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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4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은총으로 풍성해집니다.
암으로 병원에 가는 때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달에도 두 번씩 갔었는데 그리고 3개월에 한 번 정도로 길어지더니 4년이 되니까 6개월에 한 번 갔습니다. 2018년부터 일 년에 한 번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벌써 암 수술한지도 13년이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도 짧아졌습니다. 검사하는 시간도 짧아졌고, 내 걱정도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완치 판정을 받은 지 이제 2년이 되어 갑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는 아픈 정황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여러 가지의 검사를 거친 다음에 진단을 내리고 약을 처방하고, 환자에게 병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그래야 의사는 편견 없이 환자를 보고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환자의 설명을 듣고 오진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도 암을 발견하기 전에 언제나 인후염에 걸린 줄 알고 있었고, 내 병의 증후를 아주 가볍게 설명했고, 내가 피를 토하면서도 목이 붓고 감기가 심하게 걸린 인후염에 걸린 것처럼 설명을 했기 때문에 내가 설인두암을 앓고 있으면서도 인후염 진단과 치료를 5년이나 받았습니다. 그래서 환자는 의사 앞에서 아픈 증상을 정말 잘 설명해야 합니다.
장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대도불칭 대변불언 대인불인 대염불겸 대용부기”
夫大道不稱 大辯不言 大仁不仁 大廉不慊 大勇不忮
‘무릇 참된 도(道)는 나타낼 수 없고, 참된 밝힘(判斷과 識別)은 말로 하지 못한다. 참된 인(仁)은 인이라 하지 않으며 참으로 청렴하면 겸손하지 않고, 참된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정말 본질적으로 도(道)를 물건처럼 끄집어내어서 보여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이 세상 사람들의 말과 글로써 나타낼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한다고 하여도 그 것은 정말 빙산의 일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사람이 설명해서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 진리이고 도(道)입니다. 도를 말로 가르칠 수 없고, 생각으로 가르칠 수 없으며 행동으로 쉽게 보여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식별력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안에서 선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 선한 마음을 간직하고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여야 하나 무엇이 진정한 선함인지는 하느님께서만 판단하시고 인정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또한 참된 인은 인이라 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정말 본질적으로 진리는 물건처럼 꺼내서 보여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를 말하고 생각하고 실천한다고 하여도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실천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고, 하느님만이 그 진실을 알 수 있으며, 주님만이 그 진실의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만이 진리이시며, 주님을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아무도 그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천명하십니다. 밖으로 드러난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주님이 사기꾼처럼 보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바리사이들에게는 주님이 가시처럼 느껴지니, 정말 밉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항상 그 본질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진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여도 살을 뚫고, 투시해서 감광판에 인식되듯 주님은 그렇게 하느님의 본질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면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본질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매일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시는 주님은, 당신의 진실을 우리에게 심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질을 깨닫고 그분의 본질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무엇이 진리이고, 도이며 선이고 인(仁)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은총으로 그 작은 실마리를 잡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를 때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며 진실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은총뿐입니다. 믿음은 은총으로 풍성해집니다.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축일3월 24일 성 오스카 로메로 (Oscar Romero)
신분 : 대주교, 순교자
활동 지역 : 산살바도르(San Salvador)
활동 연도 : 1917-1980년
1970-80년대 남미 군부 독재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성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y Galdamez)는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El Salvador) 동부 산미겔(San Miguel)의 시우다드 바리오스(Ciudad Barrios)에서 산토스 로메로(Santos Romero)와 과달루페 데 헤수스 갈다메스(Guadalupe de Jesus Galdamez)의 6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3년간 공립학교를 다니고, 지역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은 후 목공 일을 배우던 그는 목수가 되길 원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1930년, 열세 살의 나이로 사제가 되고자 산미겔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산살바도르에 있는 국립 신학교에 입학해 수학한 후 1937년 이탈리아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42년 4월 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여행 제한 때문에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로마에 머물며 수덕 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엘살바도르에 사제가 필요하다는 교구장의 부름을 받고 1943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나모로스(Anamoros)에서 본당 사제로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한 후 산미겔로 이동해 교구장 비서, 교구 신문 편집장, 주교좌본당 주임, 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20년 이상을 보냈다. 주요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호하는 일에 전념하며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 되었다. 1966년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0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74년 가난한 시골 지역인 산티아고 데 마리아(Santiago de Maria)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도 그는 조용하고 학구적인 성품의 보수적인 주교였다.
