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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6일 연중 제3주일 (해외 원조 주일)
제1독서 : 이사 8,23ㄷ―9,3
제2독서 : 1코린 1,10-13.17
복 음 : 마태 4,12-23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참 아름다운 하늘 나라 공동체의 행복한 삶
-회개, 추종,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요즘 새삼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도 사람의 아름다움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독창보다는 합창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듯 혼자의 독사진 보다는
함께 웃는 모습들의 사진이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어제도 수도원을 찾았던 6년 전 혼인 주례했던 부부와 아이의 행복해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 사진에 담아 나누니 기뻤습니다.
하여 참 많이 나누는 함께 찍은 사진들이고 강론에도 자주 올리는 편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에서 하늘 나라를 미리 맛보는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장면의 예수님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바로 이런 큰 빛이신 주님을 모시는 참 은혜로운 미사 시간입니다.
저절로 방금 부른 화답송 고백이 더욱 실감이 납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
이어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모습이나,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나서는
네 어부들의 모습 역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진을 찍어도 참 아름답겠습니다.
하늘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이 은연중 감지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이요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똑같은 주님께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우리를 고쳐 주십니다. 말씀 그대로 믿을 때 믿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참 아름다운 하늘 나라의 삶은 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할 때 시작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고백의 기도문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당신이 계신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죽어가는 하늘 나라 천국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참 아름다운 하늘 나라 공동체의 행복한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 아름다운 하늘 나라 공동체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그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의 아름다움, 회개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첫 일성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무엇보다 임박한 하늘 나라에 대한 응답이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본연의 내 제자리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잃고 삶의 중심을 잃고 표류하는 영혼들을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회개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 계속해야 할 회개의 삶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 없이는 자기를 아는 겸손도, 지혜도 없습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이요
늘 새로운 삶에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회개하여 참 나를 찾는 시간이요,
회개한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영원한 현재성을 띄는, 평생 화두로 지니고 살아가야 할 복음 말씀입니다.
둘째, 추종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회개의 응답이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비전과 꿈이, 평생 화두가 하늘 나라 공동체였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포하시며 제자를 모으시기 시작하는 주님이십니다.
꿈도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됩니다. 하늘 나라의 꿈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함께 거룩한 미사를 봉헌함으로 함께 하늘 나라를 꿈꿀 때
비로소 실현되는 하늘 나라 공동체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늘 나라 공동체요
점차 확장되는 하느님의 꿈, 예수님의 꿈, 우리의 꿈,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참으로 이상주의자일뿐 아니라 현실주의자입니다.
하늘 나라 공동체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제자들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어망을 던지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자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두 형제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부르심에 곧장 순종으로 응답하는 두 형제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예수님 중심의 하늘 나라 공동체에 합류하는 두 형제들입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또 예수님 뒤를 잇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 나섭니다.
이런 즉각적인 순종의 응답을 통해 이들의 주님을 찾는
내적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참으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인도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삶의 방향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도반들과 함께, 더불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일 ‘구원의 출구’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복음의 제자들은 평생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로 참 무지와 허무의 삶을 살았을 것이며,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역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회개는 추종으로 곧장 이어져야 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은 동시에 끊임없는 평생 주님을 추종하는 추종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듯, 한 두 번의 추종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평생,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회개와 추종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일치의 삶입니다.
일치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획일적 폭력적 일치가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사랑의 일치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다양성 속의 일치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치는 쉽지 않습니다. 공동생활은 답이 없습니다. 하여 제 지론이 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수도생활이고, 함께 사는 공동생활이 힘든 수행이고,
함께 사는 자체가 바로 도 닦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또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평생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어제도 오랜만에 만난 형제에게,
“힘든 세상 죽지 않고 끝까지 살기만 하면 구원이다”라 한 말도 생각납니다.
일치보다 힘든 일도 없습니다. 하여 평생 일치의 여정 중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무수한 분열들을 겪어내며 주님을 중심으로 성장, 성숙하면서 굳건해 지는 일치입니다.
사실 분열보다 고약한 죄도 없습니다.
악마가 참 좋아하는 분열이요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은 본의 아니게 악마의 하수인이 된 이들입니다.
그러나 일치가 이상이라면 분열은 현실일 수 있습니다.
일치의 여정 중에 무수히 겪어내야 할 분열입니다.
주님은 당신 사랑의 은총으로 끊임없이 분열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일치를 촉진시켜 주십니다.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주는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그런데 코린토 교회의 분열은 심각했습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치를 호소하는 바오로입니다.
