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속의공간] ②간이역-안쓰러운 기다림, 밀려오는 그리움
간이역은 역과 역 아닌 것의 중간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새마을이니 무궁화니 통일이니 하는 이름을 지닌 기차들에게 그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면 되는, 역이 아닌 그 무엇이다. 그러나, 한때 비둘기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지금은 `특정통일'이라는 재미없는 이름으로 바뀐 완행열차에게 그것은 엄연히 멈추었다 가야 하는, 역이다. 속도와 능률을 숭상하는 이들이 보기에 간이역이란 거추장스러운 훼방꾼이 아니면 쓸모없는 우수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속도와 능률의 뒷전에서 느림과 비능률을 살(거나 꿈꾸)고 있는 이들에게 간이역은 삶이 본디 그러해야 할 꼴을 대리한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이 속도지상주의의 세계가 무시하고 지나쳐버린 가치를 그것은 표상한다. 그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적'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만한, 긍정과 부정을 두루 포함하는 성질의 것이다.
휴식, 호젓함, 아름다움, 소박함, 여행의 여유, 자연… 은 `간이역'이라는 말이 떠올리는 긍정적인 심상들이다. 외로움, 고단한 삶, 소외, 막막함, 벽지, 연착… 은 그 부정적인 짝패들이라 할 수 있다. 간이역에서 열차들은 그냥 통과하지 않으면 한정없이 연착한다. 그러할 때, 간이역으로 이르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연착을 일삼는 완행일망정 엄연히 기차가 발착한다는 점에서 간이역을 오가는 길이 아주 끊긴 것은 아니다.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인 길과 그럼에도 엄연히 이어진 길 사이에 간이역은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인데, 안쓰러운 기다림과 편안한 체념이 부딪치며 피워 올리는 긴장의 불꽃으로부터 시인·소설가들은 나름의 문학적 영감을 지폈음이다.
“배낭 하나 메고/협궤철도 간이역에 내린다/물이 썰어 바다는 먼데도/몸에 엉키는 갯비린내/비늘이며 내장으로 질척이는 수산시장/손님 뜸한 목로 찾아 앉으니/처녀적 점령군 따라 집 떠났다는/황해도 아줌마는 갈수록 한만 늘어/대낮부터 사연이 길다”(신경림 <간이역>).
길의 시인 신경림씨에게 간이역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으로 통하는 전초기지와도 같다. 생선 비린내와 유행가 가락에 둘러싸인 간이역 주변 시장에서 그는 아줌마의 사연과 뱃사람들의 울음을 줏어듣는다.
“한때나마 나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기차가 지나가듯이 벌판이 흔들리고/잘 익은 들녘이 타오른다/지는 해가 따가운 듯 부풀어오르는 뭉게구름//기차를 기다린다/지나간 일조차 쓰리고 아플 때에는/길 위가 편안하리라”(김수영 <간이역>).
젊은 여성 시인의 시에서 간이역은 청춘의 회한을 다스릴 교육과 성장의 장소이다.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그는 포기와 체념의 편안함을 배우는 것이다.
간이역을 그린 문학작품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곽재구씨의 시 <사평역에서>와 임철우씨의 소설 <사평역>일 것이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곽씨의 시를 읽고서 동향의 소설가인 임씨가 그것을 소설로 옮긴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청년은 무릎을 굽혀 바께쓰 안에서 톱밥 한 줌을 집어든다. 그리고 그것을 난로의 불빛 속에 가만히 뿌려넣어본다. 호르르르. 삐비꽃이 피어나듯 주황색 불꽃이 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져들고 만다. 청년은 그 짧은 순간의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어머니다. 어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앞엣것은 곽씨의 시의 앞대목이고 뒤엣것은 비슷한 장면을 묘사한 임씨의 소설의 일부이다. 아마도 시와 소설이 가장 행복하게 만난 경우로 기억될 이 작품들은 그러나 시와 산문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의 특성상 작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한마디로 뭉뚱그린다면, 임씨의 소설에서는 주인공들의 고단한 삶의 세목이 사실적으로 부각되는 데 반해, 곽씨의 시는 낭만적 아름다움으로 그것을 감싸안는다고 할 수 있다.
`사평역'이 지상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사실 역시 어지간히 알려진 셈이다. 역은 물론 기차길마저 지나지 않는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 대신, 전라선 압록역이 있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를 찾는다. 모악산과 마이산에서 발원한 순자강과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보성강이 합쳐져 섬진강 본류를 이루는 지점에 자리잡은 압록역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역으로 통한다. 산수유가 활짝 핀 역사 주변의 경관은 `과연 그러하다'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전라산 직선화 사업의 여파로 1997년 말에 새로 들어선 역사는 2층 높이의 버거운 덩치로 예전의 호젓함을 잃어버렸다. 98년 말에 부임했다는 범용(37) 역장은 “전철기와 신호기, 폐색기 등을 관리하는 기계실의 설비 규모 때문에 간이역의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게 됐다”며 미안해했다. ▶범용 역장 인터뷰
압록역에는 아침 7시 1분에 도착하는 익산발 여수행과 저녁 8시 1분에 도착하는 여수발 익산행, 두 `특정통일호' 열차만 정차한다. 이용객도 극소수여서 순천으로 통학하는 여대생과 역시 순천에서 장사를 하는 40대 남자 두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타고 내리는 고정 승객이다. 승객 수에 비한다면, 3명씩 2교대로 일하는 6명의 역무원 쪽이 훨씬 숫자가 많은 셈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될 미래의 어느 땐가는 이들마저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요컨대, 지금 간이역은 멸종 위기의 동식물과 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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