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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조선인(朝鮮人)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유구국(琉球國)과 일본(日本)에 다녀온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1479년) 6월 10일 1번째 기사를 검토하겠습니다.
먼저, 그들의 여정(旅程)을 간단히 요약하면....
조선(朝鮮)의 제주(濟州) 사람인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추자도(楸子島)를 향해 가다가 표류하여, 작은 섬인 윤이시마(閏伊是麿)에 도착하였고, 여기서부터 계속 남풍(南風)을 타고 소내시마(所乃是麿), 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 포라이시마(捕剌伊是麿), 훌윤시마(欻尹是麿), 타라마시마(他羅馬是麿), 이라부시마(伊羅夫是麿), 멱고시마(覓高是麿) 섬으로 이동합니다. 드디어 유구국(琉球國)에 도착한 후에는 일본의 살마주(薩摩州), 타가서포(打家西浦), 패가대(覇家臺), 식가(軾駕)를 거쳐서 일기도(一岐島), 대마도(對馬島)의 초나포(草那浦), 사포(沙浦), 도이사지포(都伊沙只浦)를 통과한 후에 최종적으로 조선의 염포(鹽浦)에 도착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시마’(是麿)는 ‘섬’이라는 뜻의 일본어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최두환 칼럼>이 있어서 아래에 소개합니다.
2007년 12월 30일 <최두환 칼럼> “추자도에 귀양이면 한반도 남쪽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부 인용)
(前略)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보자. 1477년 2월 1일부터 제주에서 추자도로 가다가 1년 2달이 걸려 돌아오기까지를 보면, 처음에 동풍을 만났고, 서쪽바다로 떠내려가서 표류한 과정이다. 그 뒤로 옮겨갔던 곳이 윤이시마(閏伊是磨)→소내시마(所乃是磨)→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磨)→포라이시마(捕剌伊是磨)→훌윤시마( 尹是磨)→타라마시마(他羅馬是磨)→멱고시마(覓高是磨)→류구국(琉球國)→살마주(薩摩州)→타가서포(打家西浦)→패가대(覇家臺)→일기도(一岐島)→대마도(對馬島) 초나포(草那浦)→사포(沙浦)→도이사지포(都伊沙只浦)→염포(鹽浦)→울산군수를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
먼저 추자도에서 동풍을 만났고, 서쪽바다로 떠내려갔다면, 그곳은 아무리 지리적으로 변화를 겪는다할지라도 서쪽엔 강소성 앞바다일 뿐이다. 그러다가 북풍을 만나게 되면 그 남쪽의 절강성 지역에 닿게 되어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으며, 섬 이름들이 모두 "…시마(是磨)"라고 하여 "섬"의 일본식 이름이다. 그리고는 류구국(琉球國)을 거쳐오는 것을 보면, 그 처음에 출발했던 제주나,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된 추자도는 결코 한반도 남쪽의 상황으로 설명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대마도에서 북쪽으로 가면 부산 근처여야 하는데 난데없이 염포라는 울산지역인 것은 뱃길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 염포니 울산이라는 말도 한반도의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윤이시마(閏伊是磨)·소내시마(所乃是磨)·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磨)·포라이시마(捕剌伊是磨)·훌윤시마( 尹是磨)·타라마시마(他羅馬是磨)·멱고시마(覓高是磨)의 하나의 거의 공통적 특징은 종려나무가 있고, 강남인·남만인의 왕래하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제주·추자도라는 곳은 일단 양자강 남쪽 지역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류구국이 옛날에 지금의 대만(臺灣)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보면, 이 표류인들이 북쪽으로 올라가서 대인 곳이니, 그 제주·추자도는 북위 25도 성상에 있는 대만 남쪽 지역에 있어야 마땅하다.
(後略)
제가 다시 검토한 결과에 의하면,
위 <최두환 칼럼>에서 잘못된 부분은 북풍(北風)이 아니고 서풍(西風)이라는 것입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처음에는 동풍(東風)을 만나 서쪽으로 표류하였지만,
제9일째에는 서풍(西風)을 만나서 남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겨우 제14일째에 첫 번째 섬인 윤이시마(閏伊是麿)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위 인용 글에서 대마도(對馬島)에서 북쪽으로 가면 부산(釜山) 근처이어야 하는데,
염포(鹽浦)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염포(鹽浦)는 태종 18년(1418년)에 일본에 개항하였고 왜관(倭館)도 설치되었기 때문에,
성종 8년(1477년) 당시에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대마도에서 염포로 가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위 인용 글에서는 제주(濟州)와 추자도(楸子島)를 지금의 대만(臺灣) 남쪽 지역으로, 유구국((琉球國)을 지금의 대만(臺灣; 타이완)으로 비정하였는데....
