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반한 한시(漢詩)
을사년 설날이다. 새해를 맞은 아침은 세시 음식으로 떡국을 먹고 ‘설날 떡국 소회’를 남겼다. “지나간 동짓날에 해넘이 팥죽으로 / 다가올 한 해 동안 액운을 물리치고 / 을사년 설날 아침에 떡국 대접 차렸다 // 누구나 떠밀리듯 나이를 더 보태도 / 기력은 쇠락 않고 정정히 지켜내어 / 남에게 기대지 말고 활기차게 보내자” 지기 안부로 넘긴 ‘고향 산천’에 이어 한 수 더 보냈다.
서울서 먼 길 목포 처가를 둘러 온 큰 녀석네들이 들이닥쳐 집안이 북적해도 나는 내대로 서재에서 독서삼매에 들었다. 설날 연휴가 도서관이 휴관이기도 하지만 날씨가 추워 어디로 나다닐 여건이 되지 못함은 예상했다. 그제는 노인에 드는 이야기를 엮을 책을 펼쳤고, 어제는 초보 탐조객이 쓴 기록을 읽었다. 설날에는 엄동설한에 호사스럽게도 꽃 구경을 나서는 책이 기다렸다.
나는 현역 시절에도 여가를 보내는 별다른 취미 활동이 없었다. 혼자서는 물론 여럿이 함께하는 취미는 더더구나 없다. 이른 아침 산책이나 주말에 등산 정도는 다니면서 들꽃을 완상함이 취미라면 취미다. 야생초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봄날에는 제철 산나물도 마련해 식탁에 올리거나 이웃과도 나눈다. 날씨가 몹시 춥다거나 더우면 도서관을 찾았고 비가 와도 그곳이 안성맞춤이다.
이번 책은 내가 평소 관심을 둔 꽃을 다루면서도 좀 특이했다. 서울대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선후배가 울산으로 내려가 같은 대학에 재직했다. 세 학자는 나이 차가 있으며 막내는 여성이었다. 그러함에도 셋은 한시를 연구하는 공통점에다 우리 글로 푸는 ‘꽃시’를 찾아 야외로 탐방을 같이 떠난 동호인으로 활동했다. 같은 학문의 길을 걸으면서 취미 활동도 부러움 살 만했다.
나의 독서 편력에서는 한시를 우리 글로 풀어 놓은 책을 더러 펼쳐 보기도 한다. 유수 대학에는 한문학과가 있고 중문학과도 있다. 여기다 국문학과에서도 한문학이 한 영역을 이루기에 한시를 다루기도 한다. 후자에 속하는 나는 한시 문턱 언저리를 서성여서 당송을 비롯한 중원에서 전하는 작품은 극히 미미하고 우리나라 역대 문사들의 무궁무진한 한시도 일부만 이해하는 정도다.
합포 추산공원에 월영대를 읊은 한시가 빗돌에 새겨 있고 양산 물금 임경대에는 그보다 더 유명한 문사들의 한시가 새겨진 빗돌 앞에 발길이 오래 머문다. 고향 형님이 펴낸 ‘운강 산고’ 100여 수 한시를 우리글로 풀어내기도 했다. 앞서 내가 별다른 취미 활동이 없다고 했는데 꽃을 소재로 한 한시를 풀면서 야생화 탐방 나서는 이가 가까이 있다면 도시락 싸서라도 따라붙고 싶다.
태학사에서 ‘알고 보면 반할 꽃시’는 앞서 언급한 세 학자 성범중, 안순태, 노경희 공저였다. 선배 성 교수가 정년을 맞으면서 두 후배가 그에게 기념으로 헌정한 책이었다. 우리나라 한시는 최치원 이후 1000년 넘게 국문학의 한 영역을 차지해 수천수만 편이 전한다. 그 소재도 다양한 인간사나 자연물을 시상으로 그려냈는데 세 사람은 꽃을 다룬 작품을 찾아 집중해 탐구했다.
5언과 7언으로 나뉜 한시인데 이 책은 주로 고려 이규보 이후 내로라하는 문사가 남긴 꽃시에서 7언 절구로 남긴 작품이 많았다. ‘겨울의 끝에서 봄을 기다리며’ 편에서는 동백꽃과 매화와 수선화였다. ‘봄꽃 만발하다’에서는 진달래꽃과 산유수꽃을 비롯해 32수였다. ‘여름 한가운데서’는 봉선화 외 13수였고. ‘홀로 가을을 맞이하네’에서는 억새꽃과 갈대꽃과 국화를 소개했다.
이 책을 엮은이는 한시의 주석은 물론 그 꽃의 특성과 얽힌 얘기들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삽화로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비롯해 옛 그림 가운데 꽃을 옮겨와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특히 1910년대 우리나라 선교사의 아내로 순천에 머문 플로랜스 해들스턴 크레인이 남긴 ‘머나먼 한국의 야생화 이야기’에 실은 그림을 접하게 되어 흐뭇했다. 한 권 책에서 한 해 꽃을 두루 둘러봐 행복했다. 25.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