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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peater
제1독서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9,1-6
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2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3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4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6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2,11-14
사랑하는 그대여,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3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5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7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한 아기의 탄생으로 어둠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빛을 보게 된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음을 상기시킨다(제2독서). 마리아가 해산 날이 되어 아들을 낳자,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그 아기는 구원자라 전하며 수많은 하늘의 군대와 함께 하느님께 찬미드린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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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다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자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오늘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라고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 전체의 요약이라 하겠습니다. ‘로고스 찬가’로 알려진 이 서문은 창조 이전의 “한처음”(1,1.2)에서 시작하여 창조를 거쳐(1,3 참조) 여러 세기에 걸쳐 준비된 말씀의 육화 사건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라는 구절은 이 찬가의 핵심으로, 그리스 말을 그대로 옮기면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입니다. ‘살’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자 피조물로서의 특성을 가리키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는 교리에는 익숙하지만, 그분의 몸이 우리의 몸처럼 피로를 느끼고 병에 걸릴 수 있으며, 죽을 몸이요 냄새가 날 수도 있고 더러워지기도 하는 살이라는 사실에는 당혹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육화의 진실입니다.
육화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이요 사랑 고백이라고 신학자 칼 라너는 말합니다. “‘영원이신 분’이 ‘시간’이 되셨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모든 현실에 대한 마지막 설명이신 분이 육신이 되셨다. ……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말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깊은 말씀을 세상에 보내셨다. …… 바로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 오시면서 하시는 말씀, ‘세상아, 너를 사랑한다, 사람아, 너를 사랑한다. 바오로야, 데레사야,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기에 너와 같이 되었다. 네가 되었다. 너의 그 비참함, …… 너의 죽을 운명까지도 나의 것으로 삼아 너와 일치되고 싶었다’”(『소 전례력, 기도의 길』, 15-16). 이는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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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으로 당신 자리로 삼으신 곳은 ‘구유’였습니다. 구유는 ‘여물통’입니다. 더럽고 냄새납니다. 볼품없고 너무나 하찮은 곳입니다. 결코 메시아가 누울 자리가 아니지만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가장 거룩한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구유 안에 담겨 있는 이 신비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구유’와 같은 장소가 있습니다. 죄로 더러워지고 얼룩져 보여 주기 싫은 곳, 바로 그곳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거처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더럽던 그곳이 가장 거룩한 곳,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빛이 되어 주셨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티토 2,14).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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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내리는 한 줄기 빛에 모든 이가 감사하고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우리가 이 밤을 보내며 더없이 기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마침내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빛이시며 은총이신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에 따르면, 그는 ‘놀라운 경륜가’이자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며, 다윗 왕좌에 앉아 공정과 정의로 영원히 다스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그런 위대한 분의 탄생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왕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나름 편안하고 아늑한 환경에서 태어나실 법한 기대와 달리, 여관방조차 얻지 못하여 마소의 여물을 담아 두는 구유를 첫 안식처로 삼아야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탄생하신 임금께서 앞으로 걸으셔야 할 길이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이처럼 당신 백성을 섬기러 오신 메시아께서는 세상에 오시는 순간부터 열악하고 비천한 환경을 택하시어 가장 낮은 자리, 곧 섬기는 자리에 머무셨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여관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을까요? 일부러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려 온 구원자께서 이제 막 세상에 오셨는데, 그들은 여관의 작은 방조차 내드리지 않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기쁜 날, 세상일과 걱정에 사로잡혀 주님께 우리 마음속 작은 공간 하나 내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여 봅시다.(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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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기 예수 탄생하셨으니 …… 성탄~ 성탄~ 성탄~ 기뻐할지어다”(가톨릭 성가 103번, ‘오늘 아기 예수’). 오늘 밤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지만, 어둠 속을 걷는 백성과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아기의 탄생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대비시킵니다. ‘존엄하다’는 뜻을 가진 아우구스투스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막강한 제국의 황제로서 ‘주님’과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구세주’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황제의 명령으로 아기의 부모와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지금 태어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힘없이 누워 있는 아기가 그 황제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힘과 대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전혀 다르게 드러납니다. 구세주이신 분은 황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보내진 갓 태어난 이 아기입니다. 이 아기가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당신을 온전히 다 내어 주시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비추어야만 하기에, 사람들은 어둠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이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티토 2,11)입니다.
오늘 밤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당신을 사랑하도록 예수님 안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은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 마음을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큰 사랑의 선물 앞에서 감사드리고, 우리도 이제 선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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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께서 탄생하신 밤, 천사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달받은 이들은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벗어나 들에서 야영하며 양들과 지냈기에 몸에서 늘 가축 냄새가 배어 나던 이들입니다. 게다가 흙먼지로 불결하고, 초라한 차림으로 다니니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주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이들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여 사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하던 목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목자들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된 삶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비추어진 큰 빛이야말로 그들이 오랫동안 짊어진 멍에를 부술 평화의 한 아기의 태어남을 뜻한다고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의 천사도 태어난 아기로 말미암은 평화를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알려 준 아기는 “구원자, 주 그리스도”로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평화의 군왕”이십니다.
또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며 구세주 탄생의 신비를 더욱 확실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끝없는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뵌 목자들처럼, 세상 눈에는 변변하지 못한 인생일지라도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감이 이 밤에 절로 생깁니다. 평화가 끝없이 이어지기를 이 거룩한 밤에 오신 구세주께 은총을 청해 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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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사의 독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의 광채로 이 거룩한 밤을 밝혀 주셨음을 전하는 소식을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시련과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빛이 비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예언자는 이 빛이 기쁨을 주는 이유에 대하여 말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이 빛은 기쁨과 희망을 주는 구원의 빛입니다. 그 아이는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왕좌에서 다스리러 올 것입니다. 이사야 신탁의 첫 번째 성취는 아하즈 임금의 아들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성취는 이런 장엄한 신탁의 가치를 채워 주지 못하였고, 오랜 세월을 두고 메시아 탄생의 예고로 이해되었습니다.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총, 곧 하느님의 무상적이고 인자로운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성탄에 우리 세상을 밝혀 주는 것은 바로 모든 이에게 구원을 전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복음에서는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이 있었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음을” 알려 줍니다. 어둠 속의 빛, 밤을 밝혀 주는 빛이라는 주제가 떠오릅니다. 이 빛은 전혀 예기하지 않은 특별 현상, 곧 신적 개입을 드러내는 현상이기에 목자들은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비로소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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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를 찾지 못한 마리아와 요셉은 가축이 있는 베들레헴의 동굴로 피신합니다. 이렇게 초라한 동굴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놀라운 소식이 근처에서 양들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천사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주었는데, 그들 또한 천사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곧바로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성탄을 다시 체험하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만남의 은총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늘의 목소리, 우리에게 믿음의 원칙과 규칙을 전해 주는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고 우리 안에서 성탄의 은총과 기쁨을 다시 살아가려고 한다면, 가장 큰 영예로운 첫 번째 도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타나 주님 탄생 소식을 알려 준 다음 한밤중의 침묵과 어둠이 다시 땅을 뒤덮습니다. 목자들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뒤척이거나 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믿음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목자들은 그런 일이 일어난 곳이 어디인지 잘 알지 못하였지만, 서둘러 그곳을 찾아가 외칩니다. “참으로 당신은 신비로운 하느님이십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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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든 밤.” 이 밤에 우리는 깨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이, 남녀노소 모두 구유에 누워 계신 구세주를 경배합니다.
이 성탄의 기쁨을 가장 먼저 알고 베들레헴에 달려온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목자들에게 알려 주었고, 그들은 달려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마리와 요셉에게 천사들이 알려 준 소식과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을 전해 주었습니다.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주님의 영광 앞에 서 있는 목자들의 두려움은 당연합니다. 그 두려움은 세상의 권력과 명예, 재물에 대한 걱정에서 오는 번민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을 접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두려움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잠기면서 기쁨과 찬양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 앞에 머무를 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특히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와 평화를 주십니다.
이 밤에 우리는 비천한 인간을 돌보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이 밤의 차디찬 공기까지 우리가 받은 축복으로 따듯해집니다. 오늘 밤에 우리는 하느님의 품에 깊숙이 안겨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생명의 은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우리 안에 솟아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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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갓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지요. 이는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행위를 뜻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밤새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지요. 목자들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양 떼와 함께 잠도 들판에서 자야 했지요. 그래도 빈 들판을 지키며 하늘을 바라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밤을 새우는 목자들은 누구입니까? 열심히 일하는데도 시련만 겪는 이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주어지는 온갖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기다리는 겸손한 이들이지요. 이분들이 주님을 먼저 뵙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님이 가장 필요한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마음을 못 열고,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아기 예수님의 빛이 가장 필요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도록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함께 나눌 때, 이 어두운 사회에 빛을 비추게 됩니다. 이럴 때 2천여 년 전 들려왔던 저 아름답고 평화로운 천사들의 노래가 어둠 속에서 다시 들려올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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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과 대축일에 사도신경을 외울 때, 특별히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오늘 성탄 대축일에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에서 고개를 숙여 깊은 절을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때 무릎을 꿇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다는 엄청난 신비 앞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흠숭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득, 이 무릎 꿇음과 성지 주일이나 성금요일 수난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단락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겹쳐집니다. 전례상으로는 특별히 이 둘을 연결 지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깊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만이 아니라 그분의 태어나심은 이미 ‘주어짐’입니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누리시려고 인간이 되시고 세상에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지시려고 태어나십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그렇게 태어나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사도신경을 바치며 드리는 깊은 절은,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신’ 분께 드리는 흠숭과 경배이며 또한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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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짧은 한 구절이지만 한없이 심오한 말씀입니다. 오늘과 12월 31일 이틀에 나누어 묵상해도, 주마간산 이상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씀’은 그리스 말로 ‘로고스’입니다. 본디 뜻은 ‘말’이지만 그리스 철학이나 구약 성경 말기의 개념으로는 이 세상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는 근본 이치, 논리 등으로 매우 중요한 어휘입니다. 우리가 그 깊이를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일단 그 ‘말씀’은 영원불변이었고, 온 세상이 그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사람’, 더 정확히 말하면 ‘살’이 되십니다. ‘로고스’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의미를 갖지요. 영원한 이치가 살덩어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 복음이 이원론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원론에서는 서로 대립하고 완전히 분리되어야 할 두 가지 원리가 요한 복음에서는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이 된다는 것은 불이 물이 되거나 바다가 땅이 되는 것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 성탄입니다.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요한 3,16 참조).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피조물이 되어 오시다니,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기 힘으로는 손발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시어 연약하고 가냘픈 여인의 젖을 물고 계시다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 신비 앞에 그저 무릎을 꿇고 흠숭과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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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려고 태어난 듯한 자매가 한 분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자매의 아들 친구가 흉기에 맞아 큰 상처를 입고 전신이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자매는 다친 아들 친구를 위해 『성경』을 필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자매는 말씀을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그 청년의 마비된 전신이 움직여 회생하는 모습을 상상하였습니다. 일 년이 지날 즈음 그 청년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청년은 사회에 복귀하여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성경 말씀을 쓰며 기도했다는 것을 본인은 물론 그 가족도 모르고 있습니다.
‘가톨릭 굿뉴스’에서 이봉순 님의 기도 체험 글을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라고 했지요. 우리 주변에서 말씀을 통해 변화되고 치유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 생겨났고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피조물을 변화시키고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탄생과 공생활,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온 생애가 말씀이십니다. 2천 년 전 병자를 낫게 하시고, 억눌린 이,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시며 온전히 사랑하셨던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말씀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성탄은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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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고, 지금도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주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요한 복음은 결론 내립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는 ‘말씀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실 때도, 눈먼 이를 눈 뜨게 하실 때도 ‘한 말씀’뿐이었습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탈리타 쿰!”이라는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발음 그대로’ 복음에 남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을 믿고 사는 신앙인의 말에도 힘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이라면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위력이 넘치는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요? 말로써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말로써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서운했던 말은 잊어버리고, 고마웠던 말은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남을 위해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성탄 미사 때,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이를 위해 기도한다면 또 다른 축복의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으로 살다가 당신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도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우리 마음은 살짝 쉬어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즐거운 성탄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제가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왔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십니까?
1) 직원을 불러 항의해서 나온 음식을 되돌려 보내고, 자기가 주문한 음식을 받는다.
2) 그냥 먹는다.
3) 항의 후, 기분 나쁘다면서 나가 버린다.
뭐, 답은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2번을 선택합니다. 착해서가 아닙니다(실제로 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음식도 괜찮기 때문입니다(이 점은 부모님께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편식하지 않고 어떤 음식이든 다 잘 먹으니까요). 솔직히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이런 부분에 제 감정을 쏟고 싶지도 않고, 부정적 생각으로 나를 더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까다롭고 완벽한 척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자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과 화합하지 못하니 당연히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불편함을 느끼기에 세상은 더 좋은 곳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닌, 그냥 불편함만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그리고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불편한 자리가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고, 이를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하느님이심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를 취해서 우리 역사 한복판으로 오신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불편한 길이었고, 또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된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탄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 수도 또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사랑을 치료한다. 받는 사람, 주는 사람 할 것 없이(K.A.매닝거).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으면 성탄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한 형제가 산타복을 입고 나와 아이들을 위해 캐롤송도 불러주고, 작은 성탄 선물도 나눠주고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아이들 가운데에는 한 살도 채 안 된 갓난아기도 있었는데, 따뜻하신 어머니 원장님께서 집중 마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포대기 위에 누워있었는데, 우리 형제의 재롱 잔치를 보고서는, 누워서 깔깔 웃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크신 자기 낮춤,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는데, 백마를 탄 왕의 모습이라든지, 전지전능한 해결사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머리도 돌릴 힘도 없는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힘이나 권력, 총이나 칼이 아니라 작음과 겸손,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될 것임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명명백백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탄 미사를 드리러 온 아이들을 보면서 제 어린 시절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서울 근교 산 중턱 판자촌에 살았었는데, 함박눈을 맞으며, 어머니 손을 잡고 십리 길을 조심조심 걸어 성탄 밤미사를 드리러 가곤 했습니다.
성당은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니라 군용 천막이었습니다. 미사 시간 내내 너무나도 추워 코끝까지 다 시렸지만, 선교사 신부님의 미소와 넓은 품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끝나고 나면 선진국에서 보내준 구호품 나눔이 이어졌습니다.