8개의 섬 즉 윤이시마(閏伊是麿), 소내시마(所乃是麿), 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 포라이시마(捕剌伊是麿), 훌윤시마(欻尹是麿), 타라마시마(他羅馬是麿), 이라부시마(伊羅夫是麿), 멱고시마(覓高是麿)에 관해서는 위치 비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 섬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시마’(是麿)라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 섬들이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제주(濟州)와 추자도(楸子島)를 절강성(浙江省)이나 복건성(福建省) 근처로 비정할 수는 없고 광동성(廣東省) 근처라고 가정한다면,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처음에는 동풍(東風)을 만나 서쪽으로 표류하였으므로
대륙(大陸) 동남부(東南部) 연안(沿岸) 쪽으로 향하였을 것이고,
(육지에는 상륙하지 못한 채 바다 위에서)
제9일째에는 서풍(西風)을 만나서 남쪽으로 표류하였으므로 대륙 연안에서 더 멀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표류하였을까요?
남쪽으로 더 표류하면 무슨 섬이 나올까요?
처음으로 도착한 섬인 ‘윤이시마’(閏伊是麿)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나머지 7개의 섬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대륙 연안 부근에 <성종실록>에 기록된 특징과 부합되는 섬들이 있었을까요?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곧바로 저에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섬들의 크기와 항해 시간 등을 고려하여 판단하면......
지금의 오키나와(沖繩) 부근에는 현재 ‘남서제도’(南西諸島; なんせいしょとう)라고 불리우는 작은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줄지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이곳이라면 위 8개의 섬들을 대략 비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 8개의 섬들은 이른바 흑조(黑潮; 일본어로는 ‘쿠로시오’)라는 해류를 타고 남풍(南風)을 만나서 항해하면 차례로 도달할 수 있는 섬들입니다.
대만(臺灣)을 과거에 한때 소유구(小琉球)라고 불렀지만, 지금의 오키나와(沖繩) 본도(本島)를 대유구(大琉球)라고 하였기 때문에 ‘유구국’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윤이시마(閏伊是麿)를 지금의 <与那國島/よなぐにじま>로, 소내시마(所乃是麿)를 <西表島/いりおもてじま>로, 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를 (‘포타루로마’시마로 읽으며) <波照間島/はてるまじま>로, 포라이시마(捕剌伊是麿)를 <新城島/あらぐすくじま>로, 훌윤시마(欻尹是麿)를 <黑島/くろしま>로, 타라마시마(他羅馬是麿)를 <多良間島/たらまじま>로, 이라부시마(伊羅夫是麿)를 <伊良部島/いらぶじま>로, 멱고시마(覓高是麿)를 <宮古島/みやこじま>로, 유구국(琉球國)을 <오키나와(沖繩) 본도(本島)>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출처=http://www.kuroshioeki.jp/top/modules/wordpress/index.php?cat=2]
[출처=위키백과, “오키나와 주변 섬들”]
[출처=위키백과, “南西諸島”]
참고로, 대만(臺灣)에 관하여 더 살펴보면......
16세기 중엽 포르투갈 선박이 동아시아를 항해하는 중에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인 포르모사(Formosa) 즉 지금의 대만을 유럽국가로는 최초로 발견하였습니다.
그 발견시기에 관해 여러 견해(1517년, 1541년 전후, 1542년, 1544년, 1557년)가 있지만, 1554년 작성된 지도에 ‘포르모사’가 기재된 것으로 보아 1554년 이전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대만을 발견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원주민에게 아편(阿片)을 중개하는 정도의 소규모 무역에 만족하였고 식민지 지배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 대만(타이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유럽국가는 네덜란드였는데.....
1622년 네덜란드는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팽호제도(澎湖諸島; 대만해협의 섬들)를 점령하여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고, 1624년 네덜란드는 중국과 8개월 동안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화의(和議)하고 네덜란드는 대만 남부 지역으로 거점을 옮겼다고 합니다.
1626년 필리핀 루손 섬에 거점을 마련한 스페인도 대만에 진출하여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성을 쌓았고, 이것은 네덜란드가 일본으로 진출하려는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1642년 네덜란드는 군대를 파견하여 스페인 세력을 공격해 대만에서 몰아냈습니다.
