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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6-16]
“헌신 vs 배신”
오늘은 종려 주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은 매우 중요한 절기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란 뜻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들의 따뜻했던 환대와 외침은
얼음보다 더 차가운 멸시와 조롱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당시 식사의 자세는 지금과 조금 다릅니다.
살짝 옆으로 누워서 먹는 자세였습니다.
그렇게 식사 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이 여인이 누구였을까요?
같은 이야기가 기록된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라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 본문으로 알려진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나왔습니다.
향유는 예로부터 굉장히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히말라야에서 자라는
‘나드’를 채취해서 가져오는 것이라
가격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삼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데,
300 데나리온이면
거의 일년 연봉과 맞먹습니다.
최저 임금으로 계산해도
약 24,700,000원이나 됩니다.
중형차 한 대 값이랑 맞먹는 금액이죠.
그걸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곤 예수님 머리에 붓죠.
아마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는
소리치며 말렸을 겁니다.
“아야! 너 뭐하노? 어? 빨리 안 치우나!”
8절을 보면 제자들이 ‘분개했다’라고 나옵니다.
얼마나 어의가 없는 행동이었으면
이렇게 반응했겠습니까?
그리곤 이들은 여자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쓸데없이 이게 뭐꼬?”
“이걸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어야지!”
경제 논리로 보면
그녀의 행동은 상식 밖이었습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제자들의 말처럼 구제 사역에 돈을 쓰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게 더 맞는 것 같이 보여요.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일은 세상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우리 10절과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10, 12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사건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었죠.
유대인들은 전통에 따라
죽은 자에게 향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뒤에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셨죠.
그러므로 주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의례를 받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이
이걸 알고 그랬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여인이
이런 행동을 했던 걸까요?
그녀에겐 주님이 가장 소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결혼할 때 가져가는 지참금 중에
향유 한 옥합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마저도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이 가장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남자 만나
호화로운 결혼식을 하고 잘먹고 잘 사는 것보다,
우리 주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가 되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셨어요.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더니
눈 옆을 가리켰습니다.
“이거 보세요.”
살짝 긁힌 상처가 보였습니다.
왜 그런 건지 물어봤더니
처음엔 대답을 안 했습니다.
나중에 간식을 사주며 다시 물었죠..
그제서야 친구가 휘두른 나뭇가지에 긁혀서
눈 옆이 다친 거라고 했습니다.
속상했습니다.
그 친구가 누군지 이름부터 물어봤습니다.
진서는 모른다고 했어요.
의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진서 상처를 보며 마음 아파할 때
갑자기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친구라고 여겼던 자들로부터
배신당했습니다.
따르던 무리들은 돌을 던지며 침을 뱉었습니다.
이걸 보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그러면서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내가 정말 작은 일로 인해
아빠로서 화가 났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고난을 보시며 속이 찢어졌겠다.’
그리곤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듯 크십니다.
그 사랑에 감동되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충만하면
향유 옥합도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이 사건 직후 가룟 유다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전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그에게
카메라 앵글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우리 본문 14-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14-16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당시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곁에 있었고,
특히 12명의 제자들이 특공대처럼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에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직접 그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곤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합니다.
이거 정말 기가막히고
코가 막히는 사건 아닙니까?
그 결과 은 삼십 세겔에 예수님을 팔아 버리죠.
은 삽십 세겔이면
송아지 6마리를 살 수 있는 가격이며,
노예 1명을 살 수 있었거든요.
생각보다 큰 돈입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려고 했을까요?
그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갖은 고생도 다 했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사탄이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런 끔찍한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요한복음 13장 2절을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을 팔면 은 30세겔을 받을 수 있는데
그냥 묵혀두면 너무 아까운 겁니다.
이전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진 거예요.
가룟 유다에겐 돈이 눈에 밟혔어요.
제가 중고등부 시절 수련회를 갔던
기억이 납니다.
저녁 예배 때 강사 목사님께서
미리 광고를 하셨어요.
“내일 저녁에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가지고 나오세요.”
순수했던 청소년들은
저마다 뭔가를 챙겨 나왔어요.
어떤 친구는 지갑에 있는 돈을 드리기도 했고,
노는 친구는 담배를 드렸어요.
또 어떤 학생은 가져온
포커와 고스톱도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아는 형이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가 뭔가를 상자에 넣고 오는 겁니다.
나중에 물었어요.
“형 뭐 드린거야?”
“응, 핸드폰”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동시에 대단하다는 존경의 눈빛을 보냈어요.
그렇게 모든 수련회 일정이 마치고
짐을 싸서 버스에 탔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거예요.
한참을 기다리다 찾으러 갔을 때
저 멀리서 그 형이 뛰어 내려오는 겁니다.
“형 어디 갔었어? 한참 기다렸잖아.”
그러자 형이 대답했어요.
