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정적 줄거리 만들기
환유적 어법으로 시를 쓰려면 먼저 <서정적 줄거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등장시킬 화자(persona)와 배경(setting)과 화자의 심리적 거리(psychical distance)를 나타내는 어조(tone)를 결정해야 합니다.
1) 화자의 설정
화자는 작품 속에 등장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단지 시인을 대신하여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기준으로 삼아 그 작품의 전제를 조직하기 때문에 화제의 내용에 따라 화자를 설정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화자의 유형은 시인과의 관계에 따라 <자전적 화자(自傳的話者)>와 <허구적(虛構的) 화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시인이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하는 유형을 말하고, 후자는 화제에 따라 시인이 꾸며낸 화자를 말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자전적이거나 허구적인 화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기(日記)나 소설을 쓸 때를 생각해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기를 사실대로 쓴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 겪은 일 가운데 중요한 것만 골라 쓰고,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서 그랬던 것처럼 꾸며 쓰기도 합니다. 반대로 소설은 모두 꾸며 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중 인물이 애인과 떠나기로 한 여행지는 작가가 대학생 때 배낭 여행을 가본 곳일 수도 있고, 둘이 앉아 한 잔하는 곳은 직장 동료들과 드나들던 술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전적이냐 허구적이냐는 실제 시인과 얼마나 닮았느냐에 따라 나눈 <상대적 개념>에 불과합니다.
일상적인 생각이나 정서를 이야기하려고 할 때는 자전적 화자를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상상이나 도덕적으로 비난받기 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는 허구적 화자를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전적 화자는 앞의 오탁번과 김윤성 작품을 통해 살펴봤으니, 허구적 화자의 경우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새벽 세시 반 몰래 샤갈의 방문을 연다 그때 벽에 걸린 램프를 잡는 바람의 흰 손이 반쯤 내 눈을 가리고 반쯤 내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고양이의 한쪽 눈 속에 기울어지는 수평선 일렁이는 등대 불빛 기울어지는 술병 속에 떨어지는 암보라의 꽃잎 샤갈의 머리맡 재떨이 언저리로 모여든 어두운 바다에 떠내려온 한 알의 레몬을 건져내는 내 손이 심한 해일에 밀려난다.
- 김여정(金汝貞), 「레몬․1」에서
이 작품에서 화자는 ‘새벽 세시 반/몰래 샤갈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의 흰 손’이 눈을 가리고, ‘어두운 바다’에서 떠내려온 ‘레몬’을 건지려고 하다가 ‘심한 해일’에 ‘손’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화자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인의 무의식 속에 담긴 그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허구적으로 창조한 화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전적인 화자를 등장시키면, 독자들은 화자가 실제 시인이든 아니든 실제 시인으로 받아들여 공감하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시인이 자신의 인격을 걸고 말하는 형식이라서, 비현실적이거나 부도덕하거나 비현실적인 화제를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허구적 화자를 택하면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꾸며낸 이야기임을 드러내놓고 하는 형식이라서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재미는 있지만 공감을 사기가 어렵습니다. 또 화자의 유형은 <사회적 계층>, <연령>, <성(性)>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성(性)입니다. 성은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화자의 정서와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데 강력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성(性)과 화제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남성화자 : 국가, 사회, 윤리 같은 공적(公的), 추상적인 화제 - 능동적 ② 여성화자 : 이별, 사랑, 아름다움 같은 사적(私的), 구체적 화제 - 수동적 ③ 어린이 화자 : 물활적, 상상적, 정서적인 화제
너무 규칙적이지 않느냐고요? 그렇다면 다음 미당(未堂) 서정주의 작품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님은 주무시고 나는 그의 벼갯모에 하이옇게 수놓여 날으는 한 마리의 학이다
그의 꿈 속의 붉은 보석들은 그의 꿈 속의 바다 속으로 하나하나 떨어져 내리어 가라앉고
- 「님은 주무시고」에서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서정주 「자화상(自畵像)」에서
ⓐ는 여성화자고, ⓑ는 남성화자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는 개인적인 사랑을, ⓑ는 일제(日帝) 시대 서민 계층의 가난, 다시 말해 공적․사회적 화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는 님에게 말을 걸고 싶어하지만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벼갯모’를 나는 ‘학’으로 비유하면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는 세상 사람들이 비웃어도 ‘뉘우치지’ 않겠다는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법과 어휘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성화자인 ⓑ는 직설적인 어법을 택하고, 어휘도 일상적이고 의미 중심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성화자인 ⓐ는 은유적이고 장식적이며, 겉과 속 말이 다른 아이러니의 어법을 택하고, 어휘도 ‘하이옇게’, ‘수놓은’, ‘학’, ‘보석’ 같은 장식적이고 감각적인 어휘들을 택하고 있습니다.