꼬마입장에서는 꽤 벅찬 성탄 미사를 다녀오는 조건으로, 직장 일이 끝난 아버지는 양손 가득 성탄 선물로, 당시로서는 어린이들에게 최상의 선물이었던, 큼지막한 ‘오리온 종합선물세트’를 들고 오셨습니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밤새 이 과자 저 과자 맛보면서 그렇게 성탄절을 만끽했습니다.
은총과 축복의 성탄 전야에 성탄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성탄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에게 건네시는 종합선물세트!’
완성을 추구하지만 언제나 미완성인 우리들, 완벽을 추구하지만 늘 결핍된 존재인 우리들, 충족함과 충만함을 갈구하지만 늘 뭔가 허전하고 허탈한 우리들의 그 부족함과 한계를 가득 채워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값지고 정성스런 선물이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세상 가장 작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육화강생에 담긴 그 큰 은혜와 감동, 우리를 향한 큰 사랑과 깊은 의미를 침묵 속에 천천히 되새기는 이번 성탄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탄절은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으면 성탄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 내면에 자비와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주님 사랑의 기운이 있다면, 우리 안에 주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정화될 때 성탄의 참모습이 우리 앞에 드러납니다. 매일의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환하고 해맑게 웃으면,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겸손하신 하느님을 따라 심연의 바닥으로 내려갈 때, 우리는 거기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신 아기 예수님을 따라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겸손의 향기가 풍겨날 때, 우리의 얼굴은 성탄의 은총으로 빛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먼저 자막으로 나오고, 조연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보조 출연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다음에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와 함께 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조명, 미술, 의상, 카메라, 대본, 투자 기업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감독의 이름이 나옵니다. 한 송이 국화가 피기까지 소쩍새가 여름 내내 울었다는 시가 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신축에도 많은 분이 함께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성당 마당의 보도블록에 함께 했던 분들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분의 땀과 눈물이 모여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2025년에도 본당에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드러나 보이지만, 사목회와 많은 봉사자가 함께했기에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성탄이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준비된 구원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그 준비의 중심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 사자는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했습니다. 겸손과 순명의 길을 걸어 성탄의 길을 닦은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이다.” 이는 자연 현상의 예언이 아니라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 참된 평등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상징적 메시지였습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언덕은 낮아지고, 굽은 길은 곧게 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세상에는 차별이 사라지고, 약한 이들이 높아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탄의 길을 이어 준비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에게 나타나 늙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 아이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이 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도 나타나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하며 완전한 순명의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다가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예언이 있었고, 천사의 메시지가 있었으며,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그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절망,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을 것입니다. “형제에게 한 일이 곧 하느님께 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 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매일 매일이 바로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1년 내내 12월 25일이라 해도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 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주님의 성탄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 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s”
<아기 예수님께서 밥그릇에 누우시네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밥을 먹어야 살 텐데
밥이 있어야 먹지요
밥을 찾는 이 많아도
밥이 되려는 이 없어
텅 빈 밥그릇에
오늘밤
아기 예수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누우시네요
서른 세 해
믿음으로 뜸들어
믿음밥으로 먹히실
아기 예수님께서
서른 세 해
희망으로 뜸들어
희망밥으로 먹히실
아기 예수님께서
서른 세 해
사랑으로 뜸들어
사랑밥으로 먹히실
아기 예수님께서
애써 밥을 찾기보다
기꺼이 밥이 되려는
당신 닮은 사람들
자그마한 품에
누우시네요
믿는 벗님들께
희망하는 벗님들께
사랑하는 벗님들께
너무 기쁜 오늘이기를
너무 벅찬 오늘이기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탄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충만한 기쁨과 평화를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으며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전하며 장엄한 찬미가를 들려주었습니다. 먼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고백은, 한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뜻합니다. 곧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고백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곧 이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랑할 때 언제나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함께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목숨마저도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모든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마저도 함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마저도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아니 영원히 늘 함께하시며 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 성탄 대축일, 우리 안에 새로 오신 주님께서 앞으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면서 그 벅찬 사랑의 시간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요셉의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곧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절대로 혼자만의 힘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우리의 탄생 자체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입니다. 곧 생명도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의 인생 역시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도 인간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그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곧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 갈 때 참된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서울대교구장 성탄 메시지 ’25/12/25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이사 9,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을 맞아 강생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에게 충만히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삶의 상처와 외로움, 고립과 불평등 속에서 고단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희망의 빛이 넉넉히 스며들기를 청합니다.
올해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들’ 희년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성탄을 맞습니다. 순례의 길에서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어오신 주님을 더욱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성탄의 신비는 우리 마음에 새 힘을 주며, 구원의 희망을 다시금 밝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동방 박사들이 별빛의 부르심에 응답해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섰듯, 우리도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작은 사랑의 불빛을 들고 희망의 여정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고통과 외로움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곧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일상에서 나누는 작은 친절과 한 사람을 품어주는 따뜻한 마음이 바로 성탄의 신비를 드러내는 가장 구체적인 표지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태 1,23)는 약속은 우리가 서로에게 다가갈 때 더욱 선명히 드러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장 깊은 근거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창조되었으며, 그 친교는 이웃과의 연대와 나눔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은 이 친교를 약하게 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공동체까지 흔들리게 합니다(창세 3–4장, 11장 참조). 바로 이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시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어둠 속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참된 은총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루카 3,4; 이사 40,3)라고 외칩니다. 성탄을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교만을 낮추고, 분열과 단절의 골짜기를 메우며, 서로를 향한 굳은 마음을 평화의 ‘온전함’(shalom)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세상은 경쟁과 힘의 논리에 흔들리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나눔과 섬김의 길이 인간의 존엄을 꽃피우는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 거룩한 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시노드’의 신비이며, 교회는 이러한 동행을 세상 안에서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희년 동안 우리가 익힌 순례자의 감수성은 이제 2026년 시노드 이행 단계를 향한 ‘함께 걸음’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성장 안에서 ‘함께 걸어가며’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시노드 교회’, 즉 ‘하느님과 이웃과 이루는 친교의 교회’이며 ‘모두가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교회’ 그리고 ‘복음의 기쁨을 살고 증거하는 선교하는 교회’(〈2026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로 꾸준히 자라나야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 마리아의 겸손과 순종을 본받아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합시다. 오늘 하루, 우리 곁의 누군가에게 사랑의 한 걸음을 먼저 내딛는 용기를 냅시다. 우리의 작은 응답이 이 시대의 어둠 속에 성탄의 빛을 다시 피워올릴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이 거룩한 밤, 새 희망과 평화가 여러분의 삶에 깊이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의 은총이 특히 가장 외지고 어두운 곳에 먼저, 그리고 충만히 내리기를 빕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이라는 회칙에서, 복음을 읽고 듣고 깨닫고 나누며 실천할 때, 우리 안에 주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할 때, 주님께로부터 오는 큰 기쁨을 우리가 어찌 이웃에게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랑거리는 하지 말라고 말려도 자꾸 자랑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입이 근지러워서 감추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쁜 일들을 심지어는 떠벌리고 산다고들 합니다.
여러분, 성당에 나오셔서 기쁘십니까?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기쁘십니까?
여러분,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시면 기쁘십니까?
여러분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도,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이 번개같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를 때 뭉클하지 않으십니까?
또 기도할 때는 잘 모르다가도, 기도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문득 삶의 한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환희를 느낍니까?!
나 혼자서는 그 말씀의 뜻을 잘 모르고, 또 그 말씀이 어떻게 우리 일상에서 실현되는지 잘 모르다가도, 신자들과 복음을 나누면서 주님의 말씀이 다른 신자분들의 삶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어렴풋이나마 발견하게 되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큰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까?!
오늘 성탄 대축일 복음에서 요한 사가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라고 외칩니다.
여러분도 복음에서 오는 그런 기쁨을 느끼십니까?
그러시겠죠. 그렇지 않으면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실 수 없으시겠죠.
그 기쁨을 이웃과 나누시기 바랍니다.
선교는 누구를 성당으로 데려오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결과일 뿐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신앙에서 얻게 되는 큰 기쁨을 알려주고 자랑하고 나누는 일입니다. 그렇게 자랑하고 안내하고 모셔서 이웃들이 우리 교회에 올 때 우리 마음 속에는 더 큰 기쁨이 샘솟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내가 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 오는 성취감만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복음을 실천하고 그 결과로 형제자매들이 우리 교회에 찾아와 우리와 함께 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때, 우리 안에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잔잔한 기쁨과 평화가 자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와서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하여 내 삶이 정말 날아갈 듯 기쁘고 행복해 할 때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하고 나와 함께 성당에 나오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성당에 나오세요.”라는 말만 거듭하고, 끌고 오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고 망설일 것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 이웃 사람들이 내가 “성당에 함께 갑시다.”라고 말했을 때, “야, 너 하는 꼴 보니 성당에 같이 가고 싶지 않다.”라고 할지 아니면, “너 성당 나가서 행복해하고 변화하는 것을 보니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라고 하면서 따라올지. 어느 쪽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3,11) 여러분 이왕 하는 신앙생활인데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어서,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어렵고 힘겨운 상황을 능히 이겨내고 꿋꿋이 인생을 살아나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성당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많이 아주 많이 받고 있다고 느끼고 깨달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고, 또 그 사랑 때문에 우리 교회에 사람들이 함께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면서 얻는 큰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오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사랑을 받기 위해 오게 되는 어려운 이웃들도 있겠지요. 그분들도 주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의 기쁨을 얻게 되면 좋겠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
세상의 재산과 재물과 지위와 권력은 올라서기가 무섭게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봐 불안해하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경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언젠가는 다 잃고 다 놓아버린 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는 누가 뺏어갈 수도 놓치지도 않습니다.
요한 사가는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마침내 그 말씀을 내 일상에서 이룰 때, 주 예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그 기쁨과 잔잔한 평화가 여러분을 휘감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이끄셔서 말씀으로 우리 곁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실 수 있도록 감화시켜 주시고, 주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다시 오신 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말씀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안에서 꽃피우고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여러분이 주 예수님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그렇게 됨으로써 여러분 가정 안에 주님께서 살아 움직이게 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주 에수님의 은총으로 화목하고 성가정이 되어, 여러분을 아는 여러분의 이웃친지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마침내 우리 모두를 구원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주시기를 빕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주님 오셔서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주셔서 세상을 변화시키네. <루카 2, 1-14> 12월 2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밤이 빛을 받아 낮이 되고 무너진 집을 다시 고치고 새집을 만드십니다. 우월감과 자만심을 가진 사람을 겸손과 낮은 자리에 살게 하고,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이 사랑과 자비의 세상을 만들게 하고, 민족주의에 빠져 우리 안에 사는 사람들이 보편적 삶을 살아 모두 함께 사는 세상 되게 하고, 가난한 이가 희망으로 살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주님이 오늘도 오셔서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 만들라고 하시며 우리 안에 사시려고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오신 분은 손에 칼 들고 좋은 것을 갖고 멋 부리며 오시지 않고, 가난한 모습으로 마구간에 집도 거처도 없이 누워 계시며 가장 가난한 목동들을 부르시고, 찬미 찬송 받으시며 세상을 저 밑바닥부터 변화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을 찾아서 주님이 경배받는 것을 시기 질투해서 죽음의 위험 속에 저 멀리 피난 가시고 끝내 나자렛에서 가난한 목수 일하시며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주님 따라 살려는 사람은 진, 선, 미에 따라 살며 폭력과 재물 자랑과 멋 부리며 살지 말고, 어린이처럼 되고, 가난한 마음으로 겸손과 온유함으로 살며, 원수도 없고, 미움도 없는 세상에 살며, 자비를 앞세우고, 서로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살도록 이끄시려고 오셨네. 윗자리나 높은 자리를 탐하지 말고, 교만으로 멋 자랑하지 말고, 희생하며 살라고 하시고, 주님 따르는 사람은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이고 다른 것에 들어가 없어져야 짠맛을 내고 빛은 자기 몸을 태워야 빛을 발합니다. 최상의 사랑은 너 안에 들어가 나는 없어지고 등경 위에서 빛을 내기 위해 내 몸이 없어져 빛을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권력과 재물로 편하게 살지 않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면서 주인 행세 하지 않으시며 가장 힘없는 사람처럼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김을 하려고 왔다.” 하시고, “나는 무엇을 받으러 오지 않고 내 몸마저 내주려고 왔다.” 하시고, “죄인을 찾아 벌주러 오지 않고 죄인을 길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 하시며 섬김, 나눔, 친교의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며 잘못된 것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신 주님은 믿음 없는 세상 믿음 주고, 희망 없는 세상 희망 주고, 사랑 없는 세상에 사랑 주며, 모든 이 안에 모든 이 되셔서 함께 계십니다. 세상 종말이 아니라, 지금 오늘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주님 찾는 사람과 부르고 찾는 사람에게 감성을 느끼고 의식하며 진실과 사랑 안에 깨우치도록 함께 계십니다.
