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 1. 墓 碑 銘
한 줄의 詩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의 시집이 197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내가 이십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1980년 초여름 나는 말년 휴가를 나와서 피앙세를 찾아 마산을 갔다가 거기 어떤 서점에서 샀던 것 같다. 서점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경북대학교를 다니던 나의 피앙세는 노정숙이었다. 그녀는 마산 장군동에 살았으니까, 아마 거기 어디쯤일 것이다. 다행히 “1980년 6월 27일 마산에서 '흑과 백'이라는 서점 이름도 적혀 있어서 당시 정황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1980년 6월 나는 군인으로 휴가를 나오자마자, 피앙세를 찾아 마산엘 갔을 것이다. 당시는 “모텔”이라는 단어가 유행하지 않던 시절이라, 어떤 여관에서 스물 두 살의 노정숙과 질펀한 섹스를 하고, 저녁때 쯤 서점에 들러 이 시집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당일 늦은 밤에 대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 흔적을 오늘 발견했다. 광주 폭동이 진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세상은 뒤숭숭하였다. 터미널 대합실에서 반란의 수괴 전두환의 근엄하고 엄숙한 경고 발언을 듣고, 노정숙과 작별하고 버스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데모하다가 잡혀서 군대를 간 처지이기 때문에, 이른바 녹화사업 대상자였다. 그러므로 군인 신분으로 뭘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독재타도”를 외치고 잡혀서 남한산성(육군형무소)에 갔었더라면 .....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이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여튼 그 시절 반란군 수괴가 버젓이 TV에 나와 국민을 상대로 협박하는 모습을 애써 외면 한 채, 집으로 왔다.
당시 마흔 살 쯤 되었던 김광규씨는 “.....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라는 자유주의자의 어중간한 욕구불만을 쏱아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김광규씨가 못마땅했다. 당시 다소 과격한 운동권이었던 나는 "실천하지 않는 양십은 양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대구행 버스 안에서 나는 새로 산 시집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면서 나는 저렇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었다. .....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 김광규도, 나도 혁명에 동참하지 못했다. 나는 한국이 싫어서 유럽으로 도피 유학을 떠났고, 김광규는 꿋꿋이 살아남아, 한양대 선생을 계속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도 대학의 선생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나는 노정숙에게 전화를 했다. 나랑 연애할 당시 그녀는 왜관에 있던 분도 수도원의 에릭 헤르베르트 신부의 권유로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운동을 하고 있었다. 과격하지 않은 소박한 ‘운동권 학생’이었던 그녀도 2003년 무렵에는 혁명과는 상관없이 살아남아, 대구의 어느 중학교 생물선생이 되어 있었다. 1983년 무렵에 불확실하지만 성대 출신의 공돌이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도 나이가 들고, 늙어 보니, 김광규의 삶이 이해가 된다. 35년 전 이맘 때 산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이 지금 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