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 두 형제가 어떻게나 장난이 심한지, 장난 칠 때마다 엄마가 욕을 합니다. 저것들이 또 방구석애서 지랄이야. 시아버지가 아들네 집에 다니러 왔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시간이 되어서 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 학교에 버스타고 가니, 걸어서 가니? 걸어서요. 걸어서 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니? 지랄하면서 가면 10분이면 가요. 이 아이들은 장난치는 것이 지랄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상을 이야기하고, 평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건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협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사람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고 교회에 상처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하는 협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말 한 마디 잘 해서 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비가일은 분노한 다윗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정도로 지혜롭게 말하여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나발의 미련한 말 한마디는 다윗을 격동시켰습니다. 그래서 가문이 쑥대밭 될 뻔했습니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년을 생각하며 곡식을 심고, 십년을 생각하며 나무를 심고, 백년을 생각하며 사람을 심고, 영원을 생각하며 말씀을 심어라1"
흩어져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혀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파괴시키며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가슴 아픈 체험을 안겨 주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처럼 말 많은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부터 심판이 시작됩니다.
야고보는 3장 1-12절에서 언어의 시험을 통과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는 가능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이유는 선생이라는 직책이 말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5절에서 야고보는 언어를 말, 배, 불의 비유를 들어서 혀가 가진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6-8절은 혀가 얼마나 통제하기 힘든지, 혀가 삶에 끼치는 해악을 소개합니다.
9-12절은 혀를 통제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혀의 이중성, 선한 말과 악한 말이 동시에 나오는 것을 극복해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할 때에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 말로써 유혹하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을 보고 회담할 때 자기들끼리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한국사람들을 다스리기는 쉽다. 먼저 화를 내도록 유도하라. 그러면 한국 사람은 성질을 낼대로 다 낸다. 성질을 낸 다음에는 미안해서 질질 끌려 다닌다.
괴테는 많은 사람과 대화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악담이 나오면 엄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휴지 조각은 흩어 놓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악담을 펴놓는 것은 삼가 주십시오. 그 악담은 다 주워 가십시오. 다시는 가져 오지 마십시오. 더러운 말은 티끌과 먼지보다 더 공기를 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로 짓는 죄를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 3:10-18)라고 하였습니다.
다윗도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고 하였습니다.
칼빈도 “악한 말을 내뱉는 입의 혀는 다른 죄들보다 더욱 추악하다”고 하였습니다.
세우는 말을 하고 무너뜨리는 말은 삼켜야 합니다.
유익이 없는 말이나 덕이 안되는 말은 삼가야 합니다(잠 6:2).
이웃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삼가야 합니다(엡 5:4).
호주의 퓨릿슈 교수는 꿀벌의 의사 전달 방식을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꿀을 발견한 벌은 둥지에 돌아와서는 무용으로 의사를 전달한다고 합니다. 엉덩이를 흔드는 운동이 느릴수록 꿀의 현장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왈츠의 스텝같이 빠른 속도로 춤추면 꿀의 소재지가 아주 가깝다는 뜻입니다. 동서양의 꿀벌을 한데 모았더니 역시 춤의 의사 전달이 서로 통했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의사 전달 방법에 명령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가장 안 좋은 의사 전달 방법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을 향하여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포기해 버린 놈, 쓸데없고 가치 없는 놈이라고 한 마디 한 것이 그 아이의 일평생 동안 생애바퀴를 불사르게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그 언어가 항상 부정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고 피곤하고 바쁘고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의 일하는 모습은 그 언어부터 긍정적이고 즐겁고 기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꾸려 갑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3:1-2)
야고보 당시만 해도 선생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받는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는 이 세상의 생명으로 자식을 인도하지만, 랍비는 내세의 생명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선생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선생이 이렇게 존경받는 좋은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으면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이유는 선생이 더 많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특히 말을 통하여 일을 하는 직책인데 선생은 하는 모든 말들에 대해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혀를 통제하면 생활 전체를 통제한다(3:3-5)
야고보는 말을 통제하면 삶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말에 입에 물려 있는 작은 재갈을 잘 조정하기만 하면 커다란 몸체를 가진 말의 움직임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마어마한 선체를 가진 배가 거대한 광풍에 떠밀려가는데, 아주 작은 키 하나를 잘 조정하면 배의 방향을 틀어서 광풍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조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온 언덕을 불밭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혀는 불의의 불(3:6-8)
말을 잘 통제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 보다는 말을 통제하지 못함으로 화를 당하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지옥과 같은 본성으로부터 불의의 불이 계속하여 솟아올라 혀에 담겨서 말을 할 때마다 뿜어져 나옵니다. 혀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행복으로 가득찼던 생의 바퀴를 확 돌려서 불행으로 빠트리고 맙니다.
혀의 이중성(3:9-12)
찬송하던 그 입에서 저주하는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놓고(마 26:35), 세 차례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마 26:70, 72, 74). 우리의 모습은 집 밖에서는 성자인데, 집 안에서는 악마로 변신하지 않습니까?
어떤 샘은 계속해서 짠물이 나오고 어떤 샘은 계속해서 단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드문 일이지만 샘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각각 다른 근원으로부터 잔물과 단물이 동시에 나오는 곳도 있습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샘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심으면 무화과가 열리고 포도나무를 심으면 포도가 열리는 법이지,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렸다고 감람열매가 열리거나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다가 무화과가 열리는 법은 없습니다. 한 나무에서 전혀 질이 다르고 다른 두 열매가 맺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이 나면 두 번 다시 해서는 안될 말을 합니다. 성난 사람들은 지독한 욕설을 퍼붓습니다.
우리의 혀가 길들여지기 위하여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날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 성령이 가 사람들의 위에 임하자 다른 방언을 말하게 되고 입술들이 열려져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옮긴글>
[출처] 언어의 시험을 통과하라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