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말로
독재화
모든 군사와 정무는 왕명으로 나갔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이 직접 처결하였다.
황현은 이를 두고 독단적이라고 지적했다.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 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옆으로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와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발령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대원군은 국왕의 고유권인 인사권도 자신이 독자적으로 처결하였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
이에 명성황후와 조대비는 고종에게 그의 나라인지 대원군의 나라인지 반문하였다.
탄핵과 실각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와 고종의 견제로 1873년 11월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출입하던 전용문은 폐쇄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은 한동안 운현궁에 은둔하였다가 인왕산, 수락산 등을 방문한 뒤 양주군 시둔면 곧은골 별장으로 칩거했다.
곧은골은 1914년 가능리, 후대의 가능동에 흡수되어 직동 부락이 되었다.
그의 실각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민씨 집안은 권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권력남용과 함께 부정 축재가 심하였고, 일가가 권력을 독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점점 대원군 섭정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반의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대원군과 안동 김씨 김병학의 밀월 관계는 쉽게 잊어버리고, 대원군이 안동 김씨들에게 천대와 굴욕을 당하고 살았으며, 세도정치의 재발을 염려해서 가난하고 몰락한 집안 출신인 명성황후 민씨를 며느리로 간택했다는 이야기만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매천 황현은 대원군이 10년간 집정할 때의 위엄으로 '대원군분부'(大院位分付)란 다섯 자가 곳곳에 퍼져 뇌정탕화(雷霆湯火, 무서운 천중과 끓는 물과 달구워진 쇠붙이)같아 관리나 일반 백성들은 항상 관청의 법률에 저촉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이에 따라 대원군의 실각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
대원군은 큰아들 이재면을 왕으로 삼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재면과 이재선을 보던 중 나중에 이준용에 주목하게 된다.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이래 백성들의 주구를 감당할 길이 없어 오히려 대원군의 치정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명성황후의 온건 개항 정책에 반발한 조선 유림들은 다시 대원군 지지로 돌아선다.
쇄국정책을 펼쳤던 점이 조선의 유림들에게 높이 평가되어, 초기에는 명성황후의 고종 친정 정책에 지지를 보냈던 이항로-최익현 계열의 노론 화서학파는 명성황후의 온건 개화 정책을 비판하며 대원군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다.
실각 이후
고종 축출 쿠테타 기도와 실패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후 대원군은 기회만 오면 언제나 탐탁지 않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고 이준용을 왕위로 앉히려 하였다.
여기에는 이준용을 앉히고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대원군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고종과는 달리 이준용의 호탕한 성격도 대원군과 상통하는 면도 있었다.
한편 1874년 민승호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1876년 이준용 추대 음모에서 그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슬퍼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복수를 노린다는 소문도 돌았다.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의금부는 용의자로 지목된 장씨 성의 사나이를 체포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드나들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이었다.
장씨를 체포해서 국문, 처형했고, 신철균 역시 잡아다가 공초를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1876년 화적(火賊)의 주모자로 신철균을 다시 체포하여 국문했다.
이항로, 기정진, 유인석 등 유학자들의 지지 외에도 민씨 정권의 재정 탕진 역시 대원군의 재집권 명분을 쥐여주었다.
황현에 의하면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직, 돈을 주고 과거 합격증을 파는 일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개혁의 무효화
1874년부터 단계적으로 각지에 철폐된 서원들에 대한 복설과 부활조치가 감행되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인 천하장안은 최익현을 제거하려 했지만 곧 명성황후가 그를 유배보내면서 실패한다.
사색당파를 가리지 않은 인사정책도 단계적으로 폐지되었다.
1874년 봄 운현궁에서 나온 대원군은 양주군 직동으로 내려갔으나 고종의 대우는 매우 인색했다.
이에 민승호가 집권하여 청반에 있던 남인들을 완전히 도태시켰다.
어사들을 파견하여 남인, 북인 및 대원군의 빈객으로 있다가 수령이 된 사람들의 파직을 거론하여 이들이 거의 다 사직했다.
이때부터 남인들도 더욱 쇠퇴하여 어머니를 잃은 듯이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과 팔도 유생들은 서로 줄을 이어 대궐문 앞에서 규탄과 원망을 하였지만 고종은 이들마저 모두 물리쳤다.
