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1
사는 게 무서워서 속 시원히 울 새도 없었는데
누가 이리 한가하게 천지를 적시며 오시나.
가을비 2
흩뿌리는 산발한 머리채… 추적추적 신발 끄는 소리
해종일 젖은 무릎으로 시보다 도토리 줍는 두보.
가을비 3
빈한하게 살은 한 생이었다고 푸념치마라.
누군들 저 비울음에 젖어 목줄 떨며 안 지나가겠는가.
가을하늘 2
하늘이 파랗다고 그 물빛에 너무 젖으면
낡은 사랑도 마른 가슴에 서럽게 되살아난다.
고요
눈 내리다 그쳤다고 천지가 다 고요가 아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그대가 있어 고요다.
공원묘지
잘나봐야 공용주차장의 들고나고 든 택시들 같이
끝내는 다 고만고만한 방에 터 잡고 잠든 영혼들이다.
길
끝없는 것이 길이라면 아무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삶이 길이므로 간다면 어쩔 수 없다. 가보자.
김제평야 -장종권에게
어려서 세상천지가 넓은 들뿐인 줄 알았다.
점차 셈드니 산도 보였다. 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노인 잠
죽는 게 편타는 말 입에 단채 살다가도
눈감으면 저승이 싫은지 설 잠을 잔다.
ㄹ
어릴 때는 귀신이 겁나 무조건 내닫던 골목길이
커서는 연인과 돌고 도는 미로의 돌담길이 됐다.
먹이
밥알 몇 낱에 개미가 소리 소문 없이 까맣게 모였다.
먹이를 보면 꾀고 없으면 사라지는 이치는 사람도 같다.
물거울 호수
제 몸 보지도 못하는 산이 물에 잠기는 것을
자신을 비출 수 있는 큰 거울이 호수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
미칠 듯 타는 황맥黃麥 위, 떼 귀신의 비명 까마귀
귀를 자르고 탈지면 같은 구름으로 봉해 버렸다.
발자국
눈길 위로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모두 따뜻한 곳으로 찾아간 이웃이면 좋겠다.
방문 보름달
휘영청 달 좋다. 우리 내외 신바람 나 고스톱 치는
꼴 좀 보라고 서로 화투짝 든 손을 하늘 높이 쳐든다.
벽
살아가는 슬픔, 벽, 뚫고 넘어도 벽 또 벽,
가슴에 소금 못을 박고 유수인생流水人生 액자도 건다.
봄소식
눈구덩이 움 속 묻을무 싹트듯
겨우내 스님 턱수염이 너무 자랐다.
분꽃
아기 젖 떼려고 금계랍 바르던 꼭지다.
바람난 사내 날라리 불며 다니던 입술이다.
불면
오죽하면 가랑대는 저 소리에 피 마를까
밤새 가슴앓이 환자처럼 가랑잎 가래 끓는 소리.
비 2
물빛 눈물 비치며 그녀가 목을 꺾고 우는구나.
비야, 또 어쩌란 말이냐. 이제 다 흘러간 옛날인데…
ㅅ
지게 작대기 받쳐놓고 주인은 어디 갔나.
나무하다 말고 진달래꽃 꺾어 순이 주러 갔나.
사랑
불쏘시개 없이도 마음에 당겨지는 불이다.
디지털로 연기하는 아날로그 식 연극이다.
사진사 -김태영에게
무자비하게 박기만하고 뺄 줄 모른다고 하지만
자기 것을 절대 남 안 줄뿐 제 것은 잘 박고 잘 뺀다.
삼월이
가시내를 사랑했나봐 지금도 못 잊는 걸 보니.
어릴 때 3월이 오면 기를 쓰고 놀렸던 이름 삼월이.
섬 1
늘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는 저만치다.
물에 싸였어도 돌출 행동으로 외로운 사춘기다.
섬 2
어머니가
그리운 몸집 큰 고래 한 마리
자작자작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어 있다.
시
온갖 복잡 다양한 기능과 역할까지도
다 단순하게 압축내장하고 있는 스마트폰이다.
시속時俗 -박제천에게
겉은 그랜저인데 속은 티코란다.
