탄통에 탄알이 물이 닿지않아 녹슬지않아서 우리가 굴토하는 과정에 구멍이 뚫리면서 번쩍했던 것이다.
나는 제9-30연대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계웅산에 올랐다. (강길원 용사님, 작고)
"저기 낙타능선 바로 밑에 대대 지휘소가 있었고 내가 그곳에서 당번병으로 근무했다. 하루에도 한두번씩 저 능선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수십명이 죽어나와 노무자들이 들거나 끌고 온 유해는 어떻게 내려보내지 못하니 당시에 미군이 포크레인같은 것을 지원하여 바로 땅을 파고 임시로 묻었다. 그래서 여기서 벌레가 기어나오는데 아침에는 10시경이고, 오후에는 4시경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벌레를 보고 시간을 알았다. 몇백명이 묻혀있을 것이다.
(마) 채준목 참전용사 증언(제2-32-3-10중대, '00)
본인은 '52. 9월 27일(음력)에 저격능선 전투에서 부상으로 후송되었다. 우리는 오성산이 바라보이는 능선상 작은 봉우리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 중에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이미 우리가 공격하기전에 발생한 전사자가 그대로 있었다. 5일간이나 계속된 전투에서 나는 부상으로 후송되었는데 저격능선에 우리 아군 유해가 많았고 특히 호속에 묻혀있는 유해가 많았다.
(바) 이종일 참전용사(제2-32-2-5중대, '00)
저격능선 탈환시 우리 소대원 17명과 수많은 대대원이 전사했으나 유해는 수습되었는지 잘 모른다. 본인은 '52. 5월에 제2사단으로 가서 5중대 3소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했고 3개월이 지난 10월 경에 공격에 참가하여 치열한 전투에 1개 대대가 들어가 1개 소대정도만 생존해 귀환한다.
당시에 나무위에 유해를 화장하는 모습도 보았고, 당시는 적의 포탄공격으로 호속에 있는 유해는 거의 수습이 불가하고 일부는 철수시 수습도 했다. 내가 있던 참호에도 포탄이 작열하여 4명이 묻혀버렸다. 적이 점령한 호속에 들어가니 그들은 호안에서 콩나물도 길러서 먹었더라. 나는 머리에 부상을 입고 후송되엇다 다음 제21사단 창설 멤버로 다시 전선에 갔다.
(사) 송종수 참전용사(제2사단 야공대 제3중대 제3소대)
공병으로 제2사단에 '51. 5월에 입대, 저격능선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52. 10월에 적 오성산에서 아군쪽으로 적 전차 4대가 이동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그 진출로상에 지뢰(전차지뢰, 대인지뢰)를 약 150발을 제31연대 병력과 노무자들을 이용하여 매설했다. 그러다 추가 작업간 중공군이 기습하여 많은 인원이 전사하게 되는데 제대로 수습을 못하였다. 또 그 전사자들을 수습하러 투입되었으나 적의 공격으로 일부 전사자만 수습하여 돌아왔다. 지금도 저격능선 앞 삼거리 일대의 피해를 당한 전우들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 금성천 부근의 결전
금성천 부근의 결전
*533 *화대봉530 *용화산867 북한강 금강천
*옥녀봉
금성 *742
*돌고지373 *A *B *573 쌍령동
*407 *724
금성천 치마고개 *575 여호고개
*747
*지형능선 *수도고지 북한강
봉화산477 *770 *690 *472 *679 *674
교암산 *612 *663
관망산 *572독수리고지
북한강 *748피의고지
금성천 6사 = 수도사 *349
*585 *548 *949
*973
죽동 금성천 북한강
수도 = 3사
1) 개요
휴전회담이 개최된지 1년이 지나도록 포로송환 문제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좌초된 상태에서상호간 회담의 유리한 방향을 쥐고 위한 공세적인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무렵 금성천 부근 국군 제2군단(군단장 백선엽 중장, 7월 23일부로 유재흥 중장)은 '52. 4. 5일 화천에서 재창설한 다음 미 제9군단으로부터 금성~북한강 동안까지의 전선을 인수하고, 제6. 수도. 제3사단을 배속받아 이곳 중동부 전선을 방어하였다. 당시 군단의 주저항선은 금성 남쪽 3km 봉화산-교암산-663고지-북한강 동안 어운리-949고지-973고지-통선골로써 이미 '51년 추계 제한공격시 확보한 선이다.
