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11장 더 아프게 하는 위로
---(팟캐스트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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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우(甘雨) 라디오/TV)---
http://gamwoo.tv/천수답의-새벽묵상-욥기11장/
“자네는 말하기를, ‘나의 믿음은 순수하여, 주님 보시기에도 흠이 없다’ 한다마는”(욥 11:4)
세 번째 패널은 나아마 사람 소발이다. 그는 욥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그가 하나님을 향해 대드는 듯 하는 발언을 하자 분통이 터진 것 같다.
(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욥 11: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욥 11: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그 또한 동일한 사상, 모든 재난은 결국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는 전제에 시작한다. 그는 욥의 순수성을 하나님의 평가와는 전혀 다르게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을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소발은 “네 손의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며 자신의 판단과 선입견으로 욥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오 신이시여, 우리가 남의 신을 신고 보름 동안 걸어보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삼가게 하소서”라는 어느 아메리칸 인디언의 기도문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처지와 형편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선입견을 가지고 남을 평가하는 잘못을 종종 저지르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소발은 욥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그의 위로는 욥을 더욱 아프게 할 뿐이었다.
소발은 욥에게 “누구누구가 허황된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시는 이, 그가 알아보지 못할 악이 어디에 있겠는가! 거짓된 사람도 제 정신이 들 때가 오는 법, 들나귀도 길이 들지 않는가! 이제 마음의 고삐를 잡고 그에게 손을 내밀게. 악에서 손을 떼고 불의를 장막에서 몰아내게. 그리하면 자네도 아무 거리낌 없이 얼굴을 들고 아무 두려움 없이 떳떳하게 서게 될 것일세”(욥 11:11~15). 라고 조언한다.
아무리 좋은 말,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론짓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럴 것이면 우리의 위로조차도 상대방에게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얹어 놓게 될 것이며 상처를 헤집는 고통만 줄 뿐이다. 참된 위로와 격려는 고통당하는 자의 자리에 함께 서 주는 것이지 그 사람의 고통의 원인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지탄 받고 비난의 대상이 되던 사람들이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들려 나온 여인으로부터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삭개오등 하지만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셨을 때 한 번도 그들의 죄를 지적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것을 깨우쳐 주려고 시도한 적도 없다. 잘못과 실수는 깨우쳐 줌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지적을 받고 비난을 받아서 삶을 고칠 사람은 없다. 참된 사랑만이 죄인을 고치고 잘못한 사람들 변화 시킨다. “네 잘못은 바로 이거야!”라고 지적하는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위로가 고통 가운데 있는 친구를 더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인간들이 정해 둔 사랑의 테두리에 갇혀서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사랑으로 오히려 사람을 고문하는 일은 없는지
너무나 부족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재단하는 죄를 짓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욥기를 읽어 나갑니다.
주님,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대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