허준의 고향 한의사도 시속 따라 진맥을
하는구나.
신神
자꾸 빨리 부르다보면
시인이 신이 된다.
아귀鮟鱇 1
입이 크다고 무엇이든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탐욕만 보일 뿐이다. 입만 갑부지 하체가 부실하다.
아귀餓鬼 2
한 술 밥에 물어뜯고 지지고 볶고 아귀다툼하다보면
사는 게 다 그렇지. 싸움 끝에 정 붙은 귀신이 되네.
어머니
청국장 반대기 같은 달이 떴다.
달빛 물결 일던 고향집, 옛 고대로의 어머니.
언덕
산에는 반드시 언덕이 있다. 언덕을 만나면
누구나 넘어보려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원효
호두알 껍질 계율을 부숴라. 할 수만 있다면
가사 장삼도 훨훨 벗어 던지고 새처럼 수행하라.
UFO 헌터
UFO 못 찾으면 어떠냐. 그 핑계로 답답한 세상
하루 한두 번씩 마음을 활짝 열고 하늘 보며 산다.
은행 알
아주 먼 옛날 누님이 가마 타고 시집갈 때
소피보는 걱정 덜려고 두서너 알 먹던 것이다.
인생
어느 누구도 삶의 끝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 하늘이 궁금해 모두들 밤낮으로 열심히 산다.
장가
뭐 그리 갖출 게 많으냐. 미루다 끝장난다.
사내가 불알 두 쪽 차고 어느 난바다엔들 못 서겠느냐.
장안사 1
절이 없으니 부처님도 목탁소리도 사라졌구나.
본시 산천경개가 다 절이자 부처구나.
장안사 2
절은 불새 되어 날아가 하늘이 되고 부처님도 없이
오가는 바람만이 무심히 목탁을 치며 세월을 운다.
저승길
세월이 흐르고 변하는 것을 가는대로
따라가기만 했는데 어느새 저승길이 눈 아래다.
절
아무리 절해도 부처님은
소귀에 경 읽기 묵묵부답.
절명시 1 -매천 황현에게
망국의 선비가 모든 걸 접고 내놓은 시다.
산천초목도 부들부들 치를 떠는 피맺힌 절규다.
절명시 2
한 번뿐인 목숨 칼금 그으며 쓴 시.
한 줄 이상 뭐 그리 필요하랴.
절명시 3
쓰고 싶어도 누구나 쓰는 시 아니고
죽고 싶어도 아무나 죽는 죽음 아니다.
절명시 4
어두운 골방 구석이 아니라 보란 듯이
대명천지에 목숨 끊으며 당당히 쓴 시.
종교
믿고 살기보다 믿으라는 등쌀에
그냥 살기가 수도修道처럼 훨씬 힘들었다.
찜질방
억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사는 게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게 인생.
추억 -남태식에게
어릴 때 밤하늘에 별이 없다고 운 적이 있단다.
시인으로 사는 한 그 기억은 아름다운 상처로 남으리.
카지노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불통인 기계 앞에서
광신도처럼 울부짖다 끝내 떨어지는 지옥이다.
칼
식민지 세월부터 이적까지 칼이 없던 아버지
이빨만 숫돌에 칼 갈듯이 한을 살다 가셨다.
코스모스 1
외로움에 젖어서 꽃이 된 창공蒼空이다.
무슨 죄든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게 죄다.
코스모스 2
가을 햇살 곱게 스미는 조선 창호지 문살에
그녀 보라고 연서戀書 쓰듯이 접어 넣었던 꽃이다.
파도 2
산산 부서지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철퍼덕 주저앉아
허옇게 웃어젖히는, 바람 잘날 없는 거품인생.
파리
비는 것이 어찌 그리 어머니를 닮았는지
손이 발이 되도록, 발이 손이 되도록…
폭포
울음큰새는 아무리 목청을 틔어도 노래가 될 수 없다.
그저 핍박받은 자의 경술국치 통곡이거나 분노다.
ㅎ
초등학교 때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보며 그려
담임선생께 칭찬받던 천장의 갓 쓴 알전구 한 알.
- 살아가는 슬픔, 벽 / 고요아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