군단과 대치 중인 적은 중공군 제12군과 제68군 일부로서 제31사단이 국군 제6사단 전방의 금성북쪽에, 제35사단이 수도사단 정바의 율사리-747-좌수동(748)에 배치하고, 제203사단이 국군 제3사단과 대치하였다.
국군 제2군단장은 '52. 6월 10일, 각 사단에서 적정 탐지와 적진 파괴 및 교란을 위해 제한목표공격을 하되 1개 대대규모로 전초진지를 탈취하도록 하였다(이 작전은 Back Shot 작전이라 칭함). 그중에서도 수도사단 전초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제3사단의 949고지 북쪽 전초 독수리고지(572) 및 피의 고지(748고지), 그리고 제6사단의 정면 금성동쪽 2km 지점의 A . B고지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전개 되었다.
2)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전투(수도사단) / A.B고지전투(6사단)
가)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수도사)
당시 수도사단은 '52. 6. 16일 군단의 전투지경선 조정에 따라 군단의 중앙사단으로서 교암산 동측 765-690-663-북한강 동안 어운리선을 주저항선으로, 575고지, 지형능선(690고지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1km의 능선), 수도고지(663고지, 북 500m,610고지) 등에 전초를 운용하고 있었으며, 좌전방에 제1연대, 우전방에 제26연대를 배치하고 제1기갑연대를 예비로 확보하고 있었다.
사단의 적은 중공군 제12군 제35사단으로 약 1개월분의 식량과 보급품을 확보하고, 진지 대부분이 동굴화 되어 있었다. 이곳의 적 전초기지는 수도사단의 전초기지와 소총유효사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상호 비수와 같았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백쇼트 작전"계획이 하달되자, 제1연대 1개 대대가 지형능선 하단을, 제26연대 1개 대대가 수도고지를 목표로 7월 8일 01: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강력한 저항과 재역습이 반복되면서 탈취하지 못하고 8월 5일까지 적이 소강상태로 지내다 적이 수도고지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6일부터 8일까지 뺏고 뺏기는 쟁탈전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사단장 이용문 준장(7월 9일부)은 제1연대 제2대대를 역습부대로 투입하여 적에게 내주었던 수도고지를 재탈환하였다. 그리고 다시 소강상태로 돌아갔다.
9월 6일 18:50분에 중공군이 수도고지를 공격해 고지를 방어하던 소대가 소대장과 소대원 전원이 전사하고, 6차례의 탈환전을 전개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9월 9일 재역습으로 고지를 탈환하였다.
한편 지형능선상에는 기갑연대가 적과 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9월 6일 18:40분 적이 지형능선과 575고지에 공격을 해와 지형능선이 피탈되었다. 기갑연대는 6일 1차역습을 시작으로 6차례, 9월 14일 제1연대가 7차례 역습으로 재탈환하였다. 연대는 이후에도 수차례 적의 역습을 20일까지 격퇴하였다.
사단은 결국 9월 6일부터 2주간에 걸쳐 사살 2,406명의 전과를 올렸고, 아군도 전사 455명, 부상 1,419명, 실종 61명의 피해를 입었다.
사단은 그후 10월 6일부터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 재개된 적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8일 제1기갑연대가 575고지를 상실한 후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수도사단은 중공군 제35사단의 공격을 맞아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 4개월이나 공방전을 벌여 혈전으로 확보하고, 지형능선 서북방의 575고지는 잃은 상태로 군단지시에 의러 '52. 10월 25일 현 주저항선을 제8사단에 인계하고 미 제8군의 예비로 전환되고 중공군도 제35사단이 575고지는 확보했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고 10월 말 제67군 예하 사단과 교대되었다.
나) A.B고지 전투(6사단)
한편 우인접 수도사단이 지형능선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 좌인접 제6사단(백인엽 준장)은 제2연대가 6월 11~12일에 중공군 제31사단 전초인 금성 동측 2.5km A고지와, 2km B고지를 탈취하여 아군의 전초를 설치했다.
