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하나님의 온전한 계획
[시23:1-6]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저번주일에
사람의 생각과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 시간을 바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복된 생각과 행동이 무의식속에 있는 마음의 뇌에 기록되어 있다
습관 바꾸기는 뇌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뇌의 구조를 바꾸려면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서 의지적으로 훈련 시켜야 한다.
지금의 내 모습은 과거의 내 모습이니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되면 의지적으로 하라
사단은 우리에게 쉴새없이 생각을 넣는다.
가룟유다에게 생각을 집어넣은 자가 사단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도 말씀들을 때도 잡념이 들어가게 한다.
사단의 목표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은 근심으로 기도하는 우리에게 더 근심되게 만든다.
사단의 궤계를 알아서 우리는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여 그분이 우리를 마음껏 축복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하여 불선한 길로 가기에 의인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의를 행할 자가 아무도 없음을 알아 내 옆의 사람을 선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간다는 것을 알아 인간의 면모를 보고 사람이기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니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모두 해주면 걱정이 없지만
하나님은 말씀 가지고 이기게 해준다고 하신다.
말씀이 떠올라 그것을 이기어야 한다. 말씀은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
오늘날 사단이 침투하는 곳은 미디어를 통해서이다.
TV부터 시작해서 핸드폰, 유튜브, 인터넷를 통해 인간의 더럽고 악한 것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주고 있다.
우리는 사단이 우리를 무너지게 하려고 하는 것을 모르고 문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문명을 선별해서 쓸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사단의 공격에 대해서 대처하는 방법은 다윗처럼 매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다윗처럼 날마다 생각해도 넘어질 때가 있는데 그렇지 않는 자는 사단에게 문을 열고 들어오세요 하는 자인 것이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다윗을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예수가 오시는데 두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을 부르지만 사실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시23편은 다윗의 시인데 사람들이 왜 좋아할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체험할 때가 있다 .
그러는데도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어려운 때가 오면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하면서 불평하고 좋은 일 생기면 좋으신 하나님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왜 그렇게 하시었는지 알게 된다.
이것은 훈련의 한 과정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또한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면 사건마다 우왕좌왕 하게 된다.
다윗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과 계획이 1절에 나온 목자와 양의 관계임을 알았다.
그는 들판의 목자로 어려운 환경에서 부름 받는다.
그는 과거에 목자였기에 양과 목자의 관계를 너무 잘 안다.
그가 목자로 있으면서 양을 괴롭히는 짐승들을 때려잡아 양을 구했었다.
양의 입장에서 짐승으로부터 지켜주는 자가 자기 목자임을 알게 된다.
다윗이 실족할 때도 버리지 않고 지키어주시는 하나님을 알고 이런 시를 쓴 것이다. 그는 양의 입장에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깨달았다면 걱정하지 말라.
물론 과정 중에는 아골 골짜기에 들어갈 수 있다.
좋은 곳만 데리고 다니며 훈련시키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며 보호해주는 것으로 양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로 이렇게 인도한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성도가 좋아한다.
하나님의 인도는 힘들 때도 있지만 우리를 끝까지 책임진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때 이런 원리가 적용되었다.
애굽의 종살이 하는데서 꺼내 광야로 가는데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다.
즉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 광야를 지나 푸른 초장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 지위에 있든지 우리는 목자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내 잔이 넘치도록 인도하는 그분을 체험하며 시23편을 노래해야 된다.
그것을 모르면 중간에 원망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죽어갔다 그런 실패를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나를 어떤 곳까지 끌고 가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았으면 신뢰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붙든 이상 우리가 순종하고 의지하면 다윗처럼 하나님이 인도해서 마침내 그 자리에 인도하는 모습을 보므로 원수 앞에서 식탁을 베푸신다.
다윗은 사울이 죽이려고 했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가다가 하나님이 마지막에 다윗을 위해 베풀어주신다. 시23편은 삶에서 겪은 시이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난다 할지라도 주의 손에 들린 막대기와 지팡이를 보고 신뢰해야 한다.