서로 마음이 맞아서, 좋아서, 성격이, 취향이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기에, 따르기에 일치입니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이신 주님을 향하지 않을 때 야기되는 온갖 분열입니다.
참 아름다운 것이 하늘 나라 공동체의 행복한 삶입니다.
주님은 연중 제3주일 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 회개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2. 추종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한 두 번의 추종이 아니라 평생, ‘추종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3. 일치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일치를 추구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한 두 번의 일치가 아니라 꾸준히 지침이 없이 분열을 극복하며 ‘일치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셋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추종과 일치의 삶 중에 비로소 예수님을 닮아가며 실현되는
하늘 나라 공동체의 행복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던 저 역시 “너무 재미있다”라는 다른 신부의 말을 듣고
한두 번 보고 나서는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에는 외출하지 않고 텔레비전 앞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저를 포함해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이 시간을 내려고 노력했고,
결국 끝까지 본방사수를 하면서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난 뒤에는 드라마의 원작 소설까지 사서 읽는 열정까지 가지면서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나온 영화를 사람들은 찾아보았습니다.
이렇게 드라마의 영향력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컸습니다.
그때를 기억하면서 주님을 섬기는 우리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기도 시간이 간절하게 기다려지면서 철저히 본방사수(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기)를 하고 있습니까?
또 주님과 만남이 너무나 좋아서 주님을 더 알기 위해 주님과 연관된 책을 계속해서 보고 있나요?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사람(성인·성녀)의 모습을 닮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드라마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지만, 주님께 대한 열정은 너무나 부족한 우리는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고백하여 죄의 얼룩을 모두 씻지 않는 한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으므로,
먼저 회개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주님에 대한 응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 것에 대한 열정보다 주님께 대한 열정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육적인 행실, 물질적 재산, 육신의 부모라는
세 가지 애착을 주저하지 않고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열정을 보이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키워나갈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늘 설렘을 가지고 이 순간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감이 지금을 더욱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한결같으시고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을 보면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삶 전체를 포괄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뿐 아니라 마음에 품은 의도까지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달갑지 않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회개하십시오’하면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삶의 태도를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쁩니까? 그것은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거듭거듭 어제보다는 더 나은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새로 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살아왔거나 잊고 살아온 삶에서 복음이 말해주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새로워지는 삶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회개하라’는 말을 사랑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2베드3,9).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2티모,2,25)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2코린 7,10).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고 서둘러 회개한다면 반드시 구원의 은총을 입을 것입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성경에서 회개했던 사람들의 실례를 잠깐 보겠습니다.
아론은 미르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모습을 보며 모세에게
“아, 나의 주인님,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하여 저지른 죄의 값을 우리에게 지우지 마십시오.
미르암을, 살이 반은 뭉그러진 채 모태에서 죽어 나온 아이처럼
저렇게 놓아두지 마십시오.”(민수 12,10-12) 하고 애원합니다.
다윗은 나탄이 꾸짖자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오.”(2신명12.13)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기42,1-6) 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당신의 것입니다.”(요나 2,10) 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째 울 때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14,72)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자기를 죄인 중에 “첫째가는 죄인”(1티모1,16)으로 고백합니다.
이밖에도 방탕했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고(루카15,21)
세리 자캐오는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 먹인 것에 대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인물들은 많은 허물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하느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으로, 그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을 깨닫고
새 삶을 살았던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매일 매 순간 거듭나는
새로운 삶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여정에서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사는가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은 큰 수술을 할 때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마음속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수술 받으러 마취실에 들어가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욕을 해대는 사람들의 음성 을 들으며
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말했지만 차마 첫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물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내돈, 하고 어떤 이는 아내의 이름을, 남편을 자식을 부르며…
어떤 사람은 숨겨놓은 애인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데요.
마음 안에 주님을 담고 산 사람은 결정적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품고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 두는 곳으로 몸은 따라갑니다.
마음을 산에 두면 산으로 가고, 바다에 두면 바다로 갑니다.
마음을 좋은 곳에 두면, 좋은 곳으로 몸이 가고, 마음을 나쁨 곳에 두면 나쁜 곳으로 갑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요?
텔레비전, 드라마, ....성경공부, 성체조배...
주님께서 기뻐하실 곳에 마음을 두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회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3,8).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그렇다면 회개의 삶은 생활태도를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야 할 생활태도를 한 번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타성에 젖은 나의 삶을 바꿔야 합니다.