이 두 무명고지는 적으로부터 금성 동측방을 방호함은 물론 17번 도로를 방어고 차후 공격의 발판이 되는 중요한 고지였다. 이를 국군 제6사단이 확보함으로써 중공군은 금성으로 병력과 보급의 이동이 불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공군이 몇차례 공격을 해왔으나 제6사단은 계속 고수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 북한지역으로 참전용사 증언위주 기록
가)정읍 용화사 주지스님의 증언(수도고지 전투참전, 육군 직할 유격대, 여기서 부상으로 후송)
"수도고지 육탄용사 참전기"를 남기다
나) 박돈규 참전용사님 ,A.B 고지증언(제6-2-2-7중대, '00)
본인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고 대략 휴전이 임박했던 시기라 기억된다, 우리 부대가 A.B고지에서 20일 정도 전투했는데 낮에는 우리가 점령하고 밤이면 적이 탈취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우리가 주간에 점령해서 호를 다시 구축하다 보면 호속에 온통 시체가 쌓여 있었다. 우리가 한번은 모여서 식사 중에 적 포탄이 떨어져 소대원중에 1개 분대만 살아 남았다. 고지 약 8부 능선에 있는 호속에 유해가 있다
다) 김석수 참전용사님 지형능선 증언(수도사-기갑연-2대대, '00)
'52. 9월 경 지형능선 전투시에 기갑연대 제2대대 통신요원으로 파견발령을 받아 지형능선 전투에 참가하였다. 나는 남쪽고지에 있었는데 이미 몇번의 적의 공격으로 많은 유해가 호속에 남아 있었다. 적의 포탄공격으로 일부 전사자는 고지 아래로 떨어지고 일부는 파열되어 흙이 덮히어 찾지 못하게 되었다. 본인은 '53. 4월경 부상으로 여수 제15육군병원으로 입원했고 '53. 12월 8일 전역했다.
제 4 절 독수리고지 및 피의 고지 전투
1. 전투경과
수도사단의 우익 제3사단은 북한강 동안의 어운리-송정-통선골까지의 전선을 방어하며 440-949-973-780고지군을 연하는 선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그 전방에 많은 전초를 운용했다.
*533 *화대봉530 *용화산867 북한강 금강천
*옥녀봉
금성 *742
*돌고지373 *A *B *573 쌍령동
*407 *724
금성천 치마고개 *575 여호고개
*747
*지형능선 *수도고지 북한강
봉화산477 *770 *690 *472 *679 *674
교암산 *612 *663
관망산 *572독수리고지
북한강 *748피의고지
금성천 6사 = 수도사 *349
*585 *548 *949
*973
죽동 금성천 북한강
수도= 3사
사단은 적의 '52년 추계공세가 시작될 무렵 9월에 제22연대를 서, 제23연대를 동, 제18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사단의 방어중심이 적의 주공격목표로 판단된 949고지를 포함해 북한강 동안의 방어부대인 제22연대는 적의 공격을 조기 경고하기 위해 어운리 572고지(독수리고지)와 949고지 북쪽 748고지(피의 고지)에 전초를 추진 배치하였다.
사단과 대치중인 중공군은 제68군 제203사단으로 어운리-숭정-암동 북쪽과 북동쪽의 횡격실 능선과 고지군에 주진지를 형성하고 아군 전초선에 가까이 전초진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작전의 큰 방해요소인 독수리고지와 피의고지를 공격하기 위해 122mm 유탄포 및 105밀리 유탄포 35문 등 각종 포 77문이 이 일대로 집결했다.
'52. 9. 28일 야간 22:10분에 엄청난 포병사격으로 아군의 전초선을 초토화 시켜 모든 통신망이 두절된 상태에서 각 고지에 1개 대대씩 공격을 감행했다. 이어서 제203사단 주력이 주저항선에 공격, 949고지를 포함한 주요감제고지를 점령하려 했다.