리듬과 행과 연의 배치도 다릅니다. ⓑ는 남성화자의 자유분방한 성격이 살아나도록 각 행의 길이가 불규칙하게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는 여성의 단아한 성격이 살아나도록 각 행의 길이를 짧고 가지런하게 나눠 정제된 리듬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시인의 작품도 화자의 성에 따라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 국면까지 달라지는 것은, 시인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장에서 모든 요소를 조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정적 줄거리가 완성된 다음에는 화자의 성과 연령과 신분에 맞춰 화제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2) 배경의 설정
화자를 결정한 다음에는 그를 등장시킬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결정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일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의 성격(character)을 만들어내고, 이야기의 방향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옛적 깊은 산 속에 나이 많은 처녀가 살았다’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옛날 옛적’이라는 불특정한 시간은 어느 시대나 있을 법한 보편적 이야기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깊은 산 속’이라는 공간은 ‘나이 많은 처녀’와 연결되여 결혼하고 싶지만 주변에 마땅한 총각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아, 이 이야기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구나’ 하고 계속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또, 배경은 작중 인물의 가치관이나 심리 상태를 은유하고, 그 인물의 욕망을 조장하거나 억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기능은 다음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밤비가 내리네 어둠을 흔들며 조용히 내리네
그리움이 늘어선 언덕에 마른 수수잎 소리가 들리네
아련한 파도 소리 고향집 울타리에 철썩이는데
낮닭 우는 소리도 가슴에 차오르네. - 차한수(車漢洙), 「손․47 : 고향」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상상적으로 귀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조용조용 내리는 ‘밤비’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촉발시켰기 때문입니다. 밤비나 저녁노을은 언제나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밤비가 이런 역할을 한다는 것은, 배경을 대낮이나 폭풍우 치는 밤으로 바꿔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낮으로 바꾸면, 바쁜 대낮에 고향 생각이나 하는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폭풍우 치는 밤으로 바꾸면, '이 빗속에 어떻게 고향을 가겠다고?' 하며 고개를 갸웃둥할 겁니다.
이와 같은 배경의 유형은 <중성적 배경(natural setting)>과 <기능적 배경(functional setting)>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중성적 배경은 작중 인물이 등장하는 무대 구실만 하는 배경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능적 배경은 위 작품처럼 인물의 심리 상태를 은유하거나 어떤 행위를 조장하고 억제하는 배경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를 유기적으로 만들려면 기능적 배경으로 조직해야 합니다. 기능적 배경으로 만들려면, 화제의 내용에 따라 선택햐야 합니다. 초현실적인 화제일 때는 배경을 이루는 사물들에게 초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나무들이 말한다든지,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오가도록 해서 '아,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고 짐작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화제일 때 이런 배경을 택하면 물활론(物活論)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은 동화처럼 받아들여 사실감(事實感)이 떨어집니다. 일상적인 화제일 때는 주제에 관계없는 것들은 모두 삭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풍경을 통해 말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화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중 풍경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 왼쪽에 있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고 나는 강 오른쪽에 있다. 햇살은 푸르고 하늘은 눈부시고 그의 오른발이 강물 속에 있다. 눈부신 햇살이 건너오고 나의 왼발이 강물 속에 있다. 왼발을 보며 그가 웃는다. 물결은 떨리는 그의 웃음을 밀어오고. 나의 왼발은 떨리는 그의 시선을 비끼며 마구 달아난다. 빠알갛게 물드는 나의 왼발이 떨리어 온다. 오른발을 향하여 내가 웃는다. 그냥 그렇게 강물은 흘러간다. 나의 왼발과 그의 오른발은 흘러간다. 오른발을 느끼며 내가 운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고 왼발을 느끼며 그가 운다. - 현희(玄姬), 「강 왼쪽 강 오른 쪽」에서
우리는 자주 날씨가 좋은 날에는 덧없이 인생이 흘러간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 어딘가는 멋있는 일이 있을 텐데 나는 지금 무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도 그런 생각을 강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그 강가에는 미루나무들도 줄지어 서 있을 겁니다. 간혹 까치들이 날아와 깍깍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조그만 마을이 다소곳이 엎드려 있고, 강물에서 물고기들이 퍼덕거리며 뛰어오를 겁니다. 그런데 이 모두를 삭제하고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 과 ‘햇살’과 ‘강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날씨에 비해 자신이 너무 쓸쓸하다는 것을 은유하기 위해서입니다.
