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처음 본 건 별채에서였다
아니 옥수수밭에서였나
손님이 올 때만 잠깐 사용하던 우리 집 별채는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깍지광과 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안개가 산기슭까지 내려와 우리 집을 둘러싼 어느 새벽
옥수수밭에서 기어나온 그것이 별채로 흘러들었다
나는 안개가 자욱한 마당 한 귀퉁이에서 오줌을 누다
온통 새파란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의 옷을 훔쳐 입은 그것,
축축하게 젖은 왜소하고 약해 보이는 그것,
감자녹말같이 희멀건 이를 드러낸 그것,
그것의 얼굴에서 벗겨져 나오는 걸레같이 비틀린 웃음
나는 그것의 정체가 궁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안개가 물러갈 때까지 이불속에서 눈을 뜨고
손톱으로 손가락마디를 꾹꾹 눌렀다
그것은 낮에는 별채에서 잠을 자고
밤이 되면 일어나 옥수수밭으로 기어들어갔다
옥수수꾀꼬리가 나무처럼 퍼드러지고
옥수수수염이 갈색으로 마르기 시작할 무렵
그것이 그것과 같은 것을 하나 더 데려와서
그것은 그것들이 되었다 그것들이 된 다음
그것들은 더 이상 옥수수밭으로 가지 않고
옥수수밭에서 기어 나오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새벽마다 지게를 지고 옥수수를 따려고
옥수수밭으로 들어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둠이나 짐승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게 된
엄마의 이글거리는 얼굴은
그것들도 두려운 것 같았다
그것들은 별채에서 이상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뱀이 검불 밑을 지날 때 나는 소리 같은 소리,
찹쌀가루를 익반죽할 때 어쩔 수 없이
이빨 사이로 빠져나오는 바람 소리 같은 소리,
날지 못할 정도로 다친 새가
날아오르려고 날개로 땅을 치는 소리 같은 소리,
나는 가끔 별채 가까이 가서 곤충처럼 몸을 떨며
노랗게 밝아오는 별채 문을 지켜보았다
그것들은 뼈가 없는 그림자였다
중력을 잃어버린 넝쿨이었다
바닥을 찍어 올리는 소용돌이였다
그것들이 된 다음 더욱 강해진 그것들은
밤마다 별채에서 들썩거리며 나를 괴롭혔다
와서 문을 열어보라고,
불빛을 비추고 자기들의 모습을 보라고,
본 것에 대해 떠들어대라고,
그것들은 벌레와 새들의 입에 자기들의 말을 물려
내 귀에 쏟아부었다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엄마가 누런 옥수숫대를 모두 베어냈을 즈음,
그것 하나가 뛰어나와 자기를 찢으며 사라졌다
다시 그것이 된 그것은
처음 나타나 별채에 흘러들 때처럼 왜소하고 약해져
텅 빈 옥수수밭 고랑을 따라 사라졌다
엄마는 별채 문을 떼어 창호지를 다시 바르고
코스코스 꽃잎을 붙였다
나는 혹처럼 박힌 굳은살을 쥐고
그것이 벗어놓고 간 아버지 옷이
바지랑대에 걸려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5.03.07. -
몇 번을 읽었지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들짐승일 수도 있고 거렁뱅이나 문둥병 환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든 옥수수밭에서 기어 나와 별채로 흘러든 이들은 햇빛 아래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소외된 존재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들은 무언가를 훔쳐 달아난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해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화자인 아이의 상상력과 막연한 두려움이 뒤섞여 실제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존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공포입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거나 성별이나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막연한 공포나 증오를 조장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것들”로 지칭되는 순간, 누구라도 개별성을 잃고 인격체로서의 존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것”일 수 있습니다.
〈최형심 시인〉
Il Postino: Theme · Itzhak Perlman · John Williams · Luis Bacalov ·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