민승호 폭사 사건
1874년 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해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주했다.
이때 민승호의 집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대원군이 지목되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 1874년 11월 민승호의 집에 폭발 사건이 벌어졌다.
대원군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민승호는 수재(조부모나 부모상을 당하면 그 자손된 사람 가운데 관리는 그 직을 사양하고, 선비는 과거 응시를 중단하고, 평민은 혼사를 중지하고 근신하면서 만 28개월 동안 복상하던 제도)하여 산승을 불러 아들을 위해 조용한 곳에서 기도를 드리게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외부로부터 함 한 개가 들어왔는데 기도를 드리던 중이라 나중에 열어본다며 미뤄두었다.
민승호 집에 함을 전달해준 사람은 이미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민승호는 의심했다.
그러나 기도가 끝나고 밀실로 함을 옮긴 뒤 민승호는 혼자 함을 살폈다.
함에 구멍이 있었고 자물쇠와 열쇠가 걸려 있었다.
그는 무심코 함을 열려고 하던 순간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불이 일어났다.
이때 민승호의 양어머니이자 명성황후의 어머니인 한창부부인 이씨 역시 현장에 있다가 죽고 말았다.
“함을 열어 보니 구멍이 있었는데,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겉에 열쇠가 있어 열어보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이 일어났다.
열 살인 그의 아들은 할머니와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었고, 민승호는 높이 떴다가 떨어졌는데 온몸이 시커멓게 탄 채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다가 하루 만에 죽었다. ”
민승호 역시 온몸이 시꺼멓게 타고 말 한마디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죽을 때 운현궁을 두, 세 번 가리켰다고 한다.
그 후 살인청부를 내린 사람으로 대원군을 지목했지만 끝내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말았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슬퍼했으며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원망했지만 복수하지 못했다.
때마침 흥인군의 저택에도 누군가 방화, 불이 났는데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흥인군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민승호 암살이나 흥인군집 화재 사건은 모두 대원군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비밀스럽게 조사를 했다.
얼마 뒤 장씨 성을 가진 남자를 붙잡았는데, 그는 신철균의 문객이었고, 신철균은 예전 대원군의 문하에서 나온 사람이라면서 죄를 씌웠다.
정적들과의 갈등과 이재선 추대 음모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의금부는 용의자로 지목된 장씨 성의 사나이를 체포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드나들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이었다.
장씨를 체포해서 국문, 처형했고, 신철균 역시 잡아다가 공초를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1876년 화적(火賊)의 주모자로 신철균을 다시 체포하여 국문했다.
1881년 9월 13일 대원군 계열의 인사였던 안기영 등의 주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이재선 추대 음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재선 추대 음모는 내부의 고변으로 실패하고 안기영, 이재선 등은 처형당했다.
이재선의 모역 사건에는 흥선대원군이 배후로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언급하지 않고 불문율에 붙여졌다.
민씨세도 용인과 권력투쟁
세도정치를 거부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세도가의 대상을 안동김씨나 풍양조씨에서 자신의 처가인 여흥민씨로 바꾸었을 뿐이고, 그 여흥민씨 세력이 유림과 손잡고 대원군을 축출(1874년)하기 시작하면서 민씨가와 대원군의 협력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임용한에 의하면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대상을 바꾸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대원군이 (집안에 재산이 있던 왕족으로) 가난한 파락호가 아니었듯이, 명성황후 민씨의 집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한 양반가가 아니었다.
명성황후가 여덟 살 때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흥 민씨가는 조선 시대에 왕비를 세 번이나 배출한 명문가였고, 명성황후는 그 중에서도 핵심 인물인 민유중의 직계 자손이다.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또한 민유중의 5대손인 민치구의 딸이다.
민치록은 아들이 없어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삼았다.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부대부인 민씨와 언니 동생뻘의 같은 항렬이며. 민승호와의 인연도 남달랐다.
민씨와 명성황후는 가까운 사이였고, 고종도 어려서 명성 황후를 알아서 안국동 이모 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즉 대원군은 철종의 처가인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자신의 처가로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초창기에는 민씨 정권의 세도를 일부 용인했으나, 권력을 독식하려던 민씨 일족이 대원군을 축출하면서 다시 권력을 획득하려는 대원군과 독식하려는 민씨 가문 간의 권력쟁탈전이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