특수한 순간의 심리 상태를 다룰 때는 배경을 화자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게 보이도록 조정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이런 점을 잘 고려하고 있습니다.
창가에 앉아 실눈을 뜨는 빗소리. 네 침묵이 서글프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하지 말기. 멕시코인의 몸매처럼 따스해 보이는 커피 잔만 생각하기. 무료하면 다리를 묘하게 꼬고 앉아 먼지 앉은 책들을 펴들 것. 활자는 읽지 말고 비에 젖은 숲을 헤치듯 헤쳐 나갈 것. 활자의 가지마다 늘어지는 넝쿨 식물. 희디흰 꽃잎들은 그리움의 관절 속으로 떨어지고. 그래도 생각나면 곁에 없는 당신을 땅 속에 묻어버리고. 청개구리처럼 개굴개굴 혼자 웃을 것. 창가에 걸터앉은 빗소리가 하루 종일 개굴개굴 운다.
- 서안나(徐安那) <단상(斷想)> 전문
책을 펴들고도 읽지 말아야 할 날이라면, 그리고 '활자의 가지마다' 넝쿨 식물들이 늘어지고, '그리움의 관절 속'으로 '희디흰 꽃잎들'이 떨어지는 날이라면 매우 특수한 날입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고, 그 빗소리가 창가에 걸터앉아 실눈을 뜬다고 배경을 조정했습니다. 그런 날이라면 이니 정상적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화제에 맞춰 배경을 구성하려면, 배경소(背景素)들이 지닌 원형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배경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골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하루의 주기 ○ 빛의 시간 -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 남성적 성격, 노동, ○ 어둠의 시간 - 감성이 지배하는 시간, 여성적 성격, 휴식 ○ 경계의 시간 - 이성과 감성이 교차되는 시간, 중간적 성격, 준비
② 계절 ○ 봄 : 감성의 계절, 여성적 성격, 순진, 화사, 희망-청년기 ○여름 : 이성의 계절, 남성적 성격, 정열, 낭만, 노동-장년기 ○가을 : 감성의 계절, 여성적 성격, 성숙, 고뇌, 우울-노년기 ○겨울 : 이성의 계절, 남성적 성격, 정지, 좌절, 엄숙, 절망-죽음
③ 공간 ○열린 공간 : 남성적 성격, ○닫힌 공간 : 여성적 성격 ○경계의 공간 : 양성적 성격
그렇지요. 낮에는 누구나 활동하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밤이 되면 혼자 있고요. 능동적으로 활동할 때에는 자연히 남성적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는 감성적이고 수동적이고 여성적이고... 계절과 공간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경을 구성할 때 이와 같이 원형적 의미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인류가 원시시대부터 자연 현상을 은유적으로 해석해 와 누구나 동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원형적 의미에서 어긋나게 설정하면 독자들이 어색하게 받아들입니다.
자아, 그럼 문제 하나 내볼까요? 우울한 사랑 이야기를 쓰려고 하면 어떤 화자를 어떤 계절에, 어떤 시간에, 어떤 날씨에 등장시켜야 할까요? 그리고 어떤 곳으로, 주변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떤 것을 생략하고 부각시키야 할까요?
계획이 섰으면 작품으로 써보세요.
