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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17,3-9>
그 무렵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당신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
(잠언 4,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십니다.’
곧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바퀴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아는 법>
“당신은 누구라고 자처하는 것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라고 이렇게 요구하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한 다음, 그러니까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다음, 하느님을 아는 분이라고도 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느님을 당신만 아신다는 얘기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말씀인지 생각게 합니다.
헌데 그렇습니까?
우리도 하느님을 알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제 하느님을 알기는 합니다.
그러나 들어서 아는 것이고 소개로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전체적으로 하는 얘기는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기에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경험적으로 아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우리는 그 분이 알려주셔서 아는 것이고 알려주신 정도만 아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는 것도 전부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뿐이시고,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일부를 신비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돌아와 거기서 자기가 만난 아프리카 사람과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서 들려줍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은 사람도 자기가 들은 아프리카 사람과 문화를 알기는 알고 결코 모른다고 할 수 없지만, 들려준 만큼 알고 결코 경험적으로, 다시 말해서 내가 직접 보고 아는 게 아니지요.
저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청산도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청산도가 참 좋다고도 했고, 옛날 제가 감명 깊게 봤던 서편제의 장면이 청산도 장면이었기에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그런데 '가보다'는 것은 가서+보다는 말입니다.
청산도는 제가 영화 화면으로는 본 곳이지만 가서 직접 본 곳이 아니고, 그곳의 바람을 제 뺨으로 맞고, 그곳의 보리를 제 발바닥으로 밟아보고, 그곳의 골목길과 담장길을 제가 직접 걸어본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직접 보신 그리스도만 완전히 아시고, 우리는 그분이 들려주신 것만큼만 알고 불완전하게 압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알고, 그 정도만 아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경험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머리로는 다 알 수 없어도 경험적으로는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을 하면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만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욕심 없이 사랑하면 더 순수하게 하느님을 알고, 원수까지 사랑하면 더 깊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감성에 젖어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알려주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심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권위 아래서>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한 1,14).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하고 편협한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가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 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죽음마저 극복하는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통교 안에 초대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셨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듯 우리도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아는 방법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만큼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주님을 아는 사람이 되어 그분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이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요한 5,24)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26)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31)
이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복음 선포의 목적이고, 신앙생활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시간 낭비가 될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9)
여기서 ‘불쌍한’이라는 말을 ‘어리석은’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들 가운데에서 가장 크고 영원한 은총은 ‘영원한 생명’인데, 그것을 희망하지 않고(청하지 않고) 허무하게 지나가버릴 현세의 복만 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복만 비는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는데, 기복신앙은 사실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당신은 마귀 들렸다.’(미쳤다.) 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다고 반박합니다(요한 8,52).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죽지 않고 엘리사 예언자가 보는 앞에서 승천했습니다(2열왕 2,11-12).
창세기에는 ‘에녹’이라는 사람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창세 5,24).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모세도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마르타의 경우에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요한 11,24).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마르타처럼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비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나를 믿으면 죽음 자체를 면제 받는다.”로 오해하고서 “마지막 날에는 부활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라고 반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해서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두 번째 죽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묵시 20,14).
‘두 번째 죽음’은 최후의 심판 때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 당하게 되는 ‘멸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뜻이 같고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죽지 않고 곧바로 승천한 사람 외에는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라는 말이 진실일까?
바오로 사도는 살아 있는 동안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채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합니다(1테살 4,15-17).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첫 번째 죽음’을 면제받게 됩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요한 8,5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요한 8,58)
이 말씀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인데,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세심한 해석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는 “아브라함은 메시아 시대를 희망하면서 즐거워하였다.”이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메시아 시대가 틀림없이 온다고 믿고 기뻐하였다.”입니다.
이 내용은 구약성경에는 없고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메시아는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 내가 바로 그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나는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다.”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한처음’은 창조 이전의 영원한 시간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하신 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닙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가?
왜 부활절을 기다리고 있는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인생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인생의 마지막 시점이 되었을 때, 안 믿는 사람들처럼 허무하다는 말만 하면서 지나간 날들을 후회만 할 것인가?
영원을 향해서 기쁘게 나아갈 것인가?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누구인가? -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늘 봄'같은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의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적대적인 유다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후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의 삶이 그대로 그 좋은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 못한 유다인들에 대해 예수님은 거듭 아버지와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밝히십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시공을 초월하여 아버지와 깊은 친교는 물론 아브라함과의 관계도 언급하십니다.
