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noRPW6oMyfY
271회:아차산(용두열춘계행사)〕
1.일시:‘23.4.15.토.
2.참석자(65):이종원외64
3.코스:광나루역1번출구(5호선)-온달공원-생태공원-아차산동행숲길(만남의광장.아차산어울림광장)-낙타고개-고려정자-고구려정길(아차산성)-정이네서서갈비-콩마당-귀가
용두열하우스 우리들 소식난에 춘계 등산(아차산 둘레길) 안내가 뜬다.
2017년도 아차산 단체 사진 한 장도 올려졌는데 친구들 모습이 한층 젊고 활기차 보인다.
지금은 장년이니 아직은 추억을 더듬으며 살 나이는 아닌데도 세월이 많이도 변하게 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구들 아차산에서 더욱 반갑다.
온달공원에는 재성.문우.재환.태섭.희일이가 분주히 먹거리를 분류하고 있다.
아차(峨嵯)산은 한자로 높이(峨) 우뚝솟은 (嵯)산이란 뜻으로 '阿且山(언덕아.또차)'이라고도 쓴다.
아차산은 295.7m로 남산(243M)보다 높고 면적도 남산보다 넒은 광진구와 구리시를 잇는 산이다.
현대의 우리에게는 아름답고 수려한 산 에르모소(HERMOSO)산이다.
아차산 등산로는 크게 3가지코스로 나뉘어져 있다.
아차산성길(0.8km.50분).고구려정길 (0.7km.30분). 해맞이길(0.7km.30분)이다.
아차산에서 용마산과 망우산까지 4시간 등산을 마치면 망우리공원에는 어린이 아버지 방정환, 민족대표 33인의 오세창, 한용운, 천연두 지석영등 유명 인사들이 잠든 곳이다.
동행 숲길은 아차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어울림광장 생태공원은 아차산 등산로와 함께 연결되어 지금은 텃밭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능선에 올라서니 낙타고개다. 봄비가 오늘은 심술궂다.
낙타고개 바로 아래 고구려정에서 비도 피하고 이른 간식의 시간을 갖는다.
한강과 어우러진 도시 풍경을 즐길 수 있으나 오늘 흐린 날씨가 아쉽다.
올림픽대교와 잠실철교 건너 잠실의 제2롯데월드가 구름속에서 간간이 얼굴을 보여준다.
2017년도 용두열행사에서는 용마산까지 종주하며 보았던 남산과 북한산과 도봉산의 360도 파노라마는 실로 장관이었는데…….
서울 둘레길 묵동천,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을 통과하는 제2 둘레길은 전망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리져 있다.
峨嵯山은 삼국의 격전지로서 지금의 암사동유적지부근에 백제의 도읍 위례성이 가까이 있어서 군사의 요충지다.
阿且城은 광개토대왕이 아리수(한강)을 건너가서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장수왕이 개로왕을 처형한 곳이다.
고구려정에서 4보루 전까지 올라간 후 고구려정 길로 하산한다.
阿且城의 위치는 어디인가?
6인이 그룹지어 내려오면서 아차산성과 아차산성 유물 발굴장소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추어서 城의 내부가 어디인가 갑론을박을 한다.
峨嵯山을 백제가 지배했던 시기에 아차성(阿且城)을 만들어 아리수를 넘어온 고구려를 방어하였으니 성곽 넘어 남쪽방향에 城내부가 있겠다.
안내판 글에는 7세기 이후 신라가 城을 축조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어서 아쉽다.
峨嵯山을 고구려가 점령했던 시기에 정자를 만들었으니 이름은 고구려정(高句麗停)이라 이름지었으니 숙제가 풀린다.
峨嵯山 6개의 보루(堡壘)는 400~500m간격으로 만들어저 있으며 장축이 100m가 채 안되는 소형이며 가장 큰 4보루는 80m라는 사실을 덧붙인다.
堡壘에서 출토되는 철촉과 무기류를 통해 주둔인원을 산출해보면 작게는 10여명과 많은 경우에는 100명까지도 주둔했으리라 추측하고 내부시설로는 주거공간과 취사공간 등으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아차산을 오른 후 광나루역쪽으로 하산하는 모든 길은 아차산동행숲길 만남의광장에 이르게 된다.
阿且城과 堡壘를 이야기하느라 6인이 서서갈비집에 늦게 도착하게 된다.
코로나로 2년만의 만남이어서 그런가 콩마당집에서 2차 또다시 서서갈비집에서 3차가 만들어진다.
3차에서는 어떠했냐고?
물었던 질문 또 하고 했던 이야기 또 하고 3차가면 더 즐거워지는 인생이 된다. 더 이상 지나치지 만 않는다면 3차 한 번쯤이야ᆢ하고 웃는다ᆢ^^.
3차 술값 서로 계산하겠다고 하는데 진국이가 80만냥이 아니고 8만냥이어서 자기가 결제 한다고 겸손의 말씀을 한다 …^^.
지공선사(지하철 공짜어르신)들은 중년일 뿐이다.
UN이 발표했다는 새로운 연령기준을 보면 중년은 66-79세요 노년은 80세-99라고 하며 100세 이상은 장노인이라고 한다.
명의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 약보(藥補)보다 먹는 식보(食補)가 낫다 하였다.
바야흐로 나물의 계절이다.