3) 거리와 어조의 설정
배경을 설정한 다음에는 화자의 <심리적 거리(psychi-cal distance)>를 나타내는 <어조(tone)>를 결정해야 합니다. 심리적 거리란 대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어조는 그런 거리를 반영한 목소리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거리와 어조는 <화자-화제-청자>의 삼자 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화자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 자신에 대한 태도, 화제와 청자에 대한 태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거리의 유형은 흔히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비교적 가까운 거리-조절된 거리-비교적 먼 거리- 지나치게 먼 거리>로 나눕니다. 그리고 이들은 화자가 선택한 어휘의 뉴앙스와, 문형과 문장의 길이 등으로 나타나며, 성과 연령과 신분에 따라 지배를 받습니다. ① 태도와 거리 0 남성화자 : 비교적 먼 거리-대상과의 관계를 초월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이성적(理性的)・능동적(能動的) 태도를 취함 0 여성화자 : 비교적 가까운 거리-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감성적(感性的)・수동적(受動的) 태도를 취함
② 어조와 문체 0 남성화자 : 기능적이고 소박한 어휘로 자유분방하거나 장중한 어조 0 여성화자 : 장식적이고 섬세한 어휘로 정제되었으면서 가변적(可變的)인 어조
여성 독자들은 왜 여성을 소극적으로, 남자를 적극적으로 분류하느냐면서 섭섭하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임의로 나눈 게 아닙니다. 프로이트나 융을 비롯한 분석심리학자들의 견해와 그들의 견해를 너무 남성중심이라면서 비판한 길리건(C. Gilligan)을 비롯한 여성심리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서 만든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볼까요? 길리건은, 분석심리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남성은 대상과 자신의 관계에서 초월하여 <시비(是非)의 윤리(ethic of right or wrong)>에 의해 행동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여성은 관계를 중시하면서 <아낌의 윤리(ethic of care>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는 확실히 남을 아끼고 배려합니다. 그리고 남성은 하찮은 것도 잘 따집니다. 그런데 옳고 그름을 잘 따지는 사람과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지요? 옳고 그름은 자기와의 관계를 초월하여 판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걸 잘 따진다면 이성적이고 능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런 관계 저런 관계를 고려하다 보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감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보면, 여성심리학의 비판은 분석 심리학에서 주장하는 것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여자도 남자 이상으로 능동적인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문학작품은 특별한 개인의 성격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우리 관념 속에 숨어 있는 보편적 인간상을 겨냥합니다. 그러므로 작중 인물의 성격을 설명할 장치가 없는 시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자나 남자를 등장시켜야 오히려 리얼리티가 강화됩니다.
그 다음에는 화자가 시적 대상과 어떻게 인식하며, 화자와 청자 중 누가 우위(優位)이고, 담화의 장(場)에 함께 있느냐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마세요. 그리고 나의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답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 신석정(辛夕汀),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서
이 작품에서 화자는 사춘기로 접어드는 소년이고, 청자는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지향성은 청자 지향형이고, 초점은 어머니에게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촛불을 켜지 말아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로 인해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화제나 청자에게 가까운 거리를 취하면서 자연물을 인격체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이유를 대면서도 섬세하고 감성적인 어조로 부탁하고 있습니다. 지는 해가 '섭섭해'할 테니 촛불을 켜지 말아달라는 것이 그런 부분입니다. 이와 같이 사물을 물활적(物活的)으로 보는 것은 화자가 아직 어린 소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논리를 세워 말하는 것은 어리긴 하지만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작품의 어조와 문체에도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모든 문장을 두 행 이내에서 마무리하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존대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문장을 짧게 조직하는 것은 부탁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 존대말을 쓴 것은 어머니인 청자가 화자보다 상위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화자가 하위일 때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애원․청원․부탁하는 어조를 택합니다. 그리고 직접 말하기 어려운 화제일 때는 반어법이나 역설법을 구사합니다. 반대로 상위일 때에는 비교적 먼 거리에서 명령․금지․야유․비판의 어조와 직설적인 어법과 평어체를 택합니다. 그러므로 유기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배경을 고른 다음에는 화자에 따른 목소리를 골라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 ○ 시의 줄거리를 세우는 방법을 시작 노트에 정리해 두시오. ○ 자기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서정적 줄거리로 만들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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