새삼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할 일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 내다 본 기쁨과 희망이 예수님에게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친밀한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늘 하느님과 기도의 소통중에 살았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나이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로 오늘 독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시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는 일’ 역시 우리의 일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며 계약을 맺으십니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은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아브라함과 계약을 통한 약속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실현되었음을 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예수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닿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유다인들과의 문답에서 예수님의 신원이 다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영어로 하면 예수님이 신원을 단박 알아챌 수 있습니다.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하느님과 같은 신적 존재 하느님의 이름 “나는 있다(I AM)”를 지닌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성자 예수님께서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심을 드러내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先在)가 시사된 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시간의 지배 속에 두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 곧 영원한 현재 속에 두고 표현합니다.
현재에서 영원을 사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맨처음부터 지금까지 꿰뚫어 바라보고 계신 ‘영원한 현재’의 하느님 같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 하며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였고 예수님은 성전 밖으로 피신합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신적 신원이 부활 후에야 이뤄진 일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당시 요한 교회 공동체의 믿음을, 즉 하느님과 같은 신적 존재인 파스카 예수님의 신원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유다 회당으로부터 쫓겨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따르는 파스카의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전에 선재했던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 이름, “나는 있다(I AM)” 같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주님의 말씀도 이를 분명히 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And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l the end of the age).”
(마태28,20ㄴ)
늘 하느님의 현존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시겠다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런 파스카 예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느님과의 한없는 깊이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한없는 깊이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우리는 파스카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취하게 됩니다.
며칠 전 주문했던 새책을 받고 참 행복했습니다.
새책을 받을 때마다 느끼는 행복감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이렇게 설레는 기쁨으로 새날을 선물받는 행복한 느낌이라면, 심지어 죽음의 날도 새날을 선물받는 행복한 느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묵상을 했습니다.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늘 함께 일치의 삶을 살 때 가능한 일이겠습니다.
저는 요즘 이런 분들을 만났습니다.
나이에 관계 없이 영원한 젊음을, 영원한 현재를 사는 분들입니다.
바로 86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런 분이고, 83세 고령에도 왕성한 활동에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는 책을 출간하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트커 볼프 아빠스님이 그런 분이고, 또 78세 고령에 수술 후의 불편한 몸에도 왕성한 활동에 <꽃 잎 한 장처럼> 신간을 출간한 이해인 수녀님이 그런 분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부단히 분발케 하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책 서두 한 장에 씌어 있던 문구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오늘을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살아가는 간절한 마음이 갈수록 더 필요하다.”
유명한 나태주 풀꽃 시인의 추천의 글도 좋았습니다.
더불어 얼마전 읽은 나태주 시인의 '그저 봄'이란 짧은 시도 생각납니다.
“만지지 마세요.
바라보기만 하세요.
그저 봄입니다.”
봄꽃들 만개한 파스카의 봄입니다.
계절의 “봄”이요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봄”입니다.
봄의 봄입니다.
고 문익환 선생의 호는 '늦봄'이었는데 예수님의 호는 '늘봄'으로 정해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파스카의 봄을 봄으로 하루하루 “늘봄”의 행복한 새날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영원"이란 말씀이 자주 등장합니다.
영원성은 하느님과 인간 존재의 상이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속성 중 하나입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로 조급해진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듯 정면으로 직구를 던지신 겁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즉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존재는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유다인들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감히' 겁도 없이 당신 말을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단언하신 것이지요.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한 카테고리로 묶든지, 아니면 더 볼 것 없이 마귀들린 자로 분류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믿어야 하는가, 단죄해야 하는가, 즉 하느님, 아니면 마귀입니다.
독서에서 하느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보아라."(창세 17,4) 하시지요.
이 말씀 안에는 온기가 흐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겁니다.
두려워 벌벌떨며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관계에서는 억압과 굴종을 주고받을 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기대하기 어려우니까요.
하느님께서 먼저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7.8)고 하시며 땅과 자손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신 그에게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창세 17,9)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지켜야할 계약의 내용은 뒤로 이어질 것입니다.
하느님도 예수님도 "지키다"는 말씀을 줄곧 하십니다.