'52.9.29일 미명부터 독수리고지 및 피의 고지는 더이상 적의 압력을 견딜 수 없어서 철수하게 되는데 사단장(백남권 중장)은 전초저지선에서 적을 저지한다는 결의하에 예비인 제18연대를 투입하여, 제18-1대대가 독수리고지로, 제2.3대대가 피의 고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군단에서도 중요성을 감안하여 제6사단에 배속중인 제52전차중대 중 1개 소대를 이날 제22연대 주저항선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독수리고지(572)로 공격하는 제18-1대대의 재역습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고, 피의 고지(780)에 공격하는 제18-2.3대대의 공격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단은 949고지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이곳으로 모든 역습부대를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일시적 주봉을 탈환했으나 다시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10월 2일, 제22-1대대가 제23-3대대의 진출선을 초월하여 진출하였다. 적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고 적의 화력거점을 파괴하며 탈환에 성공하였다.
국군 제3사단은 5일간의 전초진지 쟁탈전에서 전사 109명, 부상 384명의 손실과 적 사살 664명, 추정사살 161명의 전과를 달성하며 572고지는 피탈되고 748고지는 확보하였다. 그러나 독수리고지의 피탈은 북한강 동안의 능선 끝에 있는 고지로서 주요 보급로상의 통제가 가능했던 점에서 차후 휴전협정시 분게선의 설정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잔투였다.
2.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 북한지역으로 탐사 제한, 참전용사 증언으로 대치
가. 김기헌 참전용사님(제6-19-2-7중대, '15)
나는 '51. 11월에 양구 북동쪽 949고지에서 중공군과 전투했다. 얼마나 죽었는지 숫자도 모른다. 이후에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하고 북한강 서쪽으로 이동했다. 우리 6사단 제19연대는 전멸하다시피 했다.
우리가 3사단에게 인계하는 과정에 3사단이 너무 많은 시체가 여기저기 있다보니 치워주지않으면 못받겠다 하여 일부 병력이 간부통제하에 남아서 시체를 계곡으로 치워야 했다고 알고 있다.
제5 절 북한강-소양강 지역의 혼전
1. 개요
미 제10군단은 '52. 여름 국군 제7사단을 좌익으로 미 제25사단을 중앙으로, 그리고 국군 제8사단을 우익으로 북한강 동안(통선골)으로부터 소양강 계곡까지 여러차례 격전을 치른바 잇는 1090고지-단장의 능선-812-854고지를 이르는 선을 방어중이었다. 군단은 7월 18일 미 제1군단으로부터 미 제45사단(필리핀 대대 배속)을 배속받아 잠시 양구에 대기하다 9월 25일 우익 국군 제8사단과 교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군단 우익 국군 제8사단이 9월 부대교대 직전에 812-854고지의 전초진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였고, 12월다시 이 지역을 인수한 미 제45사단도 신편된 국군 제12사단과의 교대를 앞둔 12월 25일에 또 한차례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미 제25사단과 교대한 미 제40사단이 11월 단장의 능선 북단 851고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고, 좌익의 국군 제7사단이 주저항선을 계속 방어하면서 10월 중순 중공군으로부터 1090고지 부근의 공격을 받아 크리스마스고지를상실했다. 이로인해 약간의 저지선 변경은 있었지만 대체로 큰 변동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2. 전투 경과
가. 1090고지 부근 전투
어은산 *1297
문등리
*1218 *984
*890
암동 *B 내동
*A
*크리스마스고지 1개소대
*1090(북) 1개 중대
내리
*1090(남) 양구
*938
*1220
백석산
군단 좌익으로 북한강 동안 통선골-1220고지-내동의 주저항선을 방어중인 국군 제7사단은 '51. 11월 중순에 국군 제8사단과 교대하여 들어왔다. 이후 계속적으로 중공군과 전초기지 확보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1차로 '51. 11. 25~28일 어간에 제3연대가 방어중이던 크리스마스 전방의 무명고지 A.B에 공격을 하였고, 2차로 '52. 2월 11일~13일 어간에 크렘업 작전(침묵작전)기간에 1090고지 부근에서 격전을 치룬 후 수색 및 정찰 활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52. 7월 중순 제7사단은 육본 계획에 의거 부대신편계획에 따라 신병과 추가장비를 보충받아 전투부대위주로 개편을 완료하고 제3연대를 좌전방, 제8연대를 우전방, 제5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68군 제202사단이 어은산을 주축으로 전방으로 전초진지를 추진하여 아군과 대치중이엇고, 그중에 1090고지 북쪽에는 제604연대가 배치되어 추계공세를 준비하였다.
