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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부처님 오신 날부터 19일 일요일까지 2박3일, 예수살이공동체 현대사 기행 도보순례가 끝났다. ‘현대사’란 일반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라 함은 일제 치하에서의 독립부터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독재에 맞서 투쟁하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고로 ‘현대사기행 도보순례’란 말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의 장소를 따라 걷는다는 것인데 왠지 종교단체에서 나올 말 같지 않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예수살이공동체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 평신도사도직단체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쩌다 예수살이공동체는 ‘현대사 기행 도보순례’를 떠나게 되었을까?
예수살이공동체는 1998년 3월 1일 창립해 2013년 창립 15주년을 맞게 되었다. 청년신앙운동으로서 ‘지상에서 천국처럼’ 사는 이상의 삶을 살기 위해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기쁨,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다. 2013년 청년대표단의 활동 방향은 ‘공동체, 깊이 알기’였다. 우리는 공동체로 살면서도 공동체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공동체, 깊이 알기’라는 활동 방향 아래 여러 가지 청년사업을 기획하였다. 만들어진 지 15년 된 강학집 다시 읽기, 강학회를 통해 공동체에 대해 공부하기, 그리고 청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청년다운 역동성을 가진 사업으로 도보순례를 기획하였다. 어디로,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청년으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청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떠오른 것이 바로 도보순례였다. 1박2일은 너무 짧으니 2박3일로,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또 이런저런 휴일이 많은 5월로 일정을 잡았다. 무엇을, 언제가 정해졌으니 어디로, 어떻게가 남은 상태. 우리는 어떤 도보순례를 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종교단체답게 성지순례를 갈 것이냐? 대답은 ‘아니다’였다. 성지순례는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앞서 얘기한 우리 공동체의 정신 중 ‘투신’의 정신에 대해 좀 더 공부하기로 했다. 예수살이공동체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을 위해 이미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평화를 위해 매향리 폭격장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시위, 일본 청년단체인 JOC와의 교류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하고, 평화활동을 하시는 고로 주교님의 방문도 있었다. 또한 신앙인상의 모범으로 삼고 있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 순국 100주년(2010년)을 기념해 하얼빈으로 그 발걸음을 따르기도 했다. 미국 소 수입 반대, FTA 반대 시위, 쌍용차와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금요미사 봉헌금 지원 등의 활동들. 하지만 그것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요즘 학교에서는 국사가 선택과목이라고 한다. 국사,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우는 것인데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한다니. 그나마 그 선택과목에서 대한민국의 근 백년의 역사는 겨우 몇 페이지를 차지할 뿐이다. 배우지 않으니 관심도 없고 관심이 없으니 내 일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책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우리가 몰랐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 이 사회가 왜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지 말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서울의 근현대사 거점들을 순례하기로 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정해졌다. 준비 모임은 청년대표단과 사무국 실무자가 함께 준비했다. 그런데 막상 준비 모임을 하는데 막막했다. 우리에게 현대사 지식도 부족했고, 어디서부터 돌아야 할지도 막연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간신히 서울 내 거점들을 정하고 도보순례의 방향을 잡았다. 거점에 대한 조사로 자료집을 만들고 답사를 가고, 순례 3주 전부터 평일 저녁에 2번의 준비 모임을 진행했다.
2번의 준비 모임이 끝나고, 5월 17일 도보순례의 아침이 밝았다. 첫 번째 거점은 전태일 열사의 흉상이 있는 평화시장이었다. 버스로 이동해 흉상에 다다랐다. 우리가 도착해 전태일 열사에 대해 설명하자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젊은 청년들 열댓 명이 배낭을 메고 흉상 옆에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 설명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나 보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오토바이와 관광객들 사이에서 전태일 열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죽음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지금의 노동권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질문을 던지며 말이다. 나눔을 마무리하고 다음 거점으로 이동하려는데 열사의 흉상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분이 전태일 열사의 분신 장소를 알려주신다. 〔나중에 이분이 이씬(esssin)이라는 가수로 세상의 어두운 곳을 찾아다니며 노래로 힘을 실어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화시장 안쪽까지 뒤져도 보이질 않는다. 다른 분께 여쭤보니 평화시장 입구 바닥을 가리킨다. 바닥에는 아무런 표지 없이 둥근 자국만 남아 있었다. 지난 겨울 제설제로 사용한 염화칼슘에 부식되어 표지석이 떨어져나가 사라졌단다.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과 전혀 관리되지 않은 모습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후 도보순례에 참여했던 제자 더부네가 박원순 시장의 트위터에 이 사실을 알렸고 시청에서 확인해 전태일재단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 ‘더부네’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예수살이공동체의 회원을 일컫는 말이다.