오늘 주님 오심을 기뻐하며 행복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오심을 함께 축하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함승수 신부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성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천년 전에만 오신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꾸준히 계속해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작고 약한 이들,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이들, 슬픔과 절망 속에서 괴로움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오십니다. 외로워하는 이들 곁에 함께 있어주시기 위해, 굶주린 이들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시기 위해,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확실한 희망을 보여주시기 위해, 걱정과 두려움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에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이자 의미입니다. 그것을 모른 채 세상이 주는 즐거움만 쫓으면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작고 약한 이들을 찾아가기보다 밝은 조명들과 화려하게 장식된 볼거리들을 찾아다니면 오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지 않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려고만 들면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겉모습을 취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뜻하신 바를 이루실 힘과 권능을 지니신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를, 약함과 부족함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당신 안에 품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하고 귀한 ‘성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내 이웃과 형제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며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회에서 소외된 ‘작고 약한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최고’의 사랑, ‘최선’의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웃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죄인’과 다르다며 구분하고 분리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죄를 짓는 이들을 용서하거나 자비를 베풀지 않고 심판하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며 돕기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따지며 단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준수보다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시는 그분이 ‘메시아’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만삭의 임신부를 위해 자기들 잘 곳을 기꺼이 내어드린 목동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애써 마련한 귀한 예물들로 예수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드러낸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주님’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실 참된 임금으로 인정하고 맞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게 성탄이 그저 지인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게 파티하는 날이 아니라, 참으로 기쁘고 의미있는 날이 되려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고 내 안에 맞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에 사십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꽁꽁 숨어 계십니다. 그렇기에 “숨은 주님 찾기”를 잘 하는 사람이, 내 이웃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이웃과 주님 모두를 내 마음 안에, 내 삶 속에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목자처럼
김희경 성심 수녀님
깊은 밤,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천사들을 만나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구원자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는데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바로 그 표징이라고 말이지요. 오늘 새벽 미사 복음은 그 이후의 장면입니다.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하고 서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아기를 찾아냈고,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습니다. 즉, 천사의 말을 들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기를 찾아 나서자고 서로 독려했고, 포기하지 않은 끝에 구원자 아기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이야기를 주위에 전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목자들의 여정을 천천히 따라가며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 즉시 일어나 함께 아기를 찾아 나선 목자들이 결국 표징을 찾아내 아기 예수께 경배한 것과 같이, 우리도 지체 없는 순명으로 예수를 찾아 경배해야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미사나 기도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서로를 독려하며 함께 표징을 찾아 나서고, 일상의 매 순간 구원자 예수를 발견하고, 그 들은 말씀을 주위에 전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 경청과 식별로 동행하는 수원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을 비추는 참빛이 되어오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사랑의 하느님
시작이며 마침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가장 나약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사랑 자체이시며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한 1,10 참조). 비록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총의 힘으로 오늘도 세상에서 하느님 자녀라 불리며 하느님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
세상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참 많이 있지만, 현대 문물을 악용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파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초고속 인터넷망과 수많은 데이터, GPU1)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인공지능(AI)2)은 양날의 검과 같은 모습으로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 윤리, 도덕과 같이 인간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영역도 AI를 이용하여 돈벌이 수단으로 만드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정치 문화를 만들고 특정 집단을 자극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매매하는 이들, AI를 이용해 교묘하게 편집한 허위 정보로 신앙인들을 현혹시키며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이들, 종교를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여기며 장사하는 이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대를 불문하고 예수님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지위를 누리기 위해 전쟁을 멈추지 않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외면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자리해야 하는 곳을 짓밟는 가운데 자신의 말과 행동과 결정이 당연한 것처럼 포장하며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멈추지 않는 총과 폭탄 소리를 들었고, 개인과 기업과 국가를 막론하고 자신의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을 나라 안팎에서 보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세상의 등불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는 첫 교황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를 통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신앙인이 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루가 멀다고 급변하고 있지만 그 화려함과 풍요로움 속에도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존재합니다. 양극화된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관심의 문화'가 필요하다며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라”는 교황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들이 부르짖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모범을 예수님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소외된 이들 속에 자리하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하며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내 주위에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눈과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와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며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노드 이행단계를 지내며
WYD 수원교구대회를 준비하는 수원교구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는 끝났지만 각 지역교회는 ‘최종 문서’를 중심으로 시노드 이행단계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는 시노드적 교회를 살아가기 위해 2024년부터 3년 동안 살아갈 사목교서를 발표하였고 영적 체질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노드적 삶의 모습은 2027 WYD 수원교구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도 잘 녹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대회를 준비하는 이들과 일선 본당의 봉사자 모두가 성령 안에서 대화하고 경청하고 소통하면서, 뒤처지거나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세상 속으로 나가도록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참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전하는 기쁨과 평화가 WYD 수원교구대회를 준비하며 지내는 교구민들의 모든 여정 안에 살아 숨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대회를 준비하는 모든 젊은이들과 봉사자들이 주님과 함께 걷고 경청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하느님 사랑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견되기를 기도합니다.
2025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은
일상이 곧
거룩함의 자리임을
일깨워 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생활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일상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삶으로 말씀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신뢰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존엄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사람 안에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사람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낮아지기를
선택하신
사랑입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신 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으로
조용히 들어오신
사랑이 시작된
은총의 날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
축하드립니다.
종종 희망이 없다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함께하기보다 혼자 있으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희망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내일을 살아갈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야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암 투병 중에 계신 분을 많이 만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보았고, 오히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할까요? 끝까지 희망을 품었던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만이 또 실제로 건강도 찾으셨습니다. 지금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작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희망이라고 별것 아닌 것으로 무시한다면, 점차 절망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젊은 아빠가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저를 보며 ‘아빠’라고 했어요. 눈물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빠’라는 말이 대단한 것일까요? 세계 신기록에 등록될 정도로 유일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냥 ‘없다’라고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봐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희망의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단순히 이 땅을 시찰하기 위해 오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힘없고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기를 보게 되면 거부감이 없어집니다. 얼굴만 봐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기가 말을 하지 못해도, 아기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기와 함께 할 미래를 떠올리면서 더 큰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몸이지만, 그 자체로 커다란 희망이었습니다. 거부감 없이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 그 자체로 기쁨과 행복을 간직하라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떠나 근본적인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고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희망의 시작은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풍날, 여행 날, 합격발표날, 소중한 손님의 방문 날 등…. 날짜를 하루하루 기다렸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설레임에 더 기뻤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날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들이 희망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그것은 젊을 때 결혼하여 살아온 늙은 배우자이다(탈무드).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저희 수도자들도 이토록 외진 시골에서, 저희끼리만 지내면, 세상 울적한 분위기일 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가족 같은 동네 주민들, 먼길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피정객들과 함께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어렵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또다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돌아왔습니다.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과 깊은 상처 그 사이로 분명히 탄생하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질 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속에서 산다 할지라도, 이런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오늘 이 대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엄숙한 순간이어서,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유능한 의료진이나, 그도 아니라면 탈 없는 출산에 도움을 줄 분들의 보살핌 아래 태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의 탄생 여건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출산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요셉 성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소와 말들이 이게 뭐지 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지극일 호의적이지 않은 출산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너무나 독특하고 이해되지 않는 육화강생의 방식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봅니다.
제가 자주 타고 다니는 모닝 승용차가 27만 킬로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달리고 있는데, 꼭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수도 생활 40년째로 폐차장 가기 직전 중고차인데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아직 잘 달리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우울하고 서글프기 마련입니다. 여기저기 시름시름 아프고, 고장 나고, 매일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네 삶 한가운데도 탄생하시고 길이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연세 들었다고 우울해 할일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큰 고통 속에 계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에 허덕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 없어 답답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들의 힘겨운 일상 그 한 가운데 매일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과 쓰라린 상처 그 사이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면 즉시 탄생하신 구세주의 이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탄생하신 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란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름 임마누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이란 의미입니다.
‘선한 의지’가 도대체 무엇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탄을 축하 드립니다!
오늘 성야 미사에서는 목동들이 천사들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을 듣습니다. 여기에는 그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뵐 자격이 있음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 안에는 무슨 일을 해서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가톨릭의 전통적 해석,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곧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직역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의미는 의역이고 현대 신학자들의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데에는 “선한 의지”란 단어의 뜻의 중요성을 번역하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의지’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의지와 욕구를 발휘합니다. 그중에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의지도 있다는 뜻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통해서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는 철사 어미보다는 젖이 나오지 않아도 따듯함을 주는 인형 어미를 어미로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이 선한 의지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생기는 것이 열등감이고 우울감입니다. 태어나면 아기들은 다 선한 의지를 가집니다. 젖을 먹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엄마를 찾으려는 의지입니다. 엄마를 찾지 못하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으면서 엄마보다는 엄마 젖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선한 의지가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원숭이 새끼들을 일부러 어미와 격리하며 우울증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며 발견한 것은 새끼 원숭이들은 먹이와 편한 시설이 아닌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줄 어미를 찾고 무리를 찾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덕분으로 할로우 박사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치유하는 길은 사랑받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기처럼 사랑만을 요구하는 남자와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첫 번째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이혼하고 맙니다. 할로우 박사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고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사랑을 만났습니다. 이때 ‘구원자 원숭이’의 개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격리 6개월이 안 된 원숭이들은 정기적으로 다른 무리의 원숭이들과 사귀다 보면 우울증이 사라진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부인도 두 아이를 낳고는 암으로 사망합니다. 인간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전기충격으로 우울증을 극복해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첫 번째 아내와 재혼했지만, 상태는 계속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실험실의 원숭이들을 학대했다는 비난 속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알았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신은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음을. 그러나 ‘착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삐딱하게만 보는 주인공은 한 스승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나를 창조한 엄마처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아기들은 착한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은 착한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면 정체성이 생긴 것입니다. 엄마를 만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는 나를 창조하여 나에게 생명과 같은 젖을 주는 존재입니다. 이 착한 뜻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메시아의 표징이 구유에 뉜 아기였던 것입니다. 밥은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면 자신들은 자녀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을 찾기를 원하는 이들이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누구를 구원하실까요? 아기처럼 엄마를 찾지 않으면 죽는 게 낫다는 착한 뜻을 가진 이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어떤 이들은 돈으로 가난에서 구원되려고 하고 먹는 것으로 배고픔에서 구원되려 합니다. 그렇게는 메시아를 만나지 못합니다. 착한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처럼 세상없어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메시아만을 찾는 착한 뜻이 있나요? 그러면 오늘 밤에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의지는 구원자를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달라스 성당에 와서 첫 번째 맞이하는 성탄입니다. 오늘 ‘예수 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예: 예수님 사랑이 가득한 밤,/ 수: 수줍게 웃는 얼굴들 가득하네./ 성: 성탄의 종소리가 마음을 울리고,/ 탄: 탄생의 기쁨이 온 세상을 채우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겨울, 유럽의 참호 전선은 추위와 공포로 가득했습니다. 병사들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12월 24일 밤, 서부전선의 한 구역에서 독일 병사들이 조용히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들은 영국 병사들이 화답하듯 자신의 언어로 같은 노래를 부르며, 참호 사이에 따뜻한 연대의 기운이 피어올랐습니다. 다음 날, 양측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참호에서 나와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담배, 초콜릿, 심지어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축구 경기를 하며 잠시나마 전쟁을 잊었습니다. 그날만큼은 총성이 멈추고, 적대감 대신 형제애가 넘쳤습니다.
오늘만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선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평화도 도시 예루살렘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대한민국의 정치에도 평화가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온 인류를 위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참된 빛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분은 위엄 있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로 인해 어두웠던 세상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 빛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받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빛은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혼란스럽더라도,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구원을 약속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오십니다. 병들고, 지치고,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오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모습으로, 굶주린 이들을 배를 불리시는 곳으로, 교만한 이들을 내치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일깨우시는 곳으로 오십니다. 흠이 있고, 주름이 가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 공동체에도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진정한 이유입니다. 화려한 궁전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이 지닌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그 기쁨을 찬미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가짜별을 본 것이 아닙니다. ‘믿음, 사랑, 희망’이라는 진실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목동들,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기 위해서 먼 길을 왔던 동방박사들, 오늘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성탄은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이라면 우리 모두도 기뻐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기뻐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밥그릇에 누우신 예수 아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사람이든 짐승이든
풀 한포기 아름드리나무도
하늘과 땅과
물과 공기는 물론
저 아득 멀리
해와 달과 별까지
살아 숨 쉬니
밥을 먹어야 할 텐데
여기
빈 밥그릇만
하나 덩그러니
밥은 어디 있을까
밥 찾는 이
차고 넘쳐도
밥 되는 이
찾기 어려워
그렁그렁 눈물 맺힌
주리고 서러운 눈길들
하나하나 가득 모인
밥 없는 밥그릇에
오늘 밤
예수 아기
포대기에 싸여
새근새근 누우시네
어서 나를 드세요
그리고 다시 살아나세요
이제 나처럼 여기 누워요
기꺼이 다른 이 살려내게요
살며시 옅은 웃음으로
말씀하시며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 곁에 계셨던 말씀, 하느님의 외 아드님께서 우리의 시간과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의 시작과 더불어 장엄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전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곧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지만 어떤 이들은 그분을 맞아들이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과연 주님을 진정 맞아들이는 사람인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분을 맞아들인다는 것의 의미는 주님의 탄생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곧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말했던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주님께서 이제 내 안에서 사시면서 내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처럼 이제는 내 안에 그 말씀이 들어와 삶이 될 수 있을 때 나는 진정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주님께서는 이제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것처럼 높은 곳만을 바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낮은 자,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가난하고 약하고 외로운 이들을 찾아 나설 때 나는 진정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내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신 그분의 사랑을 이루어 가게 될 때 나는 진정 그분을 맞이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내가 뜻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느님의 뜻하시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갈 때 나는 그분을 진정 맞이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내 삶을 변화시켜 갈 때 나는 진정 그분을 맞이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사다난했던 2024년, 또 다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주님을 진정 기쁘게 맞아들이며 이제는 주님과 더불어 모든 삶을 이루어가는 참된 성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우리들이 그동안 기다렸던 예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늘 밤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련한 우리들과 삶과 죽음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의미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자신의 구원 의지를 알려주셨으나, 오늘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인류 구원이라는 새로운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전 인류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안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으며, 사탄을 몰아내셨고 문둥병자에게 새 삶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힘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힘과 권능을 다시 우리 안에 심어주시길 청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그 자체가 희망이며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몸은 어른이더라도 어린이의 마음을 지닌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희망의 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이는 인류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 입니다. 오늘 밤 구세주께서 이 고을에 태어나셨습니다.” 여기에서 목자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바로 힘든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외로워하면서 희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천사들은 메시아가 오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생활 안에서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며 사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기쁜 성탄절이라는 뜻입니다. 성탄절이 기쁜 이유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기쁘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기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것에 힘이 없어질 것입니다. 다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길 예수님께 한 마음으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이번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서,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는 선물은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잠겼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있어서 함께 사는 이민구 프란치스코 신부님은 정말 귀한 선물입니다. 신부님은 뭘 하기 전에 항상 ‘해도 되느냐?’고 물으시고, 하면 한다고 이야기하고, 하고 나서는 꼭 했다고 또 어떻게 되었다고 보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이런 신부님이 계실까!’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내뱉은 말은 끝까지 책임지고 수행해 나가고, 제가 보좌신부 시절에나 했던 고백소에 들어가 하루 종일 판공성사를 주는 일이나, 전례적으로, 신심적으로 충실한 신부님을 뵈면서, 저도 보좌신부 생활을 거쳤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을 정도로 충직하게 신의를 지키시는 신부님을 뵈면서 정말 커다란 선물을 받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현대 물질세계 안에서 복음삼덕을 사시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우리 수녀님들, 특히 건강이 잘 바쳐주지 않는 것 같은데도 요령 피우지 않으시고, 기꺼이, 꾸준히, 진실되이 맡은 바 일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다 해내시면서, 묵묵히 수도생활을 영위해 나가시는 모습이 참으로 경건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뿐 아니라, 혹여나 부족하거나 미진한 것이 있을까 싶어 발이 부르트고 뜨거워질 정도로 뛰고 계신 우리 사목협의회원들과 구역반장님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매일 선교하고 있는 우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 매주 주님의 말씀을 꽃으로 재창조하고 있는 헌화회원들, 전례분과원들, 제대회원들, 성가대원들, 반주단원들, 성물방 등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단체원들, 신자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직원분들을 비롯하여 이 미사에 참여한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주 하느님께서 제게 내려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 저와 함께 살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구유예절을 하면서, 주님께 저를 이곳에 보내 주시어 여러분과 함께 살게 해 주셔서 진정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탓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애초에 그렇게 만드셨고, 그 그림자를 빛으로 밝히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계신다고 사도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0.24-26)
그림자를 바라보면 빛이 사그라집니다.