'52. 10월 6일 일몰과 더불어 제3-3-9중대가 방어중인 1090고지(북)와, 그 북방 300m 위치에 있는 크리스마스 고지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크리스마스고지가 피탈되고 1090고지로 밀려왔다. 국군 제7-3-9중대는 준비된 엄체호와 지뢰지대 등을 이용하여 적을 저지하였다.
다음날 연대는 크리스마스고지를 역습으로 탈환하기 위해 제11중대를 투입했으나 실패하였으며, 계속적인 중공군의 1090고지 탈환작전에 대비하여 진지를 보강하고 10월 13일 재개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가-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참전용사 윤여민 증언(제7-5-11중대' '15)
'51. 12월에 양구 북방 어은산 일대 크리스마스고지(1090) 전투시 고지쟁탈전으로 피아간 주인이 자주 바뀌었으며 제7-3연대가 주 방어부대인데 전멸하다시피 했다.
나. 854 . 812고지 전투
(1) 전투 경과
국군 제8사단은 '51. 7.20~9.18일까지 원통 북방 노전평지구 전투에 참가하여 9.18일 854고지 전투를 끝으로 9.22일 미 해병 제1사단에게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9. 28일 부터 백석산지구로 들어와 국군 제7사단과 교대하여 백석산 전투로 10월 1일 고지를 탈환하고 계속 밀어 올리기를 하여 10월 28일 크리스마스고지까지 진격한 후, 11월 29일까지 국군 제7사단에 인계하고 호남지역으로 내려가 백야사에 배속되어 '52. 1. 31일까지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그후 전방으로 추진되어 훈련소에서 1달간 훈련를 하고 '52. 3. 18일 서화리로 이동하여 미 제10군단에 배속, 미 제1해병사단에게 인계했던 812-854고지 지역(미조리선)을 인수하였다. 9월 28일까지 전투 임무를 수행한 후 미 제45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명에 의거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사창리에서 2주간 교육받고(10.4~10.17) 다시 10.19일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10.25일 수도사단과 교대되어 수도고지. 지형능선 지역으로 들어간다.
국군 제8사단은 전선을 인수 후('52.3.18) 8월까지 북한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미 제5공군의 근접항공지원과 미 제7함대의 함포지원하에 1일 평균 1,000여 발의 포격을 전개하는 한편 소규모 수색정찰 활동을 강화하였다.
무산 1320
*791 *503
*1190 남강 남강
*802 삼재령 *591
*884 제10-3대대
*556
간무봉 *854 8사 = 11사
제10-1대대
*1052 *812 *무명 *578 *924
제16-1대대 서화천
16연 10연
(미1해병) 제16-3대대
노전평 *1031
미25사 = 국8사
(미40사) (미45사)
작전지역은 소양강 상류 간무봉과 무산(1320)에서 사단 방어지역으로 뻗은 능선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어, 사단 전방방어와 보급로(철미동-서화-인제)가 적에게 감제되어 방어에 불리하였다. 제8사단장 김익렬 준장은 제16,제10연대를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제21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여 방어진지를 보강하였다.
사단 정면의 적 북한군 제45사단은 휴전협상 기간을 이용하여 진지를 강화하고 9월 21일 812-854고지 선으로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이날은 제8사단이 미 제45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기 하루 전으로 적이 진지교대의 헛점을 이용한 것이다.
적은 3시간의 집중포격 후에 2개 대대로 812고지를, 1개 연대가 854고지를 공격하여, 결국 제10-1대대는 854고지에서 일단 철수하여 854고지에 이르는 능선상 저지진지에 급편방어에 들어갔다.