“어, 핸드폰 낸 거 도로 받으러 갔어.
근데 이미 가져갔나봐, 안 보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기꺼이 드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드렸지만 이 형처럼
다시 찾으러 가고 있진 않습니까?
요즘 경제가 너무 어려운 걸 다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기억하기로 우리나라 경제가
지난 30년 넘게 어렵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IMF, 세계 금융 위기, 코로나19 등
끊임없이 경제는 어려웠습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경제 문제도 해결 될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그렇다고해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도
약해지면 안 되잖아요.
왜요?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 눈 앞에 돈을 가져다 주면서
이걸 더 섬기라고 말하죠.
세상에서 옆 사람과 비교하면서
‘이게 더 편하다’는 인식을 줍니다.
그러면 그걸 섬기고 싶어져요.
ex) 이번주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큰아들이 감기에 걸렸습니다.
아침에 열을 쟀는데 조금 열이 있더라고요.
심하진 않아서 학교를 보냈습니다.
대신 방과 후 교실, 학원은 모두 쉬게 했죠.
큰아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병원을 다녀왔고,
의사선생님이 한 말을 전달해 줬습니다.
“진우야, 감기가 동생에게 옮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셨어.
오늘 아파서 학교 못갈뻔 했잖아?
그러니까 조심해야해.”
그러자 큰아들이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서야,
너 감기 걸리면 유치원 안 갈 수 있어.”
그러자 진서가 말했습니다.
"형, 그러면 감기 옮겨줘.“
진서가 보기엔 형이 감기에 걸려서
학원을 안 가는 게
더 좋아 보였던 겁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남들과 비교하게 되는구나.
그리고 남들이 말하는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
세상 방법을 택할 수 있겠구나.'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펴게 해 줄
은 삼십 세겔에 불과했습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생겼다고요?
사탄이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을 때부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어요.
어떤 때는 굉장히 대의를 위한 것 같지만
결국 인간의 이기심에 따른
교만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의 더러워진 모습,
헝클어진 것들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고치게 만들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바꾸십니다.
때론 내 생각과 내 뜻이
우리를 헝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일주일간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
당연히 여러 모양의 죄가 묻습니다.
이걸 보게 하는 게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걸 깨끗하게 씻겨주는 것이
예수님의 보혈이죠.
주님은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것을 깨닫지 못해
예수님을 파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의 끝은 은 삼십 세겔로
더 풍성해 진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불행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어땠나요?
그녀의 헌신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주님께 칭찬받는 일꾼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가장 사랑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마리아의 향유가 예수님의 머리를 타고
바닥까지 흘렀을 때
모든 사람이 그 향내를 맡았을 것입니다.
그 향기는 그녀 주위에 강하게 풍겨났죠.
아마 그 자리에 있었던 어떤 사람은
나드 향유 냄새를 처음 맡아본 자도
있었을 거예요.
그들은 모두 좋은 향에 흠뻑 취했죠.
예수 믿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가 증거되길 바랍니다.
이번주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이 기간에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길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돈의 유혹 앞에서도
당당히 이겨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2세의 아리따운 처녀가
독일 뒤셀도르프의 미술관을 들렀습니다.
한참을 둘러 보던 중
한 그림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림이었죠.
그 그림의 아래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이케 호모 ECCE HOMO” (보라 이 사람이로다)
이 말은 빌라도가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가리키며 유대인들에게
외친 소리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엔 또 다른 문구가
쓰여 있었어요.
“나는 널 위해 이 일을 행하였거늘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려느냐?”
그녀는 생전 처음 본 그림과 글귀로 인해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받은 큰 충격과 감동을
곧장 메모지에 옮겨 기록했습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그녀는
낮에 적은 글이 생각났어요.
얼른 꺼내서 읽기 시작했죠.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미술관에서 느꼈던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형편 없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메모지를 꾸겨 벽난로에 던졌어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메모지가 적힌 종이가
또르르 굴러서 그녀에게 오는 거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구겨진 종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회자이신 아버지께
불에 타지 않는 시를 보여주며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시라고 칭찬하며
더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시가 다음과 같습니다.
네게 내 몸을 주었건만
너는 내게 무엇을 주었느냐?
널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버렸느냐?
널 위해 모든 것을 견뎠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참아 냈느냐?
네게 귀중한 선물을 주었건만
너는 내게 무엇을 주었느냐?
그 후 이 시는 미국의 복음찬송 작곡가인
필립 블리스를 만나 명곡으로 태어났습니다.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입니다.
처음 이 찬양의 곡명은 ‘케노시스’예요..
이는 헬라어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리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낮아지진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널 위해 이 일을 행하였거늘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사랑하는 부모이신 성도님들,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길
가장 좋은 유산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유산’ 아닐까요?
부모인 우리가 먼저
돈보다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보고 배울 거예요.
그리고 이 아이들도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부모님을 기억하며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헌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