그러나 빛을 바라보면 그 빛이 점점 커져 그림자를 다 가릴 수 있게 됩니다.
본당 설립 30주년을 시작하는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웃 사람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어떻게 그분들이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인지 확인하고 깨달아 감사의 인사를 드려봅시다. 머저리 같은 남편, 멍청해 보이는 여편네, 근심과 걱정거리인 부모, 애물단지 같은 자식들이 어떻게 내게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선물인지 깨닫는 것이 올 성탄의 선물입니다. 서로서로 바라보면서 지난 과오와 나쁜 추억들을 용서하고, 덮어주고, 감싸주고, 채워주면서 올 성탄을 필두로 30주년을 맞는 우리 성당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 갑시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의 탄생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베틀레헴으로 모두 호적등록을 하러 갔습니다.
베틀레헴 읍내에 묵을 곳이 없어서 읍내 밖 외양간으로 자리 잡았고,
만삭인 마리아는 그곳에서 예수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거였지요.
해산날이 되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의 먹이통에 뉘었습니다.
밖에선 목동들이 양들을 지키며 밤새울 때 천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며 온 백성에게 큰 기쁨 될 소식 구세주 탄생 알렸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 몸으로 태어난 걸 천사들에게서 듣고서 놀랐죠.
바로 오늘 예수탄생일 아 세상에 하느님 사랑이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가톨릭알림 말: 예수 성탄일로 서력기원 AD(주님의 해)가 시작됩니다.
서울대교구장 성탄 메시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고요하고 거룩한 밤, 예수님께서 허름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십니다. 전능한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당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한없이 낮추시어,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하고 약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며, 그 사랑이 우리의 삶과 세상 안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올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혼란과 갈등 속에서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정치적 불안정 속에 들려오는 불안과 분열의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선한 양심을 지닌 많은 이들이 정의와 진리를 갈망하며 목소리를 내지만, 그 외침이 외면받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창조주께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이 신비를 바라보며,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따뜻한 인간됨’이라는 것을 아기 예수님은 보여주십니다. 불안한 마음, 서로 다른 시각들, 서로 다른 해결책들 사이의 대립 가운데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임을 성탄은 말해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복음의 기쁨>(222항)에서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라는 말씀으로 이를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 권력이 공간을 독점하는 것보다, 인간이 서로 보듬어 나가며 성장을 위해 새롭게 시작해 나가는 시간들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9 참조). 그러나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이 실현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여러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민주적 절차와 헌법적 절차에 따라 국민 전체의 행복과 공동선을 향해 함께 노력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비록 두려움과 불안 속에 빠져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정의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도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목소리는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을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함께 공동의 선을 위해 지혜를 모으는 ‘따뜻한 인간 존중의 자세’로 지혜롭게 이 격동을 헤쳐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 어린 생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고 경축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탄이 다시금 ‘희망’의 시기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우신 모습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새벽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아기 예수님의 겸손하고 겸허한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가 마주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또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따뜻한 체온을 서로 느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속에 따뜻한 인간성으로 빛나는 참된 평화와 희망이 차오르길 희망합니다. 그같은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 차길 기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함승수 신부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은 우리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어제 밤 미사의 복음이 작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는 동화처럼 신비로운 이야기였다면, 오늘 미사의 복음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대사건, 즉 “육화강생”의 신비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에 대한 신앙적인 성찰을 담고 있지요.
이 세상이 생기기 전인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성경의 세계관에서는 참된 ‘지혜’가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성자 그리스도를 가리키지요. 즉 오직 그리스도만이 말씀이라는 형상으로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겁니다. 말씀의 역할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원하시는 것을 즉시 현실로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오직 ‘말씀’만으로 당신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창조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이 그리고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이 자리하고 있지요. 그 분 안에는 또 하나의 귀한 선물이 들어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빛’입니다. 구세주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짐작 정도만 할 수 있었지만, 구세주께서 오시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과 의도를 알려주셨기에 우리는 그 빛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기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이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덕분에 우리가 누리게 된 ‘결과’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이시며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신 그분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그분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뜻과 의도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죄의 구렁에서 헤매며 고통받는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살리시려고 직접 이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그것으로도 모자라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어 보다 원활하게 소통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고 싶으셔서 기꺼이 인간이 되신 겁니다.
그런데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우리 같이 부족하고 약한 인간존재가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이 지닌 참된 의미는 그 뒤에 이어지는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말씀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지요. 이 말씀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당신께서 오래도록 머무르실 항구한 거처를 마련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와 ‘몸만’ 함께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잠시’ 동안만 함께 계시다가 떠나버리시는 게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자고 하는 이웃 형제 자매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 자신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아시는 것은 물론, 내가 청하기도 전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까지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주님이시기에 언제나 ‘충만함’을 누리고 계십니다.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하거나 모자람 없이 차고 넘치는 그분의 충만함은 물질이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지요. 그분의 충만함은 우리가 감히 그 깊이와 너비를 헤아릴 수 조차 없는 그분의 넓고 깊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께서 누리시는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고,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크나큰 은총이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은총에 ‘나도 주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다’는 은총이 더해져 완성에 이르는 것이지요. 자기 힘으로 당장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한계와 결핍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웃을 돌아보는 관심과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은총과 사랑을 결코 잃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넘어지는 공기인형이라도 바람만 불어주면 절대 쪼그라들지 않는 것처럼, 세상의 풍파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넘어지는 작고 약한 우리라도 말씀이신 주님을 마음에 품고 따르기만 하면 그 안에 담긴 강력한 권능이 우리를 끝까지 지탱해 줄 겁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니 어둠이 사라졌네. <요한 1, 1-5. 9-14> 12월 2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던 세상에 빛이 비치니 들리던 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길 찾아 앞으로 걸어가게 되었네.” 선지자를 통해 들려주던 소리를 직접 듣고 깨우쳐 주시려고 넘을 수 없는 산을 넘어 죄악으로 시달리던 인류 구원에 희망 주시려고 하느님 모습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되었네.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요. 만백성아 장구치고 노래하며 춤추며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봐야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아, 여기 말씀으로 계시던 분,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니 어둠도 사라지고 가렸던 장막이 사라져 끝없는 길이 펼쳐지고 가야 할 길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내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믿음, 희망, 사랑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 탄생을 알리면서 죽이려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여 그들은 끝까지 대를 이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진실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거짓과 악행과 추함을 따라 사는 사람은 헤로데나 헤로디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있어서 빛이 있어도 어둠 속에 살고 생명의 말씀이 있어도 죽음의 말씀에 살게 됩니다.
가난한 목동들은 참배하고 기쁨의 노래 부르며 양 치러 가고 동방의 박사들은 주님께 찬미 드리고 선물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현지 사람은 주님 오심을 반기지 않고, 문도 열어주지 않고 외양간 말구유에 탄생하도록 하셨습니다.
기다리던 주님, 당신 마음은 참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어젯밤 성탄 미사를 드리며 벅찬 기쁨이 저의 마음을 흔들고 “주님이 어디 오셨나?” 하고 몇몇 형제에게 물으며 내 안에 오셔서 자리 잡고 계심을 찬미 찬송하며 기도 속에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사드렸습니다. 매일 미사드리며 주님 모시고 사는 환경을 주셔서 멀리 찾아가지 않아도 눈뜨고 복도를 지나면 성당이고, 어지러워도 벽을 짚고 가기만 하면 주님 함께 계셔서 주님의 영원한 자비의 은총과 일치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 속에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다시 깨우쳐 주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신 주님께서 비록 약점 모순덩어리라도 매일 찾아 만나게 해주신 것에 오늘 성탄축일 더 감사하게 됩니다.
어둠은 빛이 필요하듯이 빛 속에 살며 준비된 것을 나누며 기쁜 성탄 축일이 되고 주님의 빛으로 빛이 되어 만나는 모든 사람과 기쁨 나누며 행복한 날 되기를 기도합니다.
간절한 기도
진동길 마리오 신부님
“눈꽃처럼/ 내 작은 가슴 곁으로/ 스며드는 이여// 하늘로부터/ 소리없이 와서/ 내 모든 걸 새롭게 하는 이여// (중략) 그대의 다독임으로/ 나는 다시/ 내일 필 꽃잎에 녹아듭니다.”(‘눈꽃처럼’, 근희) 실존주의 철학의 맥락에서 사람이 무엇을 바라볼 때는 ‘욕구desire’를 담고 있다고 하지요. 바꾸어 말하면 그 시선이 머무는 곳에 그가 갈망하는 것이 있다는 말인데 가슴에 와닿습니다. 땅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의 욕구가 갈망하는 것이 땅에 있을 테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것이 하늘에 닿아 있겠지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그렇다면 빛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헤아려 봅니다. 여러 가지 뜻이 있으시겠지요. 그중에 ‘보시니 좋았다’ 하신 세상을 전쟁과 폭력으로 죽어가게 하는 이들의 마음과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묶여 있는 우리의 시선을 하늘 아버지께로 되돌리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보십시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늘로 향한 어린 구세주의 눈빛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다만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신의 사랑이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춥고 어두운 이 밤에 그의 눈 속에는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외로운 이들과 난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헐벗은 아기가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아기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를 바라봅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시대의
성탄은
복된 희망의
성탄입니다.
가장 좋은
성탄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여기 이곳도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여기 이곳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만드십니다.
성탄을 몰라도
성탄은
우리에게
옵니다.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묻는 은총의
성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십니다.
더 나아지길
바라시며
하느님께서
여기 이곳에
탄생하십니다.
다투지 않으며
하느님 먼저
작아지십니다.
작은 아기가
되시어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떠받드십니다.
조금씩
알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피와 살이
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성탄이
가장 좋은
복음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뜨겁게 만나는
고마운 성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성탄은
우리와
더욱
가까워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디오를 듣다가 고등학생 때 즐겨듣던 팝송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카세트테이프 이 한 곡만 담아서 일주일 내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속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명곡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이 노래의 기타 전주가 너무 멋져서 잘 치지 못하는 기타 실력이지만 계속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했고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할까요? 지금도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예전만큼은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은 유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젊음과 열정을 나이가 찬 지금에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그토록 좋아했던 물건을 지금도 간직하면서 애지중지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기 몸만 보더라도 유한성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영원히 필요한 것처럼 착각하고,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의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인 사랑 실천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한성을 가진 이 세상에 영원하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단순히 2,000년 전에 단 한 번 함께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고 하십니다. 유한한 세상에 영원함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순간의 사랑이 아닌, 무한한 사랑을 담아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어렵고 힘들다면서 한숨짓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한한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무한한 하느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기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한 다발의 생각만 멈추면 평화, 사랑, 기쁨이 찾아온다. 이들은 모두 무념의 상태에서 생겨난다(디켄 베팅어).
뱀의 본성을 거스를 두 노를 젓고 있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누군가의 생각을 다른 생각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개자란 뜻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은 ‘표현’되었다는 뜻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말은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표현될 때는 생각과 분리되어 소리로 진동합니다. 이는 큰 희생입니다. 말을 하지 않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말을 하려면 생각을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때 상당히 위험합니다. 말씀이 받아 들여지지 않고 무시 당할 때는 그 말을 한 사람도 무시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기 전에 ‘율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율법은 목적지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나 원죄의 영향으로 우리의 본성은 사랑과 반대로 흐르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아는 것 만으로는 율법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바라보기만 할 뿐 뒤로 후퇴할 뿐입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노가 필요합니다. 한 개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입니다. 은총은 보는 것이고 진리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들음으로써 우리는 동물의 본성을 거슬러 창조자의 본성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을 들음은 말씀의 전례와 같고 말씀을 봄은 성찬의 전례와 같습니다.
윌마 루돌프의 삶은 역경을 극복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어머니 블랑쉬 루돌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940년 6월 23일 테네시주 세인트 베들레헴에서 조산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22남매 중 스무 번째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윌마는 4살 때 근육 약화를 일으키고 심한 경우 마비를 일으키는 질병인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이 질병으로 인해 그녀의 왼쪽 다리와 발은 약해지고 기형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는 걷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블랑쉬는 인종적,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의료 서비스가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간 치료를 위해 윌마를 업고 50마일 떨어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에서 그녀는 또한 윌마의 약한 다리를 하루에 네 번 마사지하는 등 물리 치료 기술을 배우고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윌마에게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12세가 되자 그녀는 다리 보호대를 벗어났고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농구를 하고 육상 경기를 하며 빠른 속도로 주목 받았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100, 200, 400미터 육상 경기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녀는 단일 올림피아드에서 이 위업을 달성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율법이라는 사랑으로 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반드시 은총과 진리를 요구합니다. 블랑쉬는 딸 윌마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리고 말로도 믿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윌마는 이 은총과 진리를 흘려버리지 않고 ‘감사’의 감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도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만이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올 두 노가 되어주기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노를 잡고 젓기만 하면 완전한 감사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매일 단 5분씩이라도 양쪽 노를 저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계속 후퇴합니다. 은총과 진리로 감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숙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의 두 노가 되어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탄생하신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저희 성당에서 구유를 감사 일기로 꾸민 이유가 이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셨습니다. ‘탄’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 드립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도 ‘예수성탄’을 축하드리면서 저처럼 축하의 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캐럴’이 있습니다. ‘징글벨, 루돌프 사슴 코, 울면 안 돼,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경사롭다.’와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저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구유와 트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저는 매년 구유와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1년 동안 잘 보관했던 구유 세트를 꺼내서 장식했습니다. 청계천 시장에 가서 ‘은하수 전구’를 사왔습니다. 별도 달고, 구슬도 달고, 빤짝이도 걸고, 전구를 연결하였습니다. 저와 동창 신학생이 기본 틀을 만들면 수녀님이 예쁘게 다듬었습니다. ‘성탄카드’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같이 만들어서 팔기도 했고, 사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카드를 쓸 일이 많지 않습니다. 주로 카톡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도 있습니다. 제가 살던 명동 거리에는 구세군 봉사자들이 종을 울리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진정한 의미는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생각하고, 그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학생 때는 성당에서 ‘성탄 예술제’를 했습니다. 초등부 학생들은 율동과 노래를 준비했고, 중고등부 학생들은 멋진 노래와 춤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연극의 제목은 ‘넷째 왕의 전설’이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연극입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서 출발한 박사들은 원래 4명이었습니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 조재형’입니다. 멜키올은 황금, 발타살은 유향, 가스팔은 몰약, 조재형은 다이아몬드를 준비했습니다. 조재형은 길을 가다가 굶주린 엄마와 아이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관으로 데려갔고, 여관 주인에게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고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입니다. 돈이 없어서 팔려가는 노예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마지막 남은 다이아몬드를 주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모두 써버린 조재형은 결국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30년이 지났고, 노인이 된 조재형은 예루살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30년 전에 경배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조재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이미 너에게 선물을 받았단다. 굶주린 엄마와 아이에게 준 것이, 강도당한 남자에게 준 것이, 팔려가던 노예에게 준 것이 바로 나에게 준 것이란다.’ 조재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넷째왕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갔습니다.”