막대기는 대적하는 짐승을 물리치는 것이며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이다.
인생여정에서 마지막 여정은 5절
*기름으로 바르셨으니는 나를 높이는 것으로 기름부음이 왕으로 올리는 것이므로 대적이 보는 앞에서 나를 높여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내 잔이 넘쳤다? 나를 향한 계획이 너무 풍성하다.
*나를 따르리니? 확신에 찬 표현으로 그럴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는 확신이다.
인간은 능력이 안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기에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러나 목자 되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돌아보면서 내 잔이 넘쳤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다윗은 유다지파로서 아브라함은 다윗의 첫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첫 약속을 받는 자로서 그 약속이 후대에 전수되어 갔기에
아브라함을 향한 계획과 다윗을 향한 계획이 모두 같다.
아브라함 부를 때와 다윗을 부를 때의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부를 때의 환경과 조건을 다르지만 궁극적인 계획은 같다.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수메르 문명이 있는 곳으로 인류최초의 문명이 나온 곳으며 시날 땅 으로 바벨문명이 된다. 쐐기문자가 발달된 곳이다.
거기에서 살았다
문명이 발달되고 우상이 넘치는 곳이다.
그곳에서 아브람을 부르는데 계획에 대해서 말도 하지 않고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한다. 그는 바벨탑 심판하고 언어가 혼잡한 상황에서 불러낸 것이다.
창11장의 바벨탑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가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도시의 사람에게 시골로 가라고 하는데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과 아브라함을 왕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하시는가.
한 사람의 어떠한 모습을 위해서인가?
하나님의 속성을 보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계획이다.
만민인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임 받는 도구가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기에 오직 나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나를 어떻게 해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나면 내가 아니라 전체를 말한다.
이런 자는 기도가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서 훌륭한 자가 된다.
나 혼자 잘되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은 머리를 포함한 모든 지체가 잘되어야 한다.
또한 각자의 지체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지체는 없다.
각자 다른 지체를 위해서 존재하며 또한 모두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계획하신 것은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종착지는 하나님 나라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뽑아 왕도 만들고 부자도 만들어 가신다.
그 사람 하나가 목적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름 받은 아브라함도 독자이삭을 바치는데 까지 가게 된다.
그는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는 것까지 가게 된다.
완성된 후에는 자식 낳고 잘 살다 죽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을 보았는가?
[요8: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창22:8]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 22: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준비하시리라. 이레, 준비되리라 는 같은 단어로 ‘라아’로서‘보다’가 된다.
아브라함은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대로 그 계획을 본 것이다.
그는 축복의 목적이 아브라함 자신이 아니라 만민에 대한 계획을 본 것이다.
우리는 ‘나를’ 이라고 하지 말고 우리 전체를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알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성취된다. 내 주위의 성도들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교회를 생각하고 목표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하는 선교와 전도를 기뻐하신다.
내가 너를 불러서 어떤 사람을 위해서 쓰고자 하는데 적합한 자가 되었느냐고 하신다. 나만 해준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의 자기이름을 내고자 했던 인본주의가 있던 곳에서 그곳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보여준다.
바벨탑 세우며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데 그곳에 아브라함을 높인다.
인본주의가 스스로 높아지려 하면 하나님이 막지만 하나님이 불러서 높이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하나님이 높이겠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축복해서 너를 높이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것은 너희들끼리 살지 말고 만민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일하시는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아들을 죽이면서 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를 택하시고 인도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고백을 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목적지는 알지만 그곳에 도착하는 과정을 잘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산이다.
그는 떠날 때도 힘들게 그리고 도착해서도 자기 유익 따라 아내를 버리고 살지만 하나님은 어린 자이기에 책망하지 않고 앞서가면서 해결해주신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이삭을 바치는데 까지 간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잘 모르지만 그의 손에는 막대기와 지팡이가 있어 나를 인도하실 것이니 우리는 양으로 그분의 계획을 믿고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과거에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인도하신다. 이것은 원리이다.
우리의 힘듦에 그분은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이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