두 번째 거점은 예수살이공동체가 신앙인상으로 삼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었다. 남산까지, 답사할 때는 한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였는데 인원이 많다보니 예상보다 늦어졌다. 기념관 앞에 앉아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사상,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눔을 마치고 관람하려니 관람이 제한되었단다. 6시까지 관람이라 입장시간 제한이 있었던 것. 다행히 들어갔지만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알기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전체적으로 일정이 늦어져 대한문까지 도보가 아닌 버스로 이동했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문으로 수문장 교대식 등을 하는 문화재로서의 이름도 있지만, 소외된 이들이 모이는 곳으로의 이름도 가지고 있다. 2009년 이후 4년이 넘게 농성 중인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 또한 이곳에 있다. 얼마 전 분향소가 강제로 철거된 이후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쌍용차 분향소에 들러 분향을 하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미리 연락해 설명을 부탁드린 문기주 지회장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회장님은 쌍용차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셨다. 우리는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노와 무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부 기업의 이익만을 위해 헐값으로 회사를 팔아넘기고 회계조작을 통해 비정규직과 정규직 직원 약 3,000여 명을 길거리로 내몬 일. 지금까지 단 한 명의 복직자 없이 24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죽은 이들에 대한 사과도 없다. 청문회를 통해 회계조작이 드러났음에도 법적 효력이 없는 청문회일 뿐이었다. 국정조사가 필요하단다. 언론에서 말하지 않는 이야기에,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우리 주변 아버지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물었다.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국정조사로 가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잘 뽑아야 하고 압박을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30분이란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 우리는 대한문 미사에 함께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 후 특송도 불렀다. 부족한 실력에 연습도 못해 듣기 괴로우셨을지도.
저녁 식사를 하고 용산의 새남터성당으로 향했다. 숙소인 지하 교리실에 모여앉아 나눔을 했다.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는지, 오늘 하루 어땠는지 나눴다. 그리고 현대사 퀴즈를 맞추는 시간을 가졌는데, 담당 거점을 조사한 더부네들이 맞히는 모습이 어찌나 뿌듯하던지. 늦게까지 나눔을 하고 저녁 기도를 하고 잘 준비를 했다. 5월이지만 지하의 교리실 바닥이 돌이라 꽤 추웠다. 책상을 이어붙이고 준비한 매트를 깔고 침낭을 한 겹 깔고 침낭 하나를 더 준비해 그 안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둘째 날 일정은 서대문역의 경교장부터였다. 전철로 이동해 부분 참가자들과 합류했다. 경교장은 김구선생이 암살당한 곳으로 해방 후 임시정부의 청사였다가 병원, 대사관 등으로 사용되던 것이 다시 복원되어 3월 개관하였다. 복원되기까지의 과정이, 다사다난했던 우리의 역사와 비슷하게 느껴져 왠지 서글펐다. 경교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향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죽은 곳. 1987년까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운동장에 있는 격벽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간수가 죄수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죄수들 간 대화를 막기 위해 키보다 높게 벽돌로 벽을 쌓았다.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굉장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사형장 앞, 눈물의 미루나무뿐이었다. 한 더부네가 한 말이 기억난다. 이 형무소에는 ‘먹방’이라는 게 있단다. 요즘의 ‘먹는 방송’이 아니라 ‘먹[墨]방’이란다. 0.7평의 좁은 방에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고. 들어가 봤는데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다고 말이다. 이게 도대체 살라는 건지. 죽으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이다. 각자의 가슴에 무거운 추 하나를 달고 신촌의 이한열 기념관으로 향했다.