연극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한 남자가 쓰러져있었습니다. 술이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천호동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봉천동에 살았습니다. 동창 신학생과 함께 그 남자를 택시에 태워서 천호동 집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집에는 남자의 아내와 딸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아내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이렇게 사제로 32년을 지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때 했던 작은 선행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할 것입니다.
<오늘밤 아기 밥님 오시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
오늘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시네
포대기에 싸여계시니
갓난아기요
밥그릇에 담기시니
밥님이시네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신
갓난아기 밥님은
참하느님이시니
하느님 밥이요
밥 하느님이시네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신
갓난아기 밥님은
참사람이시니
사람 밥이요
밥 사람이시네
오늘밤
하느님 사람 밥이신
밥 사람 하느님이신
아기 밥님 오시네
오늘밤
믿음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믿음으로 뜸들일
믿음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믿음의 뜸들이네
오늘밤
희망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희망으로 뜸들일
희망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희망의 뜸들이네
오늘밤
사랑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사랑으로 뜸들일
사랑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사랑의 뜸들이네
오늘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시네
기쁜 성탄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왜, 기쁜 성탄인가? 어린시절 성탄축제가 끝나고 선물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성당 종탑에 길게 늘어선 반짝이 등을 보며 동심은 마냥 즐거워했다. 성탄구유도 훈훈했다. 행렬지어 드린 구유경배, 예물 봉헌, 거룩함에 푹 빠져 성체를 모셨다. ‘성탄 축하해요’ 나도 기뻐하며 축하를 했었다. 교과서식 교리가 전부였다. 구름떼처럼 성당이 터지라고 모여든 어른들을 보며 성탄성가에서 거룩함을 배웠다.
그렇게 나에게 어린 시절은 기쁜 성탄이었다. 성당을 향해 들판을 걷고 산을 넘어 달리던 기억이 기쁜 성탄을 자라게 했다. 그 기억이 없다면 지금의 기쁜 성탄은 없었을 것이다.
아기 예수님께 동방박사들이 드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교과서적 교리지식으로 남아 있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 보고 그분의 신원을 관통한 것은 그분의 만남에 대한 기대, 그리고 만남에 대한 기다림의 걷기, 그리고 별이 멈춰선 그곳에 탄생하신 예수님의 만남은 박사들의 신앙의 도착점이었다.
기쁜 성탄은 자라나
나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난한자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아무도 관심없는 이들과 함께 걸었다. 그들 수준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역부족이었다. 내 마음을 내려 놓기가 얼마나 힘든지 버티며 그렇게 살았다. 순간 순간 어려울 때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 수많은 은인들이 힘이 되어 주었다.
주님께서 내가 죽을 만큼 되었을 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함께 하신 주님이 하신 일이었다.
도착점에 서 있을 때
도착점에서 나는 사제가 되어 있고, 교사가 되어 있다. 나에게 주님을 만나도록 이끌어 준 별들 덕분이다. 그 별들도 지금 모두 건강하게 살아간다. 그 별들 덕분에 오늘의 기쁜 성탄이 있다. 십자가를 견디어낸 영혼이 볼 수 있는 하느님의 상급은 이기 예수님의 기쁜 성탄이다.
성탄 구유 앞에서
우리의 임금이신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
우리를 본래의 인간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품위를 갖게하신 구세주이심을 오늘 성탄날 아기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 하느님의 영광, 함께 걸으시면 당신을 아려주신 사랑을 알고부터 참으로 기쁜 성탄입니다.
2024년, 가난한 청소년들과 새롭게 지내려 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또 기대어 빕니다. 어여삐 보아 주소서. 성탄 축하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 곁에 계셨던 말씀, 하느님의 외 아드님께서 우리의 시간과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곧 주님께서는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으며,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의 증거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의 시작과 더불어 장엄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전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곧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지만 어떤 이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과연 주님을 진정 맞아들이는 사람인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분을 맞아들인다는 것의 의미는 주님의 탄생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곧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말했던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주님께서 이제 내 안에서 태동하시어 함께 사시면서 내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처럼 이제는 내 안에 그 말씀이 들어와 삶이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그분을 맞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곧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주님께서 이제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것처럼 진정 낮은 자,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가난하고 약하고 외로운 이들을 찾아 나설 때 우리는 진정 그분을 맞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내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신 그분의 사랑을 이루어가게 될 때 우리는 진정 그분을 맞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내가 뜻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뜻하시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갈 때 우리는 그분을 진정 맞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내 삶을 변화시켜 갈 때 나는 진정 그분을 맞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23년, 유난히도 많았던 전쟁의 포화 속에, 경제적으로도 너무나도 힘들었던 시간 속에 우리의 주님께서는 또다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주님을 진정 기쁘게 맞아들이며 이제는 온 세상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이 땅에 참된 평화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우리가 그동안 기다렸던 예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늘 밤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죄에 물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며 또 예수님께서 가련한 우리와 삶과 죽음을 함께 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의미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자신의 구원 의지를 알려주셨으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제는 자신이 직접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 인류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첫 번째로 믿고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역사 안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자신이 메시아임을 기적을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의 눈을 뜨게 하셨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으며, 사탄을 몰아내셨고 문둥병자에게 새 삶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것만으로 우리에게는 기쁨이며 희망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외로워하면서 희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천사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기에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기쁜 성탄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구원해주실 메시아가 오셨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를 고통을 보시고 우리의 외침을 듣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뻐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쁜 소식을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몇몇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세상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아기 예수를 낳으신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
주 예수님, 주님을 뵙는 기쁨을 주소서. 아멘.
주 예수님, 주님을 맞이하는 행복을 허락하소서. 아멘.
주 예수님, 주님을 모시는 구원에로 이끄소서. 아멘.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련하게 예수 아기를 낳으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어머니, 세상 누구 하나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세상 그 어느 부모도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그런데도 요셉과 성모님은 태어나는 예수 아기에게, 오성급 호텔은 고사하고라도, 몸 뉠 곳조차 없어서 마구간에서 머물며, 말 구유에 모셨습니다.
어머니, 예수 아기는 이렇듯, 당시의 다른 아이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전혀 없는 상황에서 흙수저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 예수님은 이렇게 너무나도 없는, 처절하리라 만큼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어머니,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을까요?
어머니, 예수님은 첫 번째로 방문을 온 목동들보다도 더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어머니, 예수님 탄생 당시의 목동들은 그야말로 막장처럼 세상에서 실패하고, 심지어는 버려진 듯한 신세로 목동 일을 하게 된다면서요.
어머니, 예수님은, 자신들보다 더 가난하게 태어난 아기 예수, 그러면서도 맑고 고운 눈동자로 가난한 목동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어머니, 예수님의 이 가련해 보일 정도로 헐벗은 탄생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하던 제자들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머니, 그러고 보면, 아버지 하느님께는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간직하고자 하는 인간의 사치가 허용되지 않는 듯합니다.
어머니, 어쩌면 인간의 최소한이라는 것이, 오히려 아버지 하느님께는 최대한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그 외에는 아무런 고려 대상도 아닌가 봅니다.
어머니, 아버지 하느님께는 그저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그 이상은 모두 다 사치요 유혹인가 봅니다.
어머니,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하는, 사도 성 바오로의 말이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러 오시는 것만큼 급박하고 우선적인 것이 없는가 봅니다.
어머니,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제자의 말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어머니, 아버지 하느님의 그런 급박하고 우선적인 선택으로, 우리가 구원의 빛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아기를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인간적으로 준비하신 것은, 그저 어머니 한 분뿐이셨는지요?!
어머니,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아기를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인간적으로 배려해 주신 것은 그저 어머니 한 분의 믿음뿐이셨는지요?!
어머니,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 아기를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어머니이신 마리아, 아버지가 되실 요셉, 예수 아기의 미래를 준비할 세례자 요한 정도뿐이었을까요?!
어머니, 그나마 미리 점지하셨을 듯한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수난당하실 때는 다 배반하고 떠나 버리는 상황이었는데, 무엇을, 누구를 더 준비한다고 한들, 그것이 예수님께 도움이 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머니, 예수 아기가 지금 다시 태어나신다고 해도,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를 봉헌할 또 하나의 성체로서 우리 자신을 바치겠다고 나서기보다는, 그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달라고만 안달복달하는 이기적이고 욕심 않은 무지몽매한 저밖에’ 없음을 부끄러이 바라보게 됩니다.
어머니, 예수님이 세상에 나시면서 겪으셔야 할 척박하고 헐벗은 상황은, 비단 예수님이 처한 물질적이며 공간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맞이해야 할 우리 자신 역시도 예수님의 가난을 더 처절하게 부채질할 뿐이기에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어머니,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러 오실 수밖에 없으셨겠지요?!
어머니, 인간 스스로는 죄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도,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어머니,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구원의 빛이 되는 것이겠지요?!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저희에게 예수 아기를 우리의 주님으로 보내주셔서, 저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겸허히 순명하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의 겸손하고 사랑 가득한 희생적인 응답으로 저희가 그나마 구원될 수 있었나이다.
어머니,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러, 비천한 인간 육신을 취하시고 오신, 이 거룩한 성탄 밤에,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기도를 바쳐 드리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함승수 신부님
어느 시골 본당 초등부 주일학교의 성탄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성극이 진행중이었는데, 베들레헴을 방문한 마리아와 요셉이 방을 구하기 위해 여러 여관들을 전전하는 장면이었지요. <여관주인 3> 역할을 맡은 아이가 할 대사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요셉이 여관문을 열고 들어가 "혹시 머물 방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쌀쌀맞은 태도로 "방 없어요!"라고 말하면 되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아이의 순서가 지나갔고 드디어 그 아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여관문을 열고 들어가 머물 방이 있는지 물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여관주인에게 쏠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지요. 사람들은 그 아이가 혹시라도 대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여관주인 3>역을 맡은 아이는 대본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셉. 여기 빈 방이 있어요." 그 아이는 대사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극에서 맡은 배역과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마저 요셉 일행을 문전박대하면 아기 예수님이 이 추운 날씨에 고생하실까봐 걱정되어서, 자신이 오랜 시간 열심히 연습한 배역을 망쳐가면서까지 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그 아드님이 어서 오시기를 바라며 준비하는 사랑으로 응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진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에 대해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더 가까이에서 더 깊이 사랑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작아지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인간이 지닌 약함과 부족함까지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사랑은 부족한 우리의 지성으로는 그 깊이와 너비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놀라운 ‘신비’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단지 주님께서 사람의 겉모습을 취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유한하며 부족하고 약한 인간이 되신다는건 그리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지요. 반려견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강아지를 ‘자기 가족처럼’ 대할수는 있어도, 그 반려견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강아지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부족한 인간의 사랑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넘지 못할 ‘선’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는 그런게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직 그 한가지 이유로 인간이 지닌 한계와 단점, 부족함과 약함까지 기꺼이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덕분에 ‘우리 가운데에 사실’ 수 있었습니다. ‘나’라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머물러 사신다는 뜻입니다. ‘너’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받아들임으로써 그 안에 사시는 하느님을 내 안에 맞아들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모시는 놀라운 기적은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를 나 자신처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사시는 하느님을 사랑으로 맞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소개해드린 이야기 속 <여관주인 3> 아이처럼 주님을 내 안에 맞아들이기 위해 내 뜻과 계획을 내려놓고, 내가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나누며, 나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탄 대축일 밤미사에 참여하여 주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신자들보다, 지인들과 함께 ‘파티’를 열어 먹고 마시며 즐기는 신자들이 더 많습니다. 산타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기를 바라는 이들은 많은데, 주님의 뜻에 따라 자신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어주려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한 잔치가 ‘크리스마스’인데, 그 잔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주님의 탄생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정작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셔야 할 주님은 소외되고 그 잔치에 참석한 우리들끼리 이유도 명분도 없는 선물을 주고 받으며 시끌벅적하게 즐기고 끝나는 하나의 ‘이벤트’로 전락해버렸으니 참으로 씁쓸한 현실입니다.
성탄 대축일을 보내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은 주님의 탄생을 ‘남의 잔치’로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태어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실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내 삶 안에 그분의 뜻을 실천할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을 생각하며 그것을 삶 속에서 구체적인 활동으로 실천해야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사시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행복과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실현되겠지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최종목표인 ‘구원’은 하느님과 사랑으로 친교를 맺고 마침내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분께서 누리시는 영광과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볼 수도, 그분의 목소리를 직접 듣거나 그분을 만질수도 없기에,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하느님과 친교를 맺을 수가 없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사람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보고 그분 뜻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살고 계시기에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겁니다.
임마누엘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종종 동해를 찾아가 일출을 봅니다. 그때마다 태양은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을 뚫고 새벽을 여는 장관을 연출하지요. 그 경이로운 장면을 볼 때마다 그 누가 일출을 막을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무리 밟고 눌러도 땅을 비집고 자라나는 새싹처럼,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 가운데 일어난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다고 하여 그 즉시 세상의 모든 어둠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슬픔과 고통이 있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은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성탄을 기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마법같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기쁨의 근원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오늘 말씀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장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들겠노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시종일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것이었지요. 바로 이 약속 안에 우리의 근원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마치 떠오르는 태양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대지를 뚫고 싹트는 씨앗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오늘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사랑의 언약이었다. <루카 2, 1-14> 12월 2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니,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손자 손녀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은 한 생명이 태어나면 기쁨과 즐거움을 서로 나누며 노래하고 춤추게 됩니다. 오늘날 인류는 악과 죄의 어둠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만나려고 하는 시간이 눈앞에 닥쳐오고 모두가 손을 내밀며 축하를 나누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입니다.