한편 좌전방 제16연대 지역으로는 854고지보다 30분 앞선 22:10분부터 화력을 집중하여 주공지역인 854지역을 위장하려하였다. 하지만 이미 적의 기도를 파악하고 준비된 화집점에 차단사격과 미 제254전차 대대의 1개 소대와 동해안의 미 제7함대 함포사격이 가세하여 적을 강타하였다.
9월 22일 새벽, 854고지 지역은 제2대대가 역습부대로 미 제145포병대대 등 7개 지원포병대대 및 미 제245전차 대대, 미 제5공군 편대, 미 제7함대 등이 적을 집중강타하였다. 이로서 제2대대의 역습은 성공을 거두어 854고지를 탈환하였다.
제8사단은 이후에 9월 25일, 방어책임 지역을 미 제45사단에 인계하고 미 제9군단지역으로 이동하여 사창리에서 2주간의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에 들어갔다.
(나)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참전용사 정해윤(제8-16-3대대,'15)
본인은 '50. 12월 31일 입대하여 제8사단에 들어갔다. 854고지 전투는 탈환작전간 적의 기스으로 중대의 많은 인원이 전사하거나 실종 되었다. 당시 180명이 공격하여 6명만 생존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교저니 치열하여 유해는 노무자들이 일부만 수습하였으나 처리하지못한 유해는 남겨 둘 수 밖에 없었다.
2)참전용사 이봉열(제8-16연대, '15)
본인은 제8사단 소속으로 854고지, 금성고지, 수도고지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854고지는 '52. 9.21에서 22일까지 아군이 대공포판을 이용하여 9부능선에서 낮은 고지능선으로 수회 공격했다. 금성지구 전투시는 지형이 험하여 OP에서 보니 노무자들이 시체를 운반하다 개울이나 계곡에 유기하는모습을 보았다. 수도고지는 전면에 유해가 많았는데 특히 벙커안에는 미처 철수하지 못한 병력이 전사해 있을 것이다.
3) "야, 너 또 살았어~!"
제10연대 출신 어느 참전용사님의 기막힌 증언이다. "본인은 854고지 전투가 끝날 때까지 1대대에서 소총수로 참여했다. 포탄이 얼마나 퍼붓는지 사실 아군이 공격하기도 어렸다. 어쩌다 고지가 빼앗기면 바로 역습부대가 투입되고 동해안에서 함포가 날아오는데 마치 새떼처럼 쏟아진다고 한다. 정말 많이 죽었다. 그러다 동이 트면 우리가 고지에 올라서고 만세를 부른다. 연대장이 올라와 전공을 치하하는데 우리 중대는 다 죽거나 부상당하고 나만 쌩생하게 살았다. 연대장과 악수를 세번은 했다. 마지막으로 미군과 교대전에 전투를 마치고 인원 점호를 하는데 연대장이 던지는 말 '야, 너 도 살았어?" 였다. 기막힌 반가움의 인사다
4) 854고지일대 현장탐사 결과(비무장지대 내)
통문에서 GP에 이르는 보급로를 따라 차량으로 이동하며 눈탐사를 해야했다. 그러다 일부구간은 차에서 내려 실제 미확인 지뢰지대내의 모습을 탐사도 했다. 겨우살이들이 참나무에 다수 붙어서 자유를 누리고 있고 소나무같은 침엽수는 없고 활엽수가 자라고 있다.
어느 곳에는 철모가 보이고 유품들이 널려있다. 그렇다고 접근은 어려웠다. 혹시나 지뢰가 터지면 곤란하다. 산돼지들이 쾍쾍거리며 이빨을 부딪친다.
지피출입문 근처에 보급로 정비중 유해가 나와 수습을 일부는 하고 나는 854고지 정상을 바라보았다. 인접하여 접근해 살펴보니 지금도 그 당시에 매설해 놓은 지뢰가 수없이 보인다. 3중의 철조망과 지뢰군으로 적의 접근을 차단하여 지켜낸 곳이란 생각이 든다.
5) 812고지 일대(쌍용고지) 현장 탐사(비무장 지대내)
어느날 이곳에서 GP소대장을 한 학군 18기 김병철 예비역 중위로 부터 제보가 왔다. 본인이 이곳에서 수많은 유해를 직접 목격햇다는 제보다. 나는 직접 차량으로 모시고 현장에 들어가 최대한 수색정찰로를 따라 주변을 탐사했다.
