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267087635
1990년, 강원도 춘천시 자택에서 박승유라는 한 노인이 향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24년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성법률전문학교(서울법대의 전신 중 하나)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태평양전쟁 말기였던 당시 상황과 아버지의 권유로 인하여 일본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그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다닐 무렵부터 아버지의 친일행보에 염증을 냈던 그는 입대 한 달 만에 탈영하여 한국광복군에 재입대한다
그가 경성법전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그는 주로 광복군에 대한 군가, 애국가 교육을 하는 교관 역할을 맡았으며 이외에도 광복군 초모공작, 즉 광복군 모집운동에 동원되었고 자신과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에 대한 전향활동 등의 심리전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조선오페라협회 사진)
광복 이후에는 조선오페라협회 간사로 일하며 성악가로 활동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재차 자원입대하였고 그 경력으로 인해 정훈부에 소속되어 전국 야전부대에 위문공연을 다녔다
전후에는 중고교 교사를 거쳐 미국 UCLA 유학 후 1975년 강원대 음악대학 교수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90년에 사망했다.
1990년 사망 당시 위와 같은 독립운동 및 참전경력 때문에 이미 이전에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에 더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현충원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이후 1999년에 박승유의 독립운동 및 훈장 수여가 논란이 되어 재조사가 이루어 지는데
박승유는 다름 아닌 조선귀족 자작 박부양의 아들이며
박부양은 박제순의 외동아들이기 때문이다.
(박제순)
즉, 박승유는 대표적인 매국노인 을사오적이자 경술국적인 박제순의 손자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박승유의 위와 같은 세부적인 행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파 후손이 애국자 행세하는 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조사 결과 위와 같은 행보가 알려지면서 오히려 견부호자(犬父虎子)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박승유는 본인 할아버지인 박제순에 대해 '차라리 자결하지 왜 구차하게 살아남아 후손들을 욕되게 하느냐'라는 착한? 패드립을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애초에 그냥 일본군 탈영만 했다면 모를까 굳이 탈영한 다음 광복군에 재입대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과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재차 자진입대한 시점에서 사실 박승유가 애국자라는 것은 좌우 가리지 않고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조 때문에 독립운동 당시 박승유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이때 가명에 '박'씨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본인의 독립운동 사실을 대놓고 알리기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댓펌
" 독립운동가라고 인품이 훌륭한것도 아니고 친일파라고 인품이 나쁜사람이 있던거만 아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였다. 독립운동가들이 흠없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그런일이 있을 때 누가 나서겠냐 아무리 인격이 훌륭해도 잘못된 선택으로 친일파가 되는거지 독립운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것."
이회영 선생의 아들인 이규창 선생의 발언
첫댓글 대단하시다... 저런 집안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니
멋지다 친일파 집안에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던 건데 신념을 지킨 거 잖아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