많은 사람은 오늘을 무관심으로 맞이하고 지나치지만, 하느님께 희망을 건 사람은 기다리고 기다리며 시공간 속에서 어둠이 물러가기를 기다립니다. 이미 태양은 빛과 열을 지니고 지구 곳곳을 비추고 힘을 주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공경하는 아빠스님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림 속에 우리의 참 구원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은 주님을 찾아 만나는 기도의 삶을 강조하시며 강론을 마감하며 간절히 청하시는 것을 보면서 가장 평범한 말씀이지만, 가장 강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만나는 방법을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어제 오후에 저를 찾아 만나야겠다고 서울에서 전화가 왔는데, 머물 장소가 없고 내일 약속한 사람 돌아가야 장소와 시간이 난다고 하며 내일로 미루었는데 그에 찾아오셔서 모텔에서 묵으며 오늘 만나기로 했습니다. 어떤 긴박한 사정인지는 모르나 필요에 따라 만나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주었으면 합니다.
알 수 없는 순간에 주님이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어둠이 빛을 찾아 만나기를 기대하듯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에페소 1, 17-27. 3, 14-21을 언제나 아침 기상하며 펴 들고 보면서 기도하는 습관을 45년간 계속하면서 그 안에 담긴 청원가의 응답을 기다리는 내용이 저에게 힘을 주는 시간을 보내게 합니다. 영광의 하느님 우리를 부르시고 충만함에서 더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하게 하십니다. 접근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머물러 계시게 됨을 바랍니다. 주님을 찾아 만나고 주님 안에 살게 됨을 느끼고 깨우쳐 매일 기다리는 주님을 우리 안에, 내 안에 현존하게 하니 이보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평화의 길을 걷게 하는 길은 없습니다. 기도는 만나서 친교를 가지는 기회입니다.
서로 진실한 대화가 없으면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같이 인간적 관계가 어렵고 만남이 어려운 시대에 기도의 삶은 참으로 기다리는 만남을 현실화하고 실효성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만이 우리의 힘이며 생명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참 하느님을 찾고 만나며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축복의 날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은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로 다정하고, 진실하고, 사랑이 깃든 말 속에 기다림이 이루어짐을 깨우치기를 기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평화!”입니다. 이 성경 말씀으로 첫 미사 때 강론한 기억이 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오심과 만남을 축하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 11)
한상우 비오로 신부님
마침내
성탄입니다.
잠깐만이라도
하느님의 탄생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늘의
맑은 사랑이
구유에
내려앉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부족한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탄은
가장 뜨거운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세상을
바꾸시는
아기
예수님의
이름을 뜨겁게
불러봅니다.
작은 것을 위하여
조그만한
행복에서
당신 사랑을
시작하십니다.
삶을 묻는
우리들에게
맑은 감사로
인사하십니다.
참된 사랑을
만나면
또 다른 사랑이
탄생합니다.
참된 사랑이
그리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법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배우는
성탄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고향은
우리들 마음
여기입니다.
하느님께서
기꺼이
우리의 가족으로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가족이시기에
평화이며
영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모두의
아기가
되십니다.
덮어주고
감싸주어야 할
사랑입니다.
가장 춥고
가장 아프고
가장 외로운
이들의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는
만납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들에게
기쁘게
태어나시는
하느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감사의 성탄이
막힌
우리
사랑의
숨구멍을
끝내 열듯
하느님 탄생을
뜨겁게 만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감사와 기쁨의
성탄을
성모님과
성요셉
목동들과
가축들과
그리고
우리모두
함께 축하드립니다.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우리에겐
성탄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어느 해 성탄 미사 강론에서 ‘엘리 비젤’이라는 유대인이 전한 비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셀’이란 아이가 친구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울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술래 친구가 자기를 찾지 않고 집으로 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아이의 슬픔에 공감이 됩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숨어 있어서 찾지 못한다고 좋아하고 있었지만, 한참을 숨어 있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밖에 나와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적막감이 흐르는 가운데 억울함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아이 역시 그런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눈물로 범벅이 된 손주의 호소에 랍비인 할아버지는 이 사실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깨달음을 담아서 이렇게 타이릅니다.
“그랬구나. 그러면 안 되지. 그런데 얘야. 하느님도 마찬가지란다. 그분이 숨으셨는데 우리가 찾지 않는 거란다.”
술래가 숨어 있는 친구를 찾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버리면 숨어 있는 사람의 입장은 기가 막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데 찾지 않고 자기 편한 곳으로 그냥 가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고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탄에 마구간에 태어난 한 아이 안에 하느님이 숨으셨습니다. 그리고 숨은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만이 성탄의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때에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성모님, 요셉 성인, 동방박사, 목동…. 그들 모두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초라한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큰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십니다. 내 이웃 안에 특히 고통과 시련 속에 힘들어하는 이들 안에 숨어 계십니다. 이 하느님을 발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당연히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이웃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시간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당신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세상에 주라. 그러면 최선의 것이 돌아올 것이다(M.A. 베레).
주님을 보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 세뱃돈으로 받은 돈을 들고서 동네 문방구에 가 망원경을 샀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에서 본 하늘에 떠 있는 많은 별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동네 조그마한 문방구에서 파는 오천 원짜리 망원경으로 볼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볼 수 없었습니다. 너무 흐릿해서 아무 별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별을 보려면 고가의 천체 망원경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책에서 본 것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별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오천 원짜리 망원경으로 하늘의 별을 보겠다고 한다면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주님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뜻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면서도 자기 뜻을 다 이루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해주세요. 저것을 해주세요.’라면서 끊임없이 청원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도로 주님을 설득시켜야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린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시려고 내려오신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4년전 근처 낚시터에 유기된 작고 예쁜 믹스 강아지 두 마리를 구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언니 강아지는 뒷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동물병원에서 큰 수술과 재활을 마친 후 입양을 보냈습니다.
동생 강아지는 저희 수도원에서 입양했는데, 이곳에 적응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안했던 마음도 많이 안정되고, 영양 섭취도 잘 되서 그런지 인물도 살아나고 털에 윤기도 반질반질합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서울로 입양간 언니 소식이 없길래, 잘 지내고 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언니 강아지의 부고장이 날아온 것입니다. 예쁜 꽃들 한 가운데 언니 강아지의 영정 사진이 있는 걸 봐서 장례식까지 잘 치렀나 봅니다.
4년여간 행복하게 지내던 언니 강아지가 얼마전 산책나갔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고 합니다. 장례를 잘 치렀고 화장해서 납골당에 잘 모셨다고, 사별로 인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노라고...
언니 강아지의 부고를 들은 저는 갑자기 저희 집 식구가 된 동생 강아지 바둑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유일한 혈육인데,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둑이를 불렀습니다. 품에 안고 알아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제가 그랬습니다.
“바둑아! 이제 너 어떡하냐? 서울 간 언니가 며칠전 세상을 떠났단다! 교통사고로. 누구든 언젠가 다 떠나는거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여기서 잘 살아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고 몸을 흔들었지만, 바둑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저 멀뚱멀뚱 저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내가 바둑이하고 말이 좀 통했으면 참 좋을텐데...참 안타깝다. 내가 강아지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으면,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었으면...내가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가 되었으면...그럼 언니 소식도 전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었을텐데...
만일 말이 통하게 되면 언제나 궁금했던 질문 한 가지, 털도 그리 많지 않은 바둑이가 강추위에도 지붕 있는 집에 절대 안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을텐데...
제가 이 웃기는 체험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 신비의 열쇠가 제 작은 체험 안에 어느 정도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가련한 우리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려고, 우리와 보다 원활하게 소통하시려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시려고...아마도 그것이 육화강생의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또 다시 성탄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바둑이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정말로 강아지가 되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고개를 가로로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고개를 세로로 흔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한 나머지 정녕 당신 자신을 포기하셨습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당신 키를 극도로 낮추셨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포기하시고 나와 하나되셨습니다.
코로나 백신처럼 오시는 예수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과 마찬가지로 많은 본당에서 대축일 미사가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로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되니까 주님께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태어나시기보다 ‘우리 마음’에 태어나십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을 모신 작은 마구간입니다. 이런 의미로 ‘미사’는 사실 매번 드릴 때마다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 대축일이 반복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나, 그 예수님께서 밀떡의 옷을 입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나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습니다. 매 미사가 성탄이 되지 못하면 성탄 미사도 그 사람에게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나,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우리에게 도대체 왜 기쁜 일이 되는 것일까요? 요즘 같아서는 코로나 백신 접종이 전 세계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주식이 폭등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우리가 모두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의 바이러스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죄를 없애는 백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코로나 백신 보다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울까요, 죄 바이러스가 더 무서울까요?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칫 우리 생명을 잃게 만들 수 있지만,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도 아주 가끔은 존재합니다. 호주에 사는 세 아이는 부모가 코로나에 걸렸지만 멀쩡했습니다. 막내딸은 부모와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전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자칫 우리도 죄의 바이러스에 이처럼 면역력을 지니고 태어났다거나 걸렸어도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바이러스는 코로나바이러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파력이 강력하고 걸렸다면 자가 치료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모르니 백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은 백육십팔만 명입니다.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사망한 유태인 수만 육백만 명입니다. 또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그 열 배인 육천만 명입니다. 과연 어떤 바이러스가 더 위험할까요? 당연히 죄의 바이러스가 더 위험합니다.
히틀러가 죄 바이러스의 최초 보균자는 아닙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고 끊임없이 생성됩니다. 누구도 그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물론 히틀러의 집은 그 원죄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 죄의 바이러스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라나 히틀러가 더 완전한 죄의 보균자가 된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죄를 더 감염시킨 장본인은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폭력적인 남편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여인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밖에서는 유능한 공무원이었고 집안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남편이요 아버지였습니다. 알로이스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를 여의고 삼촌 밑에서 자란 고아였습니다. 누구도 그의 자아에서 솟아나는 바이러스를 잡아줄 백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아의 열등감을 세상 명예와 돈과 쾌락으로 극복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폭력으로 모조리 제거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죄의 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그 죄의 바이러스가 우리 각자 안에서 솟아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아에서 솟아나는 재물에 대한 욕심과 성욕, 그리고 명예나 권력욕 등입니다. 사탄이 똑똑한 이유는 이것들의 위험성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고 오히려 이 바이러스에 취해 살아도 된다고 믿게 만든 것입니다. 히틀러도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결국 아버지처럼 자아에게서 솟아나는 죄의 바이러스를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은 무엇일까요? 이 백신은 2차에 걸쳐 접종해야 합니다. 1차 접종은 이 세상의 부모로부터 받아야 하고, 2차 접종은 하느님의 부모로 받아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이 죄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입니다.
히틀러는 1차 접종에 실패하였고, 그러니 2차 접종도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통제되지 않는 죄의 바이러스는 온 독일을 물들였습니다. 좋은 부모에게서 자라 자아를 통제할 줄 알았던 독일인들도 히틀러의 엄청난 바이러스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가 있어도, 그리스도를 믿어도 그들은 학살과 전쟁의 공범이 되었습니다. 물론 몇 안 되는 1차,2차 접종을 모두 한 사람들만 이 물결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본인이 성공한 줄 알았습니다. 교만이 극에 달해 있어서 독일 총통까지 오른 것은 엄청난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본인이 그런 착각에 빠져있으니 1차 접종의 중요성을 알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는 순수한 아리아인의 피만 남겨야 한다고 말하며 아기 생산 공장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독일 남자나 여자라면 그 공장에 들어가 아기를 만들고 낳으면 그냥 나라에서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히틀러의 선전용으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완전한 히틀러의 바이러스 안에서 자란 아이들입니다. 1차 접종부터 거부당한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부모님의 사랑 안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주시는 그 사랑이 바로 1차 접종입니다. 1차 접종으로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활개를 치지 못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지 못한 부모에게서 자랐더라도 일단 인간으로 성장했다면 1차 접종은 어떤 형태로든 맞은 것입니다. 그리고 2차 접종 없이 1차 접종만으로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솟아나는 바이러스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2차 접종입니다.
그런데 이 2차 접종은 개인의 자유의사가 매우 존중됩니다. 1차 접종 때 사랑의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만이 2차 접종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맞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맞지 않습니다.
오늘 성탄 때 이 접종을 한 사람들은 목동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들을 시켜 이들에게 가장 완전한 죄의 백신인 거룩한 하느님 사랑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성체이십니다. 성체는 하늘의 아버지, 하늘의 어머니의 사랑 백신입니다. 이 사랑을 맞으면 더는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의 항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어떻게 돈에 집착할 수 있고, 육체의 쾌락을 좇으며, 남의 험담을 하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런 욕구나 행위가 나와도 바로 고해성사를 통해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죄의 바이러스를 이기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2차 접종은 계속되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반복됩니다.
부모에게서 사랑이 아닌 무관심이나 폭력이 온다면 자녀는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바이러스에 지배당하여 히틀러나 혹은 그와 비슷하게 이웃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좋은 것처럼 여기라는 사탄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사랑으로 사랑이 아니면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성장하여 2차 백신 접종을 스스로 받게 됩니다. 아이들이 성체를 거부하는 이유는 부모가 사랑보다는 죄의 가치를 더 크게 알려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면 구유 위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은 코로나 백신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귀한 영원한 생명의 백신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성체를 영하며 기쁨으로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기쁨을 되새기라고 잠시 이번엔 언제든 받을 수 있는 2차 백신 접종의 기쁨을 미루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쁨으로 성체를 영하면 그날이 참 성탄절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온다고 했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이 하나 켜지면 밝아집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으니 온 세상이 밝아졌습니다. 외로움도,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벗어버리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유튜브’는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승강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공유합니다. 승강장에는 가판대가 있고, 자동판매기가 있고, 마트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듯이 유튜브는 좋은 품질의 영상을 제공하면서 광고로 수익을 창출합니다. 저도 유튜브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강의를 듣기도하고, 뉴스를 듣기도 합니다. 책을 읽거나 강론을 준비할 때면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유튜브는 광고를 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도 광고를 보는 수고를 감수하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켜두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면 다른 영상으로 가기도 합니다. 광고를 듣다보면 흐름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광고가 나오면 ‘건너뛰기’를 누르곤 합니다.