철조망이 그대로 녹슬어 있고 저기 바로 지척의 거리에 북한군 GP가 보이고 있다. 바로 쌍용고지다. 800고지군이 횡격실로 두개의 무명고지가 바로 눈앞이다. 정상부근에 세워진 우리 GP안에 과거 공사간 나와서 묻어논 유해 몇구를 수습하고 주변을 탐사했다. 얼마나 이 지피공사간 훼손되었는지는 간음할 수 없다. 피아간에 몇백명은 죽어갔고 대부분 그 당시에 엄체호같은 벙커에 죽어갔다는 증언에 기초할 때 비무장지대내 지피현대화 공사간 수없는 유해가 유실된 것은 사실이다.
능선을 연하여 갈지자처럼 교통호가 이리저리 연결되는데 아마도 이 속에도 유해가 있을 것이다. 50여 년간 세월의 넋이 풀뿌리에 그리고 그 당시 포연에 짓눌러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술 한 잔 올려 드리고, 나는 폭격에 작살난 철조망 일부를 가져왔다.
제 6 절 남강 남안의 쟁탈전
1. 개요
전선 최동단 방어를 맡은 국군 제1군단은 '52년 1월 초 제5사단이 군단에 배속됨을 계기로 제11, 5사 양개 사단으로 남강 남안의 주진지를 확보하여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47사, 제9사단과 대치했다.
제11사단은 군단 좌익으로 남강에 연한 사천리-554고지를, 제5사단이 우익으로 554-감호가지 고성 남쪽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남강이 놓여있는 제11사단지역은 소강상태였으나, 제5사단 정면에는 적이 월비산을 확보하고 있어 그 남쪽의 351고지 등 제5사단 전초와 주저항선을 공격하기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제5사단은 전쟁전에 전남 광주에서 창설되어(15,20연) 초기전투시 봉일천 / 미아리 전투에 참여하고 '50.7.17일 마산에서 해체되었다가 다시 10월 8일 27.35.36연대로 재창설되어 제3군단에 배속되어 영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고 북진작전시 육본직할로 가평.춘천.연천지역 잔적소탕에 참가하였다. 다시 중공군을 맞아 후퇴하는 과정에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춘천-원주-영주로 철수한 후 유엔군의 재반격시 미 제10군단의 라운드 업 작전간 우일선 부대로 횡성 우측 포동리로 들어왔다가 중공군의 2월 공세에 밀려 2월 중순에 주천까지 후퇴를 거듭했다.
이곳에서 단양-풍기간 보급로 경계임무를 수행하다 단양에서 미 제2사단과 교대하여 3월 초에 아이다호선 진출시 안흥-태기산전투, 이어서 원통북방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 춘계1차공세(4월공세)시 아야리로 철수한 후, 다시 진격하여 5월에는 소양강 남안 어론리-음양리선(미조리선)가지 진출하지만 바로 중공군 춘계2차공세(5월공세)에 사단이 무력화되어 풍암리로 철수(수정된 노네임선)하여 이곳에서 재편성을 실시 한 후에 다시 유엔군 재반격작전시 원통으로 진출하여 미 제2사단과 교대하여 미 제10군단의 우익사단으로 '51. 5월 말에서 6월초에 서화에서 개고개까지 진출한다.
이어서 7월19일 작전지역을 국군 제8사단에 인계하고, 8월 18~22일까지는 피의 능선전투, 8.26~10.14일까지는 현리. 대우산. 가칠봉전투를 실시했다. 이어서 다시 '52.10월 12일 가칠봉지역을 국군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양양에서 부대정비 및 훈련을 실시한 다음 '52. 1. 11일 거진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지금의 351고지 전투지역에 들어가 '53. 1. 29일 제15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기 전까지 전투를 했다. 이후에 다시 교육훈련을 실시하고 4. 10일부터는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사창리로 이동, 국군 제3사단 지역을 인수하여 6월에는 883-973-949고지 전투, 7월에는백암산전투를 실시하고 휴전을 맞이했다.