연세대 가까이 위치한 이한열 기념관. 하지만 주택가 안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한열 조사 담당 더부네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기념관으로 들어섰다. 계단으로 올라가니 벽과 입구의 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누나, 조카의 글. 고(故) 김대중 · 노무현 대통령의 글도 있다. 열사 중 기념관이 있는 건 이한열 열사밖에 없단다. 열사의 어릴 적 사진, 소지품, 편지. 그리고 최루탄 피격 당시에 입었던 옷가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22살이었던 이한열은 글씨도 잘 쓰고 참 잘생겼다. 전남 화순군이 고향인 이한열은 귀한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아들 모르게 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5.18을 대학에 와서 알게 되었고 이한열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20대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라 말한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을 걸었고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아 죽고 말았다. 6월 항쟁은 그의 죽음으로 더욱 열기를 띄게 되었다. 이한열 기념관을 뒤로하고 절두산성지로 향했다. 한 시간여의 길.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성지를 둘러보았다. 새남터까지 걷기 위해 한강 공원길로 내려서는데 비가 내린다. 다행히 비가 많이 내리지는 않았다. 신발이 젖지 않을 정도의 비. 미리 준비한 우비를 입고 약 2시간 거리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오는 날 한강을, 더부네와 함께 이야기 나누며 걷는 일. 언제 또 그럴 수 있을까? 청년이건 제자건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쨍쨍 해가 비추는 날씨였다면 더위에 한 마디 말도 하기 싫었을 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하느님이 도와주신다.
신용산역 근처에서 뜨끈한 순대국과 막걸리 한 잔으로 배를 채우고 새남터성당으로 돌아왔다. 어제처럼 교리실에 모여앉아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영상을 보았다. 〈오월愛〉라는 영상으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의 현재 모습이 담겨 있었다. 버스 운전사, 구두닦이, 과일 노점상, 꽃집(시위 중 총에 맞아 불편하게 된 다리로). 그들은 한동안 혁명의 영웅이 아닌 폭도로 대우받아야 했다. 그분들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시위하는 것을 몰랐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불의를 참지 않았던 것에는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그들이 받았던 차별과 모욕과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영상을 보다 깜짝 놀랐다. 전에 다니던 회사 앞에서 구두를 닦던 분이 광주시민군이었던 것이다. 설마 했는데, 그분이 맞았다. 놀란 이유는 내가 그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말장난하던 그 모습이 싫어서……. 아마도 구두닦이라는 직업 또한 무시의 이유이기도 했으리라. 영상을 보며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느새 마지막 날이 밝았다. 지하 교리실, 20여 명의 더부네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함께 미사를 드렸다. 미사 후 우리는 신용산역에서 수유역까지 전철로 이동 후 4․19 민주묘지까지 걸었다. 근현대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4․19 혁명부터 우리가 공부하고 걸었던 사건들과 현재 우리가 맞닿아 있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상황별로 설명을 들었다. 현대사의 흐름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기념탑 앞에서 비문을 함께 읽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묘역을 돌아보고 모여 앉았다. 2박3일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현대사 기행 도보순례를 마치는 마음을 서로 나누었다. 현대사에 관심 없던 젊은 청년들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한다. 나는 청년 대표로 이 도보순례를 기획하였고 두 번의 준비 모임에, 사전 답사와 자료집 준비에, 예산까지 이것저것을 준비해야 했다. 준비팀과 함께 준비했지만 책임감의 무게는 조금 더 무거웠던 것 같다. 도보순례 시작 전부터, 끝날 때까지 내 심장은 마구 두근거렸다. 워낙에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인데다 일정은 자꾸 느려지고 계속 안달이 나 함께 가는 더부네들을 채찍질하는 못난 모습이 많았다. 솔직히 둘째 날까지 내내 힘들고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마지막 날, 2박3일의 나눔을 하는데 눈이 반짝이는 더부네들을 보면서 다른 의미로 심장이 마구 뛰었다. 벅참이랄까? 일정이나 가는 방법보다도 ‘현대사’에 대해, ‘더부네’와 함께한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끝날 때에야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내 옆에 언제나 더부네들이 있었고 격려해준 것이 생각났다. 많은 것을 배웠다. 더불어 산다는 것. 공동체로 산다는 것.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꾸준히 알고자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천국처럼 살기 위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투신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윤진영 (소피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