1977년 2월 23일, 로메로 주교가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정부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환영받았지만,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많은 사제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열네 가문의 지주들이 전체 경작지의 60%를 소유했고, 이 지주들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국가방위군과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 이들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은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실종되기 일쑤였다. 그중에는 가난한 소작농들뿐만 아니라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외치던 사제와 수녀들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기 전까지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가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임명되고 3주도 지나지 않은 3월 12일, 가난한 소작농들을 변호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오랜 우정을 나누던 예수회의 루틸리오 그란데(Rutilio Grande) 신부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란데 신부가 아길라레스(Aguilares) 성당에 미사를 봉헌하러 가던 중 암살단에 의해 피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로메로 대주교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정부의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지만 그의 요구는 무시되었고, 검열을 받는 언론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란데 신부의 장례미사가 열리던 날, 그의 교구에서는 단 한 대의 미사만 봉헌되었다.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사제들과 신자들이 주교좌성당에 모였다. 그는 강론 중에 “살인한 형제들이여, 당신들에게 말하고자 하노니,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당신들의 마음을 대신해 참회를 빈다. 왜냐하면 교회는 증오할 수 없으며 어떠한 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사제 가운데 한 명이라도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부의 면담 제의도 거부하고, 전국에 방송되는 라디오를 통해 주일마다 고문당한 이들과 살해당한 이들, 투옥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강론을 했다. 그는 더욱 용감하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폭력에 맞섰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만행과 박해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를 지켜볼 수 없었던 로메로 대주교는 주저 없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편에 섰고, 빈곤의 문제와 사회 정의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교구장 재임 기간 내내 살해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미사 강론과 교회 언론을 통해 정부의 부당함을 고발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기둥으로 우뚝 섰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피살되기 얼마 전 한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엘살바도르 민중 가운데 부활할 것이다. 살해 위협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그 순간 엘살바도르의 구원과 부활을 위해 내 피를 하느님께 기꺼이 바칠 것이다. 내 피를 희망의 표지와 자유의 씨앗으로 삼으소서!”
피살되기 하루 전에도 그는 강론을 통해 엘살바도르의 군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인권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저지르는 정부의 뜻에 따르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는 1980년 3월 24일 저녁, 산살바도르의 ‘하느님 섭리의 병원’ 성당에서 암 환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며 강론을 마치고 제단 중앙에 섰을 때, 성당 앞까지 자동차를 타고 온 무장괴한으로부터 가슴에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를 암살한 무장괴한들의 정체는 후에 밝혀졌는데, 미국 특수전 사령부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예비역 장교들이 군사정권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만행이었다. 3월 30일 산살바도르 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미사에는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고, 그의 시신은 주교좌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절차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지만, 그가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인지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시복 재판이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그 후 2007년 5월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 전임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는 그리스도의 미덕을 실천한 위대한 신앙의 증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새 전기가 마련되었고,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이 2015년 2월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인정하고 그를 순교자로 선포하면서 시복 일정이 확정되었다.
2015년 5월 23일, 산살바도르 시내 광장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추기경 주례로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미사가 거행되었다. 시복식을 주례한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은 “로메로 대주교의 정신은 현재에도 살아 숨 쉬며 지구상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있다”고 언급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의 선택은 이념적이지 않고 복음적이었다”며 “로메로 대주교는 분열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이며, 아메리카 교회를 빛낸 별”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복 미사에는 주변 남아메리카 대통령들과 추기경들을 비롯해 30여만 명이 모였다. 제단은 로메로 대주교가 피살 당시 입었던 혈흔이 묻은 주교복과 꽃과 초로 꾸며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8년 3월 7일 교황청 시성성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인한 여성의 치유 기적을 승인한 시성 교령을 발표했다. 이는 시성에 필요한 마지막 단계인 기적심사가 통과되었음을 의미한다. 엘살바도르의 한 신문에 따르면, 임신중독증에 용혈, 간 기능 장애, 혈소판감소 등의 합병증이 더해진 헬프증후군(HELLP Syndrome)을 앓던 산모가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살아났다고 한다. 체칠리아로 알려진 이 산모는 2015년 8월 헬프증후군을 앓아 간 기능 손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의사는 그녀의 남편에게 “아내가 죽게 되었으니 주님을 믿는다면 기도하라”고 당부했다. 기도하러 집에 돌아온 남편은 할머니가 전해 준 성경을 펼쳤는데, 성경 속에는 할머니가 보고 기도하던 로메로 대주교의 상본이 있었다. 남편은 로메로 대주교에게 아내를 살려달라며 전구(轉求)를 청했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내는 다음 달 깨어나 완전히 회복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10월 14일, 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기간 중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의 시성 미사를 집전했다. 전 세계에서 7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례한 시성식에서 로메로 대주교뿐 아니라 바오로 6세(Paulus VI, 9월 26일) 교황을 포함해 모두 7명의 성인이 새로 탄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론에서 로메로 대주교와 바오로 6세 교황에 대해 성덕을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증거자였다고 극찬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며 “오늘 시성된 성인들은 이 길을 따랐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이날 시성식 미사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혈흔이 남아 있는 띠를 매고, 바오로 6세 교황이 사용하던 팔리움과 목장, 성작을 사용했다. 두 성인은 서로 개인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는데, 바오로 6세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를 주교로 뽑았고, 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오스카 로메로 (Oscar Romero)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이배근 가브리엘 형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