국군 제5사단장(장창국)은 7월 초 제36연대를 좌전방, 제35연대를 우전방, 제27연대를 예비로 하여 주저항선을 방어하게 되엇다. 351고지를 방어하게 된 제35연대는 주저항선에 제2대대만을 배치하고 전초진지에 1,3대대를 배치하여 전초의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반면 적은 제9사단 제86연대를 아 35연대 정면에, 제47사단은 제2연대를 아 36연대 정면에 전개하고 있었다.
정리동 고성
남강
*148 *187
월비산 *261
*351
*208
제3대대 *37
남강 *240 *339
보현리 *345 제1대대
*154 *263
*321 가경지고개
남강 *223 제36연대
*554 명파리
수동리
2. 전투 경과
북한군 제9-86연대는 사전 351고지와 같은 유사한 지형에서 장기훈련을 마치고 7월 6일 월비산을 경유 351고지 전면에 들어와 지뢰제거 등 공격준비를 실시했다.
'52. 7. 10일 22:00시에 적이 제3대대 9중대가 방어중인 351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대대병력의 공격에 고지는 피탈되었다. 다음날 사단은 제27-2대대를 제35연대에 배속시키고 역습을 명하여 제35-2,3대대가 11일 역습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사단은 다시 12일, 제27연대와 제35연대를 교대하여 역습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13일 제35연대에 역습을 명하여 트럭을 이용한 위장전술(병력이 집중 들어오는 것처럼 연출)과 전폭기의 맹폭, 동해의 미 제7함대의 함포가 쏟아지는 가운데 백병전으로 고지를 탈환하게 되었다.
이 351고지전투는 만 3일간의 전투였지만 고지 정상이 피로 물들였고, 준비된 교통호안에 많은 수의 국군이 적의 화염방사기에 죽어서 매몰되어 버렸다. 사단은 이 전투에서 적 445명을 사살하였고 아군은 68명 전사에 467명이 부상했다. 이후에도 사단은 11월 9일 다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일시적 피탈되었으나 바로 역습으로 회복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참전용사 지상락(제5-35-3-9중대,'15)
실제 전투 당시 9중대 참전용사로 전투를 현장에서 했다. 북한군 공격으로 3번의 격렬한 전투를 햇고 중대원 1/2이 전사했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당시에 파놓은 교통호가 모두 포격에 무너져 내렸는데 나중에 그곳을 파보면 유해가 많이 있을 것이다. 북한군도 우리 함포에 많이 죽어서 함께 있다.
나. 참전용사 이영복(제5-27연대, '15)
351고지 전투간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더 많이 발생한 곳은 '53년도 6월인가 북한강 옆 황병동에서 중공군 기습에 말려 엄청난 인원이 죽었다. 시체를 시체창고에 마대를 만들ㅇ어 20~30여구식 보관하였는데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모른다.
다. 참전용사 예종원(제5-27-2-6중대, '15)
명호리 일대 351고지 전투간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시체를 매몰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당시에 바닷가에서 쏘는 함포에 피아 전사자가 다수 발생했다.
라. 현장 탐사 결과
요즘 탈북자 재월북으로 시끄러운 곳이다. 나는 바로 351고지 밑까지 들어가 현장 탐사를 했고, 이곳 전투에서 살아남은 생존 참전용사 소대장을 모시고 OP에서 육안 증언도 들었다.
많은 참전용사님들이 증언하기를 지금 351고지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성 능선 좌우 교통호와 고지 7~8부 능선에 구축되었던 벙커자리를 굴토하면 많은 유해가 있다고 자신했다. 물론 휴전 막바지에 제15사단이 피탕당하고 지금은 북한지역이다. 하지만 전사의 피해현황과 참전용사님의 증언 내용이 현격히 차이가 난다.
비무장 지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등골이 오싹했다. 전쟁전에는 아마도 이 고지 밑에 마을이 발전한 모양이다. 마을 모양의 담벼락이 돌로 형성되어 있고 고요한 활엽수 숲속에 풀벌레 소리만 요란하다. 저기 북한군 초소가 보이는데 아마도 우릴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