작년부터 유튜브에서 제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한 달에 11불을 내면 광고 없이 유튜브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핸드폰을 열지 않아도 유튜브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핸드폰에서도, 컴퓨터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광고 없는 영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1달 동안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1년 동안 망설였습니다. 책을 사거나, 여행을 가거나, 밥값을 낼 때는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지만 영상을 보는데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타당한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광고를 보는 수고만 감수하면 영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큰마음 먹고 무료체험에 가입했습니다. 광고 없이 영상을 보니 편했습니다. 핸드폰을 열지 않아도 되니 좋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용을 지불하면 특별한 대우를 해줍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프라임(Prime) 회원은 1년에 119불을 지불하는 고객입니다. 아마존은 그런 고객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빠른 배송이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전자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일반회원보다 30분 먼저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은행에서도 VIP 고객에게는 다양한 혜택을 제공합니다. 번호표를 뽑지 않고 바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투자 상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환전에도 혜택을 줍니다. 항공사에서도 VIP 고객에게 혜택을 줍니다. 여분의 짐을 더 부칠 수 있습니다.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탑승할 수 있습니다. 비용을 기꺼이 지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탄’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유튜브의 프리미엄 회원처럼 혜택을 받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아마존의 프라임 회원처럼 혜택을 받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은행과 항공사의 VIP 고객처럼 혜택을 받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알렉산더 대왕의 삶과 예수님의 삶을 보면 예수님 성탄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왕궁에서 왕자로 태어나 왕자로 자랐고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의 일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알렉산더는 고귀한 왕으로 왕궁에서 죽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유와 야망을 불태우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피를 흘렸고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 구원의 봉사자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눈 덮힌 겨울 산, 10번을 찾아나선 산이다. 학생들과 만났던 히말라야, ‘마운틴’이기에는 미치지 못해 ‘힐’ 근처였지만 눈 덮힌 겨울 산은 아름다웠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얼마나 아름답던가? 안나푸르나가 앞에 보이는 베이스 캠프에서 환호했던 그 마음 속에 소극적 자유를 즐겼던 학생들이 적극적 자유로 구원을 가져다 준 삶의 에너지, 그 에너지가 바탕이 되어 제자들은 오늘을 힘차게 살아간다. 그 기억이 생생할 때면 나는 제자들과 성탄을 이야기 한다. 삼보일배, 오체투지를 하던 티벳 승려들의 모습에서 만난 영혼의 투명함처럼 나는 열심히 산을 올랐던 제자들 안에서도 성탄을 보았다.
삶의 동력이 급강하해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나는 그 제자를 데리고 또 올랐던 히말라야 ‘힐’ 베이스 캠프였다. 산 기슭 따라 힘겹게 오르다가 산등성이에서 제자가 기쁜 소식을 들려주며 마음 추스려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말 속에서 나는 성탄을 보았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선물한 성탄을 통한 구원이었다.
나는 험난한 산을 오르며 그들의 성탄을 보며 하느님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하고 기다려주고 그들 수준으로 강생을 시도하며 하늘이 땅이 되신 하느님을 보았고. 땅이 되신 하느님을 통해 우리가 드높여지고 있음도 보았다. 성탄을 수없이 맞이하고 있었는데 살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는 제자들과 함께 하는 속에 성탄하신 예수님을 보기 시작했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났고 그분께서 구세주로 구원을 이루어 주심을 보았다.
그들이 성탄했고, 나도 성탄했고 참으로 예수님께서 참으로 성탄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1,18).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하면서 기다리고 강생의 신비를 산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선물이 바로 구세주의 성탄이었다.
이번 성탄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될 것 같다. 그리스도의 미사(크리스마스)도 셧다운 상태이다. 그럼에도 기쁜성탄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성탄을 그분께서 일찍히 나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실감나는 기쁜 성탄이다. 구세주의 성탄이다. 모두가 실감나는 기쁜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 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9-10).
Dona nobis pacem
원로사제, 동생과 둘이서 성탄 밤미사 봉헌했어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말구유에 누워계십니다.” 기쁜 성탄이라 하는데 성탄하신 예수님을 알고 보면 슬픔입니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우리에게 큰 사랑이며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이렇게 큰 감사는 그 어디에서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쁜 성탄입니다.
크리스마스(그리스도의 미사)는 코로나로 셧다운입니다. 마음 속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난한 마음의 구유를 만들고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성탄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랑을 이웃과 함께 할 때, 허전함과 막힘이 사라지고 우리는 기쁜 성탄이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은총이 충만한 밤입니다. 하느님의 인간 사랑이 극진함을 보았다면 우리가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평화가 가득하시길 빕니다.
도나 노비스 파쳄(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평화를 바란다면 하느님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밤, 저는 모든 이를 떠올리며 기도합니다. 또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2020. 12. 24. 목)(루카 2,1-1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4-7).”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는 말은, 외양간에서 출산을 했다는 뜻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것은 여관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관에 방이 없었다는 것은, 베들레헴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베들레헴의 주민들 가운데에는 이제 곧 아기를 낳을 산모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왜 좀 더 일찍 가지 않았느냐고 요셉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칙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곧바로 나자렛을 출발했더라도, 마리아가 만삭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베들레헴에 도착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상황에서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방을 구하려고 애를 쓴 요셉과 마리아는 ‘가장 작은 이들’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방을 내주지 않은 베들레헴 사람들과 먼저 와서 여관방을 차지한 사람들은 모두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호적 등록을 하려고 베들레헴으로 간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후손들’이었을 것입니다. 여관방을 먼저 차지하고서 그 방을 양보하지 않은 사람들은 요셉과 같은 집안의 사람들이었을 텐데, 같은 집안이라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지 자기 한 몸 편안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앞에서는......)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루카 2,8-9).”
베들레헴에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목자들’은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외양간을 빌려 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의 외양간은 가축들이 잠을 자는 우리와 목자들이 잠을 자는 임시 숙소가 함께 있는 동굴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의 임시 숙소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숙소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야영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은 예수님 탄생 후에 그 ‘기쁜 소식’을 첫 번째로 들은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뵌 사람들입니다. 그 목자들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줌으로써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마태 25,40; 히브 13,2). (그들은 첫 번째로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첫 번째로 메시아를 뵙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일에 대해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1,10-12).”
‘온 백성에게’는 사실은 ‘온 인류에게’ 입니다. “큰 기쁨이 될 소식”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큰 기쁨의 진짜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고, 진짜로 기쁜 소식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입니다. 마르코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7).”
예수님 말씀의 뜻은, “메시아의 임무는 다윗 왕조의 회복이나,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국가의 독립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메시아의 임무이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메시아는(예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나를’ 위한 날이고, ‘나에게’ 큰 기쁨이 되는 날입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천사의 말은,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은, 그 아기가 곧 ‘너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 라는 표시다.” 라는 뜻입니다.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이 왜 메시아의 표징인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 말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는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또 힘이 세다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자신을 모두 비우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은 바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구유’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날
오늘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날
오늘은
아기 예수님처럼
구유 같은 척박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날
오늘은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모신 것을
뉘우치는 날
오늘은
여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거칠고 메마른 곳으로 내몬 것을
뉘우치는 날
오늘은
거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부드러운 내 품에
곱게 모시는 날
오늘은
쫓겨나고 버려지고
잊힌 사람들을
내 삶의 한가운데에
정성껏 들이는 날
와~! 정말 기막히지 않나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저는 사도요한이 영명인데 이 구절 읽으면 늘 깜짝 놀라는 마음입니다.
한처음이 천지창조이고 하느님과 함께 말씀 곧 하느님이셨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천지창조 되었고 생명의 원천이고 사람들의 빛이란 점입니다.
사도요한의 이 표현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어떻게 이런 표현 쓰셨나!
와~! 정말 기막히지 않나요? 그 말씀이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니 더욱!
바로 2020 년 전 오늘 말입니다. 인간이 둔해서 5~6년 오차는 있지만.
특히 예수성탄의 내면을 더 깊이 생각해볼 요즈음(코로나19)이라봅니다.
탄생 모습은 극빈자 천민 같지만 그분은 창조주 말씀이셨다는 점입니다.
코로나시대의 성탄
조용국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미 예수님, 찬미 아기 예수님
1.어떤 분이 복음 영성 묵상에서 이런 영상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당 시설문제로 영상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그 영상에 있는 글만을 소개해드립니다.
2.텅빈 성당... 예수님 없는 빈구유...만날 수 없는 우리...
인고의 시간....
주님 언제까지이까? 저희는 고통을 겪고 있나이다.
주님 어서 오소서. 지체하지 마소서.
부활도 성탄도 함께 하지 못하는 올해,
마치 만나주시지 않으시는 듯....
어쩌면 이것은 주님의 간절한 호소는 아닐까?
마치 가슴이 찢어져도 자녀를 훈육하는 어미처럼...
주님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빈성당, 빈구유,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빈무덤....
부활절 천사의 목소리, “갈릴레아로 가라”
갈릴레아, 고기잡고 일하던 우리 일상의 자리이자
이민족들의 갈릴레아, 가난한 이들의 땅....
당신과 나 처음 만났던, 우리 첫마음 그 자리....
동방박사들은 왕을 찾아 별을 따라 왔다.
하여 그들은 당연히 왕궁에 가면 그분을 만날 줄 알았다.
하지만 거기에 그분은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그저 누추하고 냄새나는 마굿간에,
어쩌면 우리가 숨기고 싶어하는,
우리안의 짐승들, 꿈틀대는 죄많고 가난한 상처투성이의 바로 그 자리에...
나는 지금껏 어디에 있었는가?
잠잠히 기도할 줄도, 묵묵히 가난한 이 찾을줄도 모른 채....
그저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을 뿐이었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저 위로받기만을, 자기 만족만을 쫓아왔을뿐이면서...
그게 신앙인줄 착각하고 있진 않았나?
신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성체를 모셔왔나?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주님을 찾고 있나?
나는 왜 지금 주님께 멀어져 있나?
주님께서 지금 우리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이슬처럼 오소서.
어느새 당신께 젖어있게....
내 안에 당신 스며들어,
나를 통해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치료제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인류애를 회복하는 것과 사회,경제적 바이러스를 치유할 방법까지 찾아야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꼬.
3.참으로 감동적인 묵상글입니다.
정말 올해의 성탄은 쓸쓸함, 외로움, 고독함이 가득한 밤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홀로 광야의 적막함속에 태어나시는 듯 합니다. 처량한 성탄, 어둡고, 외로운 탄생이십니다.
4.우리의 마음은 빛이 줄어들고,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만남을 통해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면서 삶의 용기와 활기를 얻던 우리의 삶은 그저 ‘멈춰’ 있습니다. 일상만 멈춘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신진대사도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몸도 무뎌져 갑니다. 얼굴은 굳어 있고, 서로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며, 자신에 대해서도 존재감을 잃어만 갑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상처와 십자가가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의 어둠이 커져만 갑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멈춤의 시간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합니다. 시간은 많아졌지만 자신을 위한 노력도 귀찮아 지고,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도 점차 식어갑니다. 이웃들과 친구들을 위한 배려의 마음, 사랑의 마음도 점차 작아져만 갑니다. 우리 마음의 어둠을 배설해내지 못하니 마음속이 무겁고, 힘들고, 지쳐갑니다. 그렇다고 빛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지치고, 힘이 겹습니다.
5.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십니다. 그 어느때의 밤보다도 깊은 이 밤에 아기 예수님은 아픔의 사랑을 갖고 태어나십니다.
한가정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그 가족, 친지 모두가 기뻐합니다. 그 기쁨은 보통의 기쁨보다도 훨씬 더 큰 기쁨입니다.
태어나는 아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 아기를 바라보는 모든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평화를 느끼게 합니다. 감사를 느끼게 합니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름다움과 선함을 자극합니다. 특히 부모들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 아기는 그 부모의 사랑의 결과이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아기의 탄생은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6.이 어두운 밤에 아기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한 인간의 탄생속에도 신비스러운 기운이 숨어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에는 얼마나 더 큰 하느님의 힘과 사랑이 숨어있겠습니까?
어둠이 빛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불화가 평화로, 미움과 무관심이 사랑으로, 냉혹함이 따뜻함으로, 굳음이 부드러움으로, 불평이 감사로, 위축된 소심함이 용기로, 무책임이 신념으로, 악의가 선의로, 추함이 아름다움으로, 거짓이 진실됨으로, 불의가 정의로, 나태함이 열정과 열성으로, 빈곤함이 풍요로움으로, 오류가 진리로, 상처가 치유로, 고집과 아집이 올바름으로, 이간질이 칭찬으로, 십자가가 부활의 디딤돌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물을 분간할 수 없었던 그 어두운 밤이 모든 것이 찬란히 빛나는 대낮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7.이 성탄을 통해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같은 모습, 그중에서도 보호를 받아야 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땅에 태어나십니다.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그 말씀안에 성령의 사랑을 담아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만물의 창조주, 그 엄청난 하느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8.그런데 그 사랑을 맨처음 본 사람들은 가난한 목동들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멋지지도 않고, 힘도 없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연속에서 하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9.그들은 노래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대영광송안에는 창조주이신 하느님, 어린양이신 예수님, 모든 것을 이루시는 사랑이신 성령님께 대한 찬송이 가득 차 있습니다.
10.이 날은 하늘과 땅이 결합하는 날입니다. 하늘이 땅안으로 내려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자연도 함께 기뻐합니다. 동물도, 초목도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수십억년의 우주도 함께 기뻐하고,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별빛들이 새생명을 주시는 그 기쁨을 노래합니다.
11.그러나 인간은 아직도 어둡기만 합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이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아뵙는 순간 모든 인생의 암흑이 벗겨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12.그분의 사랑, 그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DNA는 바로 사랑이십니다. 이 어둔 밤에도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당신 가슴을 찌르는 그 창끝에서도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13.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하더라도 의지적으로라도 기뻐합시다. 함께 이 밤을 축하합시다. 우리 마음의 어둠을 뚫고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마음의 힘을 내어 우리 마음에 빛을 받아들이십시다. 당신과 나 처음 만났던,
우리 첫마음 그 자리, 신앙의 갈릴레아로 돌아갑시다.
14.유투브를 통해 이 밤의 기쁨을 함께 나누시는 분들!
