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 매매죄를 범하고, 법왕의 자리를 돈으로 샀다고 일컬어지는 로마 법왕 알렉산드로 6세의 첩인 바노차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조반니 보르지아, 체자레 보르지아, 그리고 딸 루크레티아 보르지아가 바로 그들이다. 이 가문의 음학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로 뒤마나 빅토르 위고 등이 소설화하거나 희곡화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크리스티앙 자크 감독의 프랑스 영화 〈 보르지아 가의 독약 〉에 의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루크레티아 보르지아(1480~1519)는 그 미모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였고, 14살 때 밀라노 스포르차 가의 적자로서 페사로의 영주인 조반니 스로프차와 결혼하였다. 루크레티아는 이때 이미 두 명의 오빠들과 아버지인 법왕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결혼을 한 것이나, 법왕 알렉산드로 6세가 루크레티아에게 결혼을 강요한 것은 첫째 로마와 밀라노의 동맹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 한가지는 친자 형제와의 근친상간 속에서 두 아들에 대한 질투로 그렇게 한 것이라 일컬어 진다.
결혼식은 바티칸 궁전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하지만 그 결혼은 루크레티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남편인 조반니가 성적 불능자였기 때문이다. 조반니는 보르지아 가의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자신의 부하인 자코미노에게 자기의 대역을 맡게 했다. 하지만 루크레티아는 자코미노 한 사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다시 친자 형제와의 근친상간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날 밤, 그녀가 자코미노와 함께 자신의 방에서 농탕을 치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루크레티아는 얼른 자코미노에게 커튼 뒤에 몸을 숨기도록 일렀다. 그리고는 옷을 입은 뒤 문을 여니, 오빠인 체자레가 서있었다. 그녀는 서슴없이 침대 위에서 오빠에게 몸을 맡겼는다. 체자레는 만족을 느끼며 침대에서 내려온 뒤, 루크레티아를 향헤 이렇게 말했다. 「네 남편을 독약을 사용해서 죽여라. 네가 하지 못한다면 내가 대신 하지」루크레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자레가 방을 나가자 곧장 자코미노에게 「지금 한 이야기를 들었겠지. 남편의 방에 가서 지금 당장 로마를 벗어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한다고 전하거라」라고 일렀다.
그날 밤, 조반니는 교회에 간다고 이르고는 애마 토르코를 타고 로마의 도시 밖으로 달려 지신의 영지인 페사로로 달아났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부정한 아내 루크레티아의 도움으로 자칫 〈보르지아가〉의 독약의 희생자가 될 뻔한 신세를 면한 것이다. 그 후부터 루크레티아는 밤마다 새로운 남자를 찾아 로마 시내를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1497년 6월 루크레티아가 17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큰 오빠인 조반니와 작은 오빠인 체자레 형제가 나폴리로 출정하게 된 전날 밤이었다. 어머니 바노차는 트란스테베레의 별장에 많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송별연을 베풀었다. 연회가 끝났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두형제는 각기 부하들을 데게고 로마로 돌아갔는 데, 가던 도중 형인 조반니가 말을 멈추고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먼저 가거라 나는 잠시 여자 집에 들렀다가 뒤따라 가겠다.」 체자레는 하는 수 없이 혼자 말을 타고 로마로 향했으나, 이튿날이 되어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출정준비를 마친 바티칸 궁전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으며, 아버지인 법왕은 급히 사람을 풀어 아들의 소재를 찾게 했다. 그 결과 조반니의 시신이 로마 시내를 흐르는 테베레 강에서 건져 올려졌다. 그의 시신에는 온몸이 칼로 난자당한 자국이 선명했다. 조반니를 죽인 것은 루크레티아의 남편이었다고도 일컬어지고, 또한 법왕인 그의 아버지라고도 일컬어 지는가하면, 또 체자레가 죽인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으나, 진범이 끝내 잡히지 않은 채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듬해 루크레티아는 두 번쨰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그녀보다 2살이나 연하인 아라곤 가의 서자 비사글리아 공 알폰소였다. 그녀는 이 연하의 미소년과의 결혼식에 크게 만족했고, 1년뒤에는 로드리고라는 아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이 태어난 그 이듬해, 알폰소가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그는 바티칸의 궁전에서 자객을 만나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다.
1개월 남짓 그가 병상에 있는 동안 루크레티아는 정성을 다해 그를 간호했다. 그러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체자레의 부하인 미키엘리라는 자가 알폰소를 침대 위에서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루크레티아의 남편이나 연인은 모두 체자레의 손에 의해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이 당시 로마 시민들 사이에 정설이 되어 있었다. 바티칸 궁전에서 일하는 남자들 가운데 독약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루크레티아와 관계를 맺었던 하인이나 노예들이었으며,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모두 체자레의 질투 때문이었다고 일컬어 진다.
알폰소가 죽은 그 이듬해, 루크레티아는 세 번쨰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북부 이탈리아 페라리의 지배자인 에스테 가의 알폰소 1세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는 루크레티아의 두 번째 남편과 이름이 똑같았다. 게다가 이번의 결혼 역시 정략적인 결혼이었다. 그들의 결혼식은 바티칸 궁에서 거행되었으며, 알폰소 1세가 그녀를 페라리로 데려오기까지 한달동안 바티칸 궁에서 연일 밤마다 결혼 축하연과 무도회가 베풀어졌다.
루크레티아에게 있어 알폰소 1세와의 결혼은 아버지와 오빠의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마음에 없는 것이었으나, 막상 페라리로 와보니 사정은 그와 달랐다. 그녀는 그 곳에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로마에서의 루크레티아는 「음탕한 여자」였지만, 페라리로 오고부터 그러한 그녀의 별명은 빛을 잃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궁전에 살면서 아리오스토나 벰보 등의 저명한 시인들, 그리고 티치아노 등의 유명한 화가들을 궁전으로 불러들여 그들과 함께 예술을 논했다. 그리고 자신도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시는 어릴 적부터 그녀가 관심과 재능을 보였던 분야이다.
1519년 6월 루크레티아는 세상을 떠났다. 39살의 젊은 나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고,성숙한 아름다움이 넘쳐 흘렀다고 전한다. 하지만 사산을 한 다음, 오랜 산욕열에 시달리다 결국 남편과 시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페라리에 온 덕분에 아무런 미련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지요...」이것이 그녀가 남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남편인 알폰소 1세와 시녀들은 그녀를 위해 진심어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