솥바위 단상
설날 연휴가 끝난 정월 초사흘이다. 아침마다 지기들에게 보내는 시조는 세밑에 고향 형님을 뵙고 오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던 ‘솥바위’를 보냈다. “지리산 덕천강이 남강댐 거쳐 나와 / 잔모래 부려 놓아 기름진 들판 이룬 / 솥바위 여울져 흘러 거름강에 이른다 // 정암루 올라서면 펼쳐진 강변 풍광 / 임진년 왜적 막은 백마 탄 홍의장군 / 충절은 청사에 새겨져 길이길이 전한다”
한자로는 솥 ‘정(鼎)’ 자를 써서 ‘정암’이라 불리는데 어렴풋한 설화가 전한다. 연원을 알 수 없는 때 한 도인이 그 바위를 보고 사방 십 리 안에서 대단한 부자가 셋 나온다는 얘기를 중얼거리고 사라졌단다. 그 얘기가 전한 때가 조선 말쯤이었으려나. 다릿발이 세 개인 솥바위 형상에 따라 구한말에 태어난 인물 셋이 공교롭게도 해방 전후 기업을 창업해 거부가 된 전설의 바위다.
하류에서는 의령 정곡면을 태생지로 둔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고, 상류로는 진주 지수면 명문가 허 씨와 쌍벽을 이룬 럭키그룹 구태회였다. 강 건너 함안 군북면에 집성촌을 이룬 조 씨 조홍제가 효성그룹을 창업했다. 세 분이 태어나 100년이 더 흘러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일으킨 기업은 2세 3세에 가업으로 물려주었다. 지금도 그들이 태어난 생가를 방문하는 외지인들이 줄을 잇는다.
솥바위는 진주 촉석루 벼랑 논개가 순국한 의암처럼 흘러가는 물살에 주변부가 흙살이 파여 바위가 드러난 암반이다. 일반적으로 솥을 지칭하는 ‘부(釜)’ 자를 쓰는 ‘부암’이라 하지 않고, ‘정암’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형상 때문이다. 부(釜)는 발이 없는 가마솥을 통칭할 때 쓰는 밥솥의 일종이고, 정(鼎)은 발이 셋 달린 커다란 쇠솥으로 상고 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기다.
내가 어릴 적 솥바위와 정암루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봄가을 소풍 장소였다. 그때는 남강댐이 축조되기 전이라 검푸른 강물이 흐르고 은빛 모래가 펼쳐진 강가였다. 70년대 초 남강댐이 건설되어 담수가 시작되자 수량이 줄고 백사장도 사라지고 하상에는 갯버들이 무성해졌다. 어린 나이에 ‘정암철교’만 바라봐도 대단한 토목 구조물로 바깥세상 견문을 넓힌 기회로 삼았던 날이다.
어른들로부터나 학교 선생님한테 홍의장군 곽재우 얘기를 듣고 자랐다. 유곡면 세간리 서생 곽재우가 현고수에 북을 쳐 의병을 일으켰다고 했다. 사료에는 곽재우가 정암진 전투를 치러 승리한 기록이 전한다. 그보다 먼저 남강 하류 거름강에서 왜구와 맞닥뜨려 치른 전투에서 적선을 격파했는데 이는 관군 이순신이 옥포에서 이긴 소식보다 일주일 앞선 임진란 당시 최초 승전보다.
지리산 중산리 천왕샘에서 발원한 남강물은 함양과 산청과 하동 옥종을 거치면서 지역이나 갈래마다 이름을 다르게 붙여 진주 남강에 이른다. 함양에서 임천강으로도 불리고 산청에 이르러 경호강이나 덕천강이 되어 남강댐에 가두어져 거제나 통영은 물론 남해의 섬까지 상수원으로 보낸다. 홍수 시에는 곤양 인근 사천만으로 방류시켜 하류 농경지 침수를 막아 옥답으로 바뀌었다.
남강 하류를 거름강이라고 이르는데 한자로는 갈림길을 의미한 ‘기(岐)’자를 써서 기강이라고 한다. 남지 개비리에 닿으면 넓은 주둥이가 좁혀져 한군데로 모여지는 실험실 깔때기처럼 낙동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인데 합강정과 반구정이 가깝다. 강변 성산마을 어귀에 홍의장군의 승전을 기린 ‘보덕각’과 예하 장수 손인갑 부자 충절을 기리는 ‘쌍절각’이 세워져 혼령을 위무하고 있다.
내 고향 의령은 소멸 지방자치단체로 꼽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창원에 명곡동이나 소답동 한 주민자치센터 인구만큼 되려나. 군민 전체 수효가 시티세븐 빌딩에 살거나 드나드는 사람들보다 적지 싶다. 도로명에는 ‘이병철대로’나 이건희 아호를 딴 ‘호암대로’를 붙이고 ‘부잣길’ 탐방로를 개설하는 등 인구를 증대시키려 안간힘을 기울인다. 나는 마음에만 머물러 미안하고 안쓰럽다. 25.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