성체를 받아 모시지 못한다고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안에 성체께서 사랑으로 계시고, 성체안에 말씀께서 사랑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사라지고, 구세주 우리를 다스리시리라.” 아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의 요한복음의 저자는 복음의 시작에서 장엄하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서 구세주가 세상에 오셨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으며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신음하고 있는 어둠과도 같은 시기에 우리의 주님께서는 큰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더욱 바이러스의 위협이 심해지는 가운데 정부에서는 5인 이상 집합금지 명령을 내려 많은 신자분들이 성탄 미사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더욱 성탄이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2000년 전 우리에게 오실 때도 그렇게 쓸쓸하게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가장 낮은 곳에 오셨고, 가장 고귀한 분이시지만 가장 비천한 곳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 주님의 탄생을 맞이한 사람들은 그저 목동들과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곳을 향해야 하고, 가장 비천한 곳을 향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저 높은 곳과 화려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코로나 위기에 싸인 이 시대에 주님께서는 가장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장 어렵고, 힘들고, 고통 받는 그 곳에 함께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성탄미사를 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그 가장 낮은 곳, 가장 비천한 곳, 가장 어려운 곳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경배하고,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 주님과 늘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들 힘내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작게 되신 하느님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님
교부들은 구유가 참된 빵이 놓인 제대를 상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들레헴의 그 거룩한 밤처럼 여전히 그리스도께서는 제대 위에서 당신을 작게 하십니다. 우리가 살 수 있으려면 영적인 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당신 자신을 작게 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라고 초대합니다. 괜한 들뜸에 마음이 분산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말하기를 절제하고 우리의 시선을 성탄의 표징인 아기에게 둡시다. 연약한 이 아기의 얼굴에서 말씀과 행적으로 백성을 가르치신 스승님, 우리의 배은망덕,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한꺼번에 떠올리는 것은 너무 벅찬 일입니다. 하느님이 사랑 때문에 작아지셨다는 데에 집중합시다. 그리고 제대 위에서 그 일을 계속하신다는 것, 우리에게 먹이시려고 살을 취하셨다는 데까지 묵상을 넓혀봅시다. 매일의 미사 안에서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목동의 순박함으로 성체를 영하고 가난한 작은 이들을 찾아가 그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살을 받아먹은 이는 스스로 아기가 되신 하느님의 겸손을 세상이 알 수 있게 하라는 소임을 받고 파견됩니다. 성탄은 하느님을 본받기 위한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밤 미사)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신 구원자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먼저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의미를 알려 줍니다. 오신 분은 "빛"이십니다. 인류는 죄와 악과 약함이라는 어둠에 짓눌려 살아왔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인류를 대변합니다. 우리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암흑과 같은 어둠 속에 빛이 새어듭니다. 어쩌면 어둠은 실체라기보다 빛의 부재일 것이니, 빛은 아무리 작아도 어둠을 밀어냅니다. 빛이 있는 한 어둠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빛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그 빛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당신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는 무상의 선물이지요. 먼 옛날 성조에게 약속하신 계약과 축복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원과 이어집니다.
복음은 주님의 성탄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루카 2,8)"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
오늘의 복음이 제게 건네신 이 세 구절이 한 단어로 읽힙니다. 바로 "가난"이라는 말씀입니다.
임신한 여인이 자기를 받아 줄 안정적이고 정갈한 방 한 칸 구할 수 없는 여행 중에 몸을 푼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입니다. 당사자인 여성뿐 아니라 동행하는 보호자에게도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오로지 타인의 호의에 기대어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내맡겨야 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가난의 상황입니다.
밤에도 양 떼를 지키며 들에서 지낸다는 건 목자들이 늘 위험에 노출된 불안정하고 험한 일을 하는 가난한 존재들임을 가리킵니다. 광야에는 목자와 양들 뿐만 아니라 거친 날씨와 맹수와 도둑까지 공존하니까요. 그들에게는 맡겨진 양들의 안위가 우아한 교양이나 청결, 율법의 준수보다 앞설 것입니다.
갓 태어난 연약한 아기가 짐승의 여물 통 안에 눕혀집니다. 부모가 여행 중이었고, 해산할 방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나마 한데가 아니라 마구간이라도 구했으니 다행이다 싶은 상황이었을까요. 아기로 오신 주님은 이렇듯 가장 가난한 현실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도 서슴없이 다가갈 수 있는 곳에 당신을 놓으셨습니다. "빛"이 지금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울고 있는 이들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죄와 약함으로 삐걱대는 인간의 실존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려 오신 것이지요.
우리의 가난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난이 우리를 환대하지요. 인류의 대다수가 재물과 권력을 욕망하고 탐하는 현세를 살아가는데, 그중에서 삶의 밑바닥에 더 가깝다는 건, 주님의 현존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주님은 탄생부터 마지막 죽음의 자리까지 삶의 끝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여기가 끝인가 보다.' 싶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주님께서 우리보다 더 아래, 더 끝에 계십니다.
성탄은 가난을 예찬하는 서곡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사랑에 찬 비움이 담겼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가난은 주님의 탄생을 통해 존엄성을 얻습니다. 훗날 고통마저도 주님의 죽음으로 존엄성을 얻게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빛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은총이신 분께 주저없이 달려갈 수 있는 우리의 부족함과 비천함에 오히려 감사합시다. 주님은 바로 이 가난을 구원하러, 가장 가난한 이 되어 오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오늘 밤 우리는 각자의 집, 가정 교회 안에서 비대면으로 미사에 참례하며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겁니다. 내외적 어둠의 현실 안에서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기다려왔는지요! 오늘만큼은, 주님께 더 가까이 가라고 우리에게 지워진 약하고 허술한 가난의 실체와 상처와 훈장들을 토닥토닥 다독여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난에 주님의 빛이 더해지면, 주님과 더 뜨겁게 사랑하고 일치하는 선물이 된답니다.
사랑하는 벗님! 가난으로 오시는 주님을 소박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맞이하시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 은총 가득한 축제 되시길 축원합니다.
낮 미사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요한 복음서는 '말씀 찬가'로 문을 엽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께서 말씀이시지요. 하느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모든 것은 말씀이신 성자를 통해 생겨났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말씀은 우리 영혼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신 하느님의 첫 말씀이 심연을 덮은 어둠을 걷어내며 세상 창조를 시작하셨지요. 말씀은 인간 존재 안에 빛으로 스며들어 새 창조를 이루어가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성자께서 어떤 분이신지 밝힙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을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성자는 빛이시고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십니다. 그리고 강력한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하고 계십니다. 한없이 연약하고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의 약함이 곧 창조하시는 힘이라니 놀랍지요. 인간의 권력자는 강함을 무기로 휘두르지만, 하느님의 주권은 약함의 힘으로 행사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빛으로 오신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그분께서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십니다. 말씀의 힘으로 영의 눈이 뜨이면 자신에게서, 이웃에게서, 세상에서 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눈을 뜬 이상, 영혼이 열린 이상 빛이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빛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한없이 따사로운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지시다가, 어느날 우리 내면을 파고 들어와 우리를 가득 채우십니다.
제1독서는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본다 ...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이사 52,8-9)
말씀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이십니다. 특별히 오늘 같은 날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위안이 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와 식민지 압제 상황 속에서 더욱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듯이 말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의학 기술에 자신만만하던 인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혼비백산해서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대축제일에 그나마 온라인 매체 덕분에 미사를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구유에 경배하지도 성체를 영하지도 서로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하니 마음이 몹시 아프고 고통스럽지요.
그동안 여러 이유로 성사생활에서 소외되었던 분들, 신앙생활은 꿈도 못 꾸며 생계를 이어가는 분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차가운 길에서 지내는 분들, 이국에서 값싸게 노동력을 제공하며 존엄성을 잃어가는 분들, 병고에 지친 분들, 차별에 시달리는 분들...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든 이웃들의 굶주림이 더욱 커다란 허기로 몰려와 영혼을 쓰라리게 합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그럼에도 말씀은 주님의 충만함을 이야기합니다.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그분의 충만함은 물질과 소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어떤 결핍의 상황에서도 충만할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이는 발가벗겨지고 모든 걸 다 빼앗기고 목숨까지 내놓아야 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하느님이 당신을 비우고 또 비워 바닥까지 곤두박질 치시면서 우리에게 건네신 충만함이 곧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 사랑에 사랑을 받아, 죄의 짐에 짓눌리면서도 결핍과 결함투성이인 자신의 실존을 부여잡고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우리 힘으로 당장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한계와 결핍이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는 단초가 된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충만함을 내내 잃지 않을 겁니다. 공기만 차 있다면 구부러지고 흔들리고 넘어질망정 쪼그라들지 않는 '바람인형'처럼, 우리의 종잇장 같이 가벼운 실존도 그분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될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복되고 기쁜 성탄날, 말씀 묵상이 다소 무거워졌네요. 주님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를 특별한 은총으로 위로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긴 터널을 함께 통과하는 우리가 서로 연민의 사랑과 기도를 나누며 빛으로 가득한 주님의 충만함을 잃지 않게 보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거듭거듭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가난함 안으로 들어오셨으니 함께 기뻐합시다.
“축祝, 주님 성탄” - 오늘 밤 구원자 주 그리스도님 태어나셨습니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구원자 주 그리스도님 오늘 태어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주님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마침내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바로 태어난 아기 예수님의 심오한 비밀은 이렇습니다.
이런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 탄생을 체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베들레헴 들판의 양 떼를 돌보던 목자들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첫째, 가난하십시오.
가난을 사랑하십시오, 목자들은 가난했으나 분명 가난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둔 가난한 목자들 아나뷤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둔 가난한 자들은 가난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둘 때 자발적 가난도, 품위 있는 가난도 가능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보상입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가난하나 하느님 만으로 행복한 부자들이 아나뷤 목자들입니다. 가난하나 겸손하고 일체의 증오심이나 원망이 없는 순수한 영혼들입니다. 바로 오늘 목자가 그러합니다.
둘째, 갈망하십시오.
주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지니는 것입니다. 주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고파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주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주님을 향한 기다림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은 열정은 그리움은 성소의 원동력입니다. 갈망의 불이 꺼지면 성소도 위태합니다. 시들어 죽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도닦기 힘들다 합니다. 가난에서 샘솟는 열정입니다. 열정있을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가난했기에 주님을 찾는 마음도 간절했을 목자들입니다. 참으로 갈망의 사람들, 그리움의 사람들인 목자들은 주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모범입니다. 아무리 세월지나 나이들어도 늘 푸르른 갈망을 지녀야 하는 구도자들입니다.
셋째, 깨어 있으십시오.
갈망이 깨어 있게 합니다.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요 기쁨입니다. 밤새 깨어 있던 양떼들을 돌보던 목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모두가 잠든 밤, 깨어 있던 목자들만이 주님의 천사를 통해 구원자 탄생 소식을 들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의 탄생 소식을 직접들은 사람은 저명한 신학자도, 수도자도, 종교인도 아니 밤새 양떼들을 지키며 깨어 있던 일개 평범하고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이어 목자들은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들이 나타나 하느님을 찬미하는소리도 듣습니다. 깨어 있다가 천사들의 하느님 찬미에 동참하는 가난한 목자들입니다. 우리 역시 가난한 목자들과 함께 깨어 있다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넷째. 관상하십시오.
탄생하신 주님을 관상하라 있는 성탄 구유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떠나가자 탄생하신 주님을 찾아 나섭니다. 탄생하신 주님과의 관상적 만남의 일치가 활력의 샘입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내 관상합니다. 참 복된 관상가들이 되어 탄생하는 주님과 더불어 마리아와 요셉을 만나는 가난한 목자들입니다. 관상의 행복, 관상의 기쁨입니다. 참 행복과 기쁨은 주님을 만나는 관상에 있습니다.
오늘 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 가난한 우리들 마음의 구유 안에 빛으로, 생명으로, 희망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시니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이 허무하고 무의미한 광야 인생,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탄생하신 주님의 빛이 온누리를, 우리 안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힙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주님 탄생의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
탄생하신 구원자 그리스께서는 우리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하시길 빕니다. 아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함승수 신부님
어느 시골 본당 초등부 주일학교 아이들의 성탄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성극이 진행중이었는데, 베들레헴을 방문한 마리아와 요셉이 따뜻한 방을 구하기 위해 여러 여관들을 전전하는 장면이었지요. '여관주인 3' 역할을 맡은 아이가 할 대사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요셉이 여관문을 열고 들어가 "혹시 머물 방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쌀쌀맞은 태도로 "방 없어요!"라고 말하면 되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아이의 순서가 지나갔고 드디어 그 아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여관문을 열고 들어가 머물 방이 있는지 물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여관주인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가 혹시라도 대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지요. 그런데 얼마 후 여관주인 역을 맡은 아이는 대본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셉. 여기 빈 방이 있어요."
그 아이는 대사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극에서 맡은 배역과 자신의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기마저 요셉 일행을 문전박대하면 예수님이 이 추운 날씨에 너무 고생하실까봐 걱정되어서, 자신이 오랜 시간 열심히 연습한 배역을 망쳐가면서까지 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이 아이처럼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맞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듯 합니다. 성탄대축일을 기념하는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보다, 지인들과 ‘성탄절 파티’를 여는 신자들이 더 많습니다. 자신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많아도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아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잔치’를 지내면서도 그 잔치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그분의 탄생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씁쓸한 현실입니다. 그런 모습은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지요. 아니, 그 땐 그 이유가 ‘오해’와 ‘미움’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무관심’ 때문이라는 점에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그분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으셔서 살과 피를,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기꺼이 떠안으신 것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을 걱정하는 것과 자신이 직접 그 병에 걸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걱정하며 돕는 일은 작은 희생과 사랑만으로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직접 그 가난을 겪으며 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어려운 일을 해내셨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누리던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다하고 사람이, 그것도 가장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우리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를 바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사랑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복된 권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봉헌하신 희생미사를 기념하고 그분 덕에 구원받게 되었음을 기뻐하자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당신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하느님께서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늘 새롭게 태어나시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본능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이룰 때 비로소 나는 하느님과 하나되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 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대림 뒤에
맞이하는
뜻 깊은
성탄이다.
성탄의 시간이
우리에게로
왔다.
힘겨움 뒤에는
분명 우리를
살리시는
성탄이 있다.
성탄은
자리바꿈의
사건이다.
우리 삶의
자리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셨다.
삶의 애환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는
성탄이다.
그러나
성탄을
받아드릴
빈 자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빈 자리를
찾으신다.
빈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성탄의
기쁨이다.
내어드림으로
우리의
나날들은
하느님의
나날들이 된다.
고개를 숙여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본다.
하느님 없는
우리 삶에
하느님께서
오셨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탄의 별빛과
성탄의 햇살을
흠뻑 받으며
다시 시작하는
희망의 성탄이다.
하느님께서
오셨기에
모든 것은
은총이
될 것이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하늘과 땅
영광과 평화
하느님과
사람은
다시 치유와
행복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맞아들임이
성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