사실 이 단어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집을 지키고 국경을 지키는 것처럼 '수호하다'는 의미도 될 수 있고, 약속이나 계명을 '준수하다, 실천하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고 존중하다'는 의미도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을 지키라는 말씀과 더불어, 당신 역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요한 8,55)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개를 들어 당신을 보아도 좋다고 하시고, 이름도 주시고, 땅과 후손을 약속해 주시고, 친히 하느님이 되어주시겠다고 먼저 호의를 드러내신 후 "지키라"고 말씀하셨지요.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계명,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온기 없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위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실 때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진실로 그렇게 하십니다.
또 우리에게 당신 말씀을 지키라 하시는 것도 사랑과 진실의 토대 위에서 그리 하라고,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리 하게 되어 있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전체 질서를 존중하고 자기와 타인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다분히 강제성을 띠고 있는 법을 지키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 계명, 뜻을 지키라고 우리를 이끄는 힘은 강제성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분 말씀의 귀하고 소중한 가치를 알기에 미천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고 열매로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지키라" 하셨듯이,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언급하시며 유다인들에게 "지키라" 하시지만,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대선조인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에 그만 걸려넘어지고 맙니다.
맥락을 놓쳐버린 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 한 것은 예수님의 영원성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반증합니다.
이 영원성을 인정함은 곧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아무리 진리를 말씀하셔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겁니다.
이 모든 여정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실 파스카의 절정을 향해 촘촘하게 엮어지는 중입니다.
적대적으로 어둠을 향해 치달아가는 이 대목에서 비록 상황은 악화되어 가지만 우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마음 안에 유다인들을 향한 따뜻한 온기, 진실된 사랑이 가시지 않기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갑갑하고 속 터지는 울분에 질식되지 않고 담담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원하시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억지로, 강제적으로 지키려 해서는 제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예수님 사랑 때문에 즐거운 마음, 기꺼운 마음으로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는 복락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고, 지금은 현재입니다.
저도 직선의 시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무실에는 탁상용 달력이 있습니다.
달력에는 지나간 일정이 적혀 있습니다.
지나간 일정을 보면서 제가 만났던 사람, 제가 했던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달력에는 앞으로의 일정도 적혀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해야 할 일을 준비합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도 하고, 서류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직선의 시간 속에서 ‘생, 노, 병, 사’의 과정을 경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도 직선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들판에 있는 묘지는 직선의 시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시간을 순환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직선으로 자라는 나무에는 원으로 자라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이테가 있기에 나무는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계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매년 우리를 찾아옵니다.
일출과 일몰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낮과 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도로와 순환지하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흘러가는 직선이 아닙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돌아오는 곡선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순환하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림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사순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그 땅과 후손은 직선적인 시간에서의 땅과 후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과 후손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후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계절이 매년 바뀌면서 우리에게 오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직선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집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순간도 영원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꿈꾸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순대국밥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메뉴판을 보는데 순대국에도 종류가 있더군요.
순대국 7,000원, 순대국(특) 8,000원, 순대국(스페셜) 12,000원.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메뉴에도 마케팅 효과가 적용된다고 합니다.
스페셜 순대국은 원래 먹으려는 순대국보다 5,000원이나 비싸고, 순대국(특)은 1,000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조금 특별한데 5,000원이 아닌 1,000원의 차이니 대부분 일반 순대국이 아닌, 순대국(특)을 주문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미끼 효과’라고 하더군요.
순대국(스페셜)을 넣음으로 인해 순대국(특)의 판매를 늘렸던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스스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논리적이지도 또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순간의 감정에 더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마케팅에 적용하는 예는 너무나도 많다고 하더군요.
똑똑하다고 여기고 잘난 척을 많이 해도 이런 심리 전략에 너무 쉽게 넘어가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요?
이러한 부족함에서도 계속해서 남을 향한 판단과 단죄를 멈추지 않는 교만으로 가득한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명하신 것 같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물들어 있는 죄를 없애는 해독제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오히려 마귀 들렸다면서 빈정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그들과 영원한 구원을 위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는 대화가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일들에서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이 보임에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앙이 자기들이 정의한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돌을 집어 듭니다.
구원으로 이끌어줄 하느님께 오히려 돌을 집어 든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신성모독이 되고 맙니다.
부족한 존재인 인간이면서도, 다른 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기 입장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입니다.
그 순간에는 정의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불의일 때가 더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잘못된 판단과 단죄가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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