이로써 1624년부터 1662년까지 네덜란드가 대만을 식민지로 통치하게 되었는데, (총 13대의 행정장관이 취임했음) 식민통치 기간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省) 연안에서 대량의 이주민(移住民)을 모집하여 토지개발의 노동력으로서 대만에 투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23년~1638년 인조 때부터 1906년 고종 때까지도 줄곧 유구국(琉球國)이 등장하는데, 인조 때에는 대만(臺灣)이 네덜란드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던 지역이었으므로 유구국을 대만으로 비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에 큰 변화 없이 줄곧 유구국이 등장합니다.)
위치를 다시 검토하시려는 분들은 아래의 “세계 해류도”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출처=위키백과, “세계 해류도”(2004년, 일부 인용)]
[출처=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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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05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6월 10일(을미) 1번째기사
제주도 표류인 김비의 등으로부터 유구국 풍속과 일본국 사정을 듣다
제주(濟州)에 표류(漂流)했던 사람 김비의(金非衣)·강무(姜茂)·이정(李正) 등 세 사람이 유구국(琉球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지나온 바 여러 섬의 풍속(風俗)을 말하는 것이 매우 기이(奇異)하므로, 임금이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그 말을 써서 아뢰라고 하였다. 그 말에 이르기를,
“우리들이 정유년(성종 8년, 1477년) 2월 1일에 현세수(玄世修)·김득산(金得山)·이청민(李淸敏)·양성돌(梁成突)·조귀봉(曹貴奉)과 더불어 진상(進上)할 감자(柑子)를 배수(陪受)하여 같이 한 배에 타고 바다로 출범(出帆)하여 추자도(楸子島)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크게 불어오는 동풍(東風)을 만나 서쪽으로 향하여 표류하였습니다. 처음 출발한 날로부터 제 6일에 이르러서는 바닷물이 맑고 푸르다가, 제 7일부터 제 8일까지 1주야(晝夜)를 가니 혼탁(渾濁)하기가 뜨물과 같았으며, 제 9일에 또 서풍(西風)을 만나서 남쪽을 향하여 표류해 가니 바닷물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제 14일 째에 한 작은 섬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미처 기슭에 대이지 못하여 키가 부러지고 배가 파손되어 남은 사람은 모두 다 물에 빠져 죽고, 여러가지 장비도 모두 물에 빠져 잃어버렸으며, 우리들 세 사람은 한 판자에 타고 앉아 있었습니다. 표탕(漂蕩)하는 사이에 마침 고기잡이배 두 척이 있어서 각각 네 사람이 타고 앉아 있다가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거두어 싣고 가서 섬 기슭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윤이시마(閏伊是麿)라고【그곳 풍속에 섬을 일컬어 시마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인가(人家)가 섬을 둘러 살고 있고, 둘레는 이틀 길이 될 듯하며, 섬사람은 남녀 1백여 명으로 풀을 베어 바닷가에 여막을 만들어서 우리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中略)
무릇 6삭(朔)을 머물고, 7월 그믐에 이르러 남풍(南風)이 불어 오는 것을 기다려서 섬사람 13명이 우리들과 같이 양식과 탁주(濁酒)를 준비해 가지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서 1주야(晝夜) 반을 가니,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소내시마(所乃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자(護送者)들은 8,9일 동안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내시마는 좁으면서 길었는데, 둘레는 4, 5일정(日程)이 될 만하였고, 그 언어(言語)·음식(飮食)·의복(衣服)·거실(居室)·풍토(風土)는 대개 윤이시마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中略)
우리들은 무릇 5삭(朔)을 머물다가, 12월 그믐에 이르러서 남풍(南風)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과 같이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갔더니, 한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었는데 모두 다 모래와 돌로 된 땅이었고, 둘레는 소내도(所乃島)에 비교하여 조금 작았습니다. 그 언어와 의복·거실·풍토는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中略)
우리들은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포라이시마(捕剌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2일정이 될 만 하였습니다. 인가(人家)는 겨우 40호 남짓하고, 언어·의복·음식·거실·토풍(土風)이 대개 윤이도와 같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中略)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에 올라서 하루 낮 동안을 가니, 한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섬의 이름은 훌윤시마(欻尹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였으며, 그 언어·음식·의복은 또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中略)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8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배를 타고 1주야(晝夜)반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타라마시마(他羅馬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며, 사람은 50여 호가 살고 있었고,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이 대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中略)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이라부시마(伊羅夫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둘레는 2일정이 될 만하고,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그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고,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中略)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멱고시마(覓高是麿)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고, 둘레는 5, 6일정이었으며,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고,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中略)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1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 2주야 반을 가서 유구국(琉球國)에 이르게 되었는데, 바닷물의 기세가 용솟음치고, 파도(波濤)가 험악(險惡)하여, 섬사람도 모두 배멀미를 했습니다.