아파트 주일장에 곰취.미나리.머위.방풍나물.곤드레 나물.비름나물들을 3000냥 어치면 마눌님과 다음 주 장날까지 먹는다. 상추와 쑥갓은 365일 나온다.
명의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보다 걷는 행보(行步)가 낫다고 했다.
누우면 약해지고 병들게 되지만 걸으면 건강해지고 즐거워 질 수 있다.
이를 누죽걸산, 臥死步生이라 한다.
우리들 에게는 돈도 필요 없고 마음의 결심만이 건강 補藥을 얻을 수 있다.
헤어지며 인사는 ‘건강해져서 다시 만나자’다.
2023.4.17.
--아차산 유래--
아차산에 대한 유래:옛날에 홍계관이라는 점쟁이가 점을 잘 본다는 소문이 있어서 명종이 불러서 여기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 맞히라는 문제를 내었다. 홍계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쥐 다섯마리가 들어 있다고하자 왕이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여기에는 쥐가 한 마리만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왕은 사기꾼이었다고 생각하고 감히 임금을 속인 죄로(기군망상) 홍계관을 산(아차산)에서 처형하라고 명령하였으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쥐를 갈라보았더니 뱃속에는 새끼 4마리가 들어있어서 그제서야 정확히 5마리였음을 알게 되었고, 왕은 뒤늦게 '아차, 내가 잘못 알았구나!' 하고 후회했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서 처형하지 말라고 했으며 하인이 산으로 가서 처형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그걸 본 처형수는 빨리 처형하라는 소리인 줄 알고는 처형해 버려 "아차!"했다는 이야기에서 아차산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아차산의 이름이 이미 있은 후에 홍계관의 이야기를 삽입한 경우라서 결과적으로 이 유래는 정설이 아니라 한다.
--바보溫達과 平岡公主:아차산에 6세기 애틋한 사랑 이야기--
삼국사기 기록 그대로 옮긴다.
온달장군은 고구려 영양왕1년(590년)에 아차산성에서 전사한 고구려 장군으로 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남긴 실존인물이다.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용모는 구부정하여 우스꽝스러웠지만, 속 마음은 환하게 빛났다. 집이 매우 가난하매 늘 음식을 구걸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찢어진 적삼과 헤진 신발로 시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희롱해 말하기를 “네가 늘 울어대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가 되지 못하고 마땅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리라.”라고 하였다. 왕이 매번 그렇게 말하더니, 딸의 나이 16세가 되자 상부(上部)의 고씨에게로 시집보내고자 하였다. 이에 공주가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고 하시더니, 이제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오히려 식언(食言)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극히 존귀한 왕께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에게는 농담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대왕의 명령은 잘못이므로 저는 감히 받들어 따르지 못하겠나이다.”
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니 진정 내 딸이 될 수 없도다. 어찌 함께 살겠느냐?
마땅히 너 갈대로 가거라.”
이에 공주가 보석 팔찌 수십 매를 팔꿈치 뒤에 매고 궁궐을 나와 홀로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보았다. 이윽고 그 집에 이르러 눈먼 늙은 어머니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고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여쭈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이는 가난하고 비루하여 귀한 분이 가까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냄새를 맡아보니 향내가 특이하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매끄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일 것입니다. 누구의 속임수에 빠져 이 곳까지 왔습니까? 내 아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산림속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가 오래인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공주가 집을 나와 걸어서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메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였다. 온달은 발끈해 말하기를 “이 곳은 어린 여자가 다니기에는 적절하지 않으니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리라.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라.” 하고, 마침내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 다시 들어가 온달 모자에게 자세하게 갖추어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우리 아이는 지극히 비루하여 귀인의 배필이 되기에 부족하고, 우리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진실로 귀인이 살기에는 적당치 않습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이라도 방아찧을 수 있으며, 한 척의 베라도 바느질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진실로 마음을 같이 한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다음에라야 함께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윽고 금팔찌를 팔아 밭과 집과 노비와 소와 말과 그릇을 사서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다 갖추었다.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일러 말하기를 “삼가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마시고, 모름지기 국마(國馬) 가운데 병들고 파리해져 쫓겨난 말을 골라 사십시오.”라고 하였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다.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이고 기르니, 말이 날로 살찌고 늠름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해서, 그때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귀신에 제사하였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매, 여러 신하와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갔다. 이에 온달도 그동안 기른 말을 타고 행차를 따라 갔는데, 그의 말 달리는 것이 늘 다른 사람보다 앞섰고, 잡은 짐승도 역시 많아서 견줄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오게 하여 성명을 묻더니, 놀랍고도 기이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즈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 요동에 쳐들어오자,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막아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부대가 승세를 타고 맹렬히 싸워 크게 이겼다. 공로를 논할 때 온달을 제일로 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왕이 가상히 여겨 찬탄하면서 “이야말로 내 사위로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했으며, 작위를 내려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총애와 영예가 더욱 높아지고 위세와 권위가 날로 융성해졌다.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생각컨대 신라가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베어가서 군‧현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통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번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원하오니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내주시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되돌려오게 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출정에 임해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 지역을 우리에게 되돌려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떠나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으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넘어져 죽고 말았다.
장사를 치르고자 해도 관이 여간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정해졌으니, 아아! 돌아가십시다.”라고 해서야 마침내 들어서 하관하였다. 대왕이 듣고 비통해하였다.
※ 원천자료 : 삼국사기 온달 전
※ 관련자료 : 신증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