주일이니까 성당 나오고, 교무금 내라니까 내고, 금육재를 지키라하니까 지키고..
그저 의무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심단체가입도 하고 성체조배, 평일미사 참례 등 능동적인 삶이 필요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를 바꿔야 합니다.
쓴 게 약이 된다고 합니다.
그저 좋은 얘기만 듣기를 원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피하는 약삭빠름은
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강론을 들으면서도 내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이야기만 해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주님의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입니다.
세상의 풍조와 타협하며 ‘이정도 쯤이야 괜찮겠지’
'남들도 다 하는 것인데... 나만 고상하게 굴 것 없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믿음이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해야 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은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그물을 버리듯, 아버지와 삯꾼과 관계를 끊어버리듯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4,23-24).
부디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생활을 통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회개의 삶’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한국 교회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올바른 홍보와 신자들의 의식 강화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습니다.
2018년 식량농업기구(FAO), 세계식량계획(WFP),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등
유엔 산하 주요 국제기구는 '세계 식량안보와 영양 상태'에 관해 발표한 공동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에 놓인 인구는 8억2천10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현재 전 세계 인구가 76억여 명인 점을 고려할 때
기후 변화와 분쟁 등의 원인으로 9명 중 1명은 기아상태에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과 남미에서 영양실조와 식량 부족 사태가 악화하고 있고,
내전으로 초토화된 에리트레아, 남수단 등이 포함된 동아프리카 지역은
전체 인구의 31.4%가 영양실조 상태에 놓인 것으로 분류돼
전 세계에서 기아 상황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아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원인은 분쟁과 경제 침체, 자연 재해 등입니다.
특히 온도 상승, 가뭄, 홍수, 폭풍 등 극단적인 기후 변화와 관련된 재난이
1990년 초반 이래 2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
전 세계적으로 식량 생산량은 지난 40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하였고,
곡물 생산량만 따져 보아도 전 세계 인구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이들이 기아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보면 가난한 이들에 돌아가야 할 많은 몫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 지나치게 풍요롭게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반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의 기아 상황에 처한 이들을 보며 우리들이 그 어부가 되어 달라는
주님의 간절한 부탁이기도 합니다.
물속에만 갇혀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와
어부의 손에 잡혀 죽어야 비로소 음식으로 제공됩니다.
굶주림의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의 아픔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안위와 행복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기주의 마음을 없애고
그들을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식량과 물 부족이 심각하게 발생하는 현 상황에서
우리들이 어떠한 부르심을 받았는지 잘 말씀해 주교 계십니다.
“식량과 물 부족은 가장 가난하고 약한 나라들의 내부적인 문제라거나
그들에게만 유보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각자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태도를 통해 많은 우리 형제들의 고통을 조장하거나 제지하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형제들의 절망의 고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장 기본적인 그들의 권리가 존중받을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취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매년 연말이면 ‘신자 수첩’을 제작했습니다.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과 본당의 사목 방향을 전했습니다.
신앙생활에 필요한 기도문과 각 단체의 봉사자 명단을 전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은 2012년 신앙의 해를 맞이해서 선포하였던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미사로 하나 되는 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입니다.
사목국에서는 지구 교육을 통해서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을 설명하였습니다.
본당에서는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을 현장에서 실행하기 위해서 다양한 행사와 피정을 준비했었습니다.
성경공부와 성경 읽기 그리고 성경 필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성령 기도회, 가정 기도를 강조하기도 했고, 정해진 시간에 본당 신자가 함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묵주기도 봉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의회 문헌을 공부하고, 신심 서적 읽기를 함께 하였고, 매주 교회 서적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매월 첫째 토요일은 성모 신심 미사로 봉헌했고, 첫째 목요일은 성체를 현시하였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첫영성체 교리를 준비하였습니다.
성체조배를 권장하였고, 성체 신심에 관한 강론을 준비하였습니다.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벽지를 새로 해 주기도 했고, 장판을 새로 깔아 드리기도 했습니다.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하고, 요양 병원으로 봉사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생각하면 보람이 있었고, 즐거웠던 시간입니다.
1982년 1월 25일을 기억합니다.
저는 신학교엘 지원했고, 그날이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었습니다.
요즘은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합격자들의 이름을 한문으로 적어서 신학교의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저는 이름을 확인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38년이 지났습니다.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부릅니다. 농부는 모를 논에 심기 전에 모판에 안전하게 키우게 됩니다.