(中略)
우리들은 무릇 석 달을 머물다가 통사에게 말하여 본국(本國)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통사가 국왕에게 전달하자, 국왕이 대답하기를, ‘일본 사람은 성질이 나빠서 〈너희들이〉 보전할 수가 없으므로, 너희들을 강남(江南)으로 보내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보다 앞서 통사에게 물어서 일본은 가깝고 강남은 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본국(日本國)으로 갈 것을 청하였습니다.
(中略)
8월 1일에 (일본 상인) 신이사랑 등 1백여 인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큰 배를 같이 타고서 4주야(晝夜)를 가다가 일본의 살마주(薩摩州)에 이르렀으나, 기슭을 오르는 데에 파도가 매우 사나워서 겨우 바다를 건넜는데, 형세가 제주(濟州)와 같았습니다.
(中略)
한 달을 머물다가 9월에 이르러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서 신이사랑 등이 별선(別船)을 사가지고 우리들을 데리고서 같이 타고 연안(沿岸)으로 해서 무릇 3주야 만에 타가서포(打家西浦)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말을 타고서 우리를 데리고 육로(陸路)로 왔습니다. 김비의가 병들었다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기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말을 구하여 타게 하고 남은 두 사람은 도보(徒步)로 2일을 갔는데, 산골짜기가 매우 험했습니다. 패가대(覇家臺)에 이르니, 부관인(副官人) 좌미시(左未時) 등이 비용[盤纏]을 마련해서 해로(海路)를 경유하여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인가(人家)가 조밀(稠密)한 것이 우리 나라의 도성(都城)과 같았고, 그 가운데 저자가 있는 것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中略)
여섯 달을 머물다가 병란이 평정(平定)되기를 기다려, 금년 2월에 이르러 우리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 15리쯤 가서 작은 섬에 이르니, 이름을 식가(軾駕)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머물면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초저녁 어두울 무렵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기슭에 오르니, 인가가 매우 많았습니다.
(中略)
사흘을 머물고 또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 대마도(對馬島)의 초나포(草那浦)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中略)
도주(島主)가 떠나기 어렵다고 만류하기도 하였고 바람도 순조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 달을 머물러 있다가 4월 어느 날에 동풍을 만나 연안을 따라 가서 사포(沙浦)에 이르러 투숙(投宿)하였습니다.
여기서 이틀을 머물고 바람이 순조로우므로 또 기슭을 따라 가서 도이사지포(都伊沙只浦)에 정박하였으며, 사흘을 머물다가 동풍을 만나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야 염포(鹽浦)에 이르러 머물었습니다.
울산 군수(蔚山郡守)는 우리들이 감투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각각 갓[笠子]과 베 1필씩을 주었으므로, 우리들은 옷을 만들어 입고 올라왔습니다.
이상 윤이도(閏伊島) 이하 여러 물산(物産)을 우리들이 본 것은 이 정도 입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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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포 [鹽浦] 울산만(蔚山灣)에 개설한 조선시대의 개항장(開港場).
부산포(富山浦:釜山鎭) ·내이포(乃而浦:鎭海市 熊川洞)와 더불어 3포(浦)를 이루어 일본에 개방한 국제무역항이었다. 1418년(태종 18)에 개설되어 왜관(倭館)을 두어 도박왜인(到泊倭人)을 머물게 하고, 염포에 상륙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왜인은 언양(彦陽) ·경주 ·안동 등을 거쳐 가도록 정하여 염포는 좌로(左路)의 시발지가 되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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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도(臥蛇島; がじゃじま; 가쟈지마)는 현재 일본 카고시마(鹿児島) 현(県)의 토카라(トカラ) 열도(列島)<오키나와=琉球??와 카고시마=薩摩?? 사이의 섬들>에 속한 무인도(無人島)입니다. 1970년에 주민 전체가 이주하여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위키백과, http://ja.wikipedia.org/wiki/%E8%87%A5%E8%9B%87%E5%B3%B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