모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래서 뿌리를 내릴 정도가 되면 농부는 비로소 모판의 모를 논에 심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에게 신학교는 사제가 되어서 세상에 나올 때까지
기도하고,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는 못자리와 같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지는 38년이 되었고, 사제가 된 지는 29년이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논에 지성, 영성, 건강의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사제의 삶은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자동차는 비록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도록 안내하게 됩니다.
사제의 삶은 세상이 주는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 희생, 헌신, 봉사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의 삶은 소중한 것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소중한 것들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픈 사람, 굶주린 사람, 헐벗은 사람을 돌보는 일이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제도를 삶으로 실현하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와 아름다운 장소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늘 우리 마음의 문 앞에서 우리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가난한 가정에서도 행복한 웃음이 피어나듯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자신의 태도요, 자신의 의지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다리 친교의 다리 봉사의 다리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제들 간에 사랑의 다리, 친교의 다리, 봉사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에게 다리를 놓고 그 안에서 사랑을 친교를 봉사를 나눈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합심하고 일치하여 같은 목소리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리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를 도와줄 때
우리는 커다란 힘으로 복음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실패했을 때, 역사는 새롭게 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 큰 패배의 원인이 바로 나폴레옹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지적합니다.
1812년 그가 원정을 떠날 때 전문가들은 당년의 날씨가 예년에 비해 훨씬 더 추울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들은 철새가 다른 해보다 빨리 이동하고 있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증거를 들면서
러시아 원정을 늦출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자만에 가득 차 있던 나폴레옹은 전문가들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의 네이 사령관은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대의 행렬은 무시무시한 눈발에 파묻혀버리고 말았소.
낙오병들은 코사크군의 깃대 위로 쓰러지고 있소.”
사람 안에는 자신이 옳고 자신이 최고라고 속삭이는 존재가 있습니다.
자아입니다. 자아를 믿게 되면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자아의 정체가 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속고 이웃도 속이는 사람이 됩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자신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이라면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라 믿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자신을 믿는 사람일수록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편이 좋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덜 믿는 사람일수록 진리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자신을 어둠으로 보는 사람이 빛을 보는 사람입니다.
마태오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며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라고 말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라고 합니다.
어둠은 곧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모든 것이 어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둠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만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회개하라시는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음을 깨닫고
빛이신 당신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모든 것이 죽음의 그림자일 뿐임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곧 사탄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당신을 유혹하신 사탄에게도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이 자신을 섬기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사탄과 같아집니다.
가끔은 “죄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모든 것이 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인간은 그 자체가 어둠이고 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되라고 하셨는데 그렇지 못한 모든 것이 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가 아니십니다.
그런데 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분은 나에게 필요가 없는 분이 됩니다.
내가 빛이면 예수님은 어둠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와가 자기 자신이 뱀과 대화하고 있었음을 볼 줄 알았다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 뱀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오직 주님만을 믿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안장과 말굴레를 쓰고 출정준비를 마친 군마가 우레 같은 말굽소리를 내면서 큰길로 뛰어오고 있었고,
불쌍한 나귀가 무거운 짐을 등에 싣고 같은 길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길을 비켜! 그렇지 않으면 진흙에다 짓밟아 버릴 테다.”
군마는 교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마는 한쪽 눈을 총에 맞아 다쳤습니다.
그래서 군마는 군대에 적당치 않아서 어느 농부에게 팔려갔습니다.
농부는 그 말에 무거운 짐을 싣고 나섰습니다.
언젠가 나귀에게 큰 소리 치던 기개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나귀는 짐을 싣고 오는 군마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당신이구려. 어느 날인가에 전락이 있을 줄 알았소.”
자신을 믿게 만들고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드는 자신의 눈을 버려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자신을 빛으로 보는 눈을 잃어야 참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존중하고 사람들을 믿어야 한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람은 그저 뱀의 소굴에 불과하게 됩니다.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그래야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상처받지 않습니다.
자신은 절대 남을 상처주지 않을 사람으로 믿고 있는 교만 때문에 상처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어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이 이기적입니다.
실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는다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나를 위해주시는 분은 한 분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고백하는 방법은 우리가 어둠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빛인 척 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자신이 옳다고 남을 판단 잘 하는 사람들은 절대 믿지 마십시오.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강한 만큼 빛에서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입니다.
빛이시요 진리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