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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吉も家康も大ウソつきだった!情報戦に長けた天下人の驚くべきハッタリ戦略とは?/ 1/13(火) / WEB歴史街道
真山知幸氏は、書籍『戦国最高のNo.2 豊臣秀長の人生と絆』にて、豊臣秀長の兄・秀吉と徳川家康のしたたかさを紹介する
2026年の大河ドラマ『豊臣兄弟!』は、豊臣秀吉とその弟・秀長の物語だ。大言壮語の兄・秀吉は、ハッタリを駆使しながら出世街道をかけ上っていく。そしてもう一人、平気でウソを並べ、情勢をコントロールしていく戦略上手が「狸親父」と呼ばれる徳川家康。彼らがついた驚くべきウソとはーー。親しみやすい文体で定評のある伝記作家が解説する。
※ 本稿は、真山知幸著『戦国最高のNo.2 豊臣秀長の人生と絆』(日本能率協会マネジメントセンター)より一部抜粋・編集したものです。
信長は「本能寺の変」の襲撃を切り抜けた?
柴田勝家のことなど眼中にない─。
秀吉にはそれくらいの勢いがあったらしい。勝家との賤ヶ岳の戦いが始まって間もない天正11(1583)年4月12日、小早川隆景宛てに、こんな手紙を出している。
「播州より西のことは知らないが、東においては、津軽・合浦・外浜までも、われらの槍先に堪えられる者はいそうもない」
あたかも関東の果てまで勢力を伸ばしているかのように書いている秀吉。この時点で、すでに全国制覇をにらんでいたことがわかる。
秀吉の戦略的な嘘は本能寺の変直後にも発揮された。信長が討たれてから3日後、秀吉は、摂津茨木城主の中川清秀に事態の顛末を聞かれて、次のような手紙を書いた。
「これからお伝えしようと思っていた時、そちらからご教示に預かり、満足に思っている。さて、ただ今京より下ってきた者が確かに言った。上様ならびに殿様、いずれもなんのお障りもなく明智光秀による襲撃から切り抜けなされた」
上様とは織田信長、殿様とはその息子で織田家の当主となっていた織田信忠のことだ。「何のお障りもなく」どころか、殺され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手紙にはおくびにも出していない。秀吉は平然とこんな嘘をつきながら、翌日から中国大返しを行うことになる。
嘘と言えば聞こえが悪いが、情報戦にほかならない。そして大言壮語を吐くのは、兄の得意分野だと弟の豊臣秀長はよく知っている。
「自分にはできないことをやってのけるのが兄者だ」
そんな思いがあったからこそ、振り回されても兄についていくことができたのだろう。
だが、そんな兄と同じく戦略家で、腹の読めない敵が、兄弟の前に立ちはだかることとなった。「狸親父」とまで呼ばれた徳川家康である。
「屋形としてあがめて慕う」と言いつつも...
戦国の世において、秀吉が家康を相手にたった一度だけ正面衝突した戦い、それが天正12(1584)年の小牧・長久手の戦いだ。秀吉からすれば、あとは家康さえ叩いてしまえば、という思いが強かったことだろう。
なにしろ、賤ヶ岳の戦いでは勝家だけではなく、信長の三男である織田信孝も死に追いやっていた。勝家に荷担していた滝川一益も降伏し、もはや向かうところ敵なしである。
そうなると残るは、織田信長の次男にあたる信雄、そして信長の同盟相手だった家康をどう排除するか。それが、秀吉にとって目下の課題だった。
「屋形としてあがめて慕う」
「屋形」とは当主のことで、秀吉が信雄について言ったとされる言葉である。
信雄は尾張・伊勢・伊賀の三国を領有。信忠の遺児・三法師の後見役にもなり、実質的に織田家の家督を継いでいた。
だが、秀吉の勢いが増すにつれて、信雄はないがしろにされていく。秀吉は摂津の池田恒興・元助父子を美濃に移し、自身は大坂城の築城にも着手。信長の安土城を上回る規模の城を築き始め、天下人として振る舞い始める。
われこそが信長の後継者と言わんばかりに、諸大名に書状を出す秀吉に対して、信雄は面白くなかったらしく、家康へと接近していく。
そして、天正12(1584)年3月6日、信雄は家臣のなかでも、秀吉と内通していると思われる岡田重孝、浅井長時、津川義冬の三家老を誅殺。それに呼応して、家康は翌7日に浜松城を発ち、8日に岡崎城を出た。13日には清州城で信雄と協議すると、尾張の小牧山城に本陣を敷いている。
信雄の反抗に秀吉は「もってのほか腹立て」と『兼見卿記』には記されている。怒れる兄を見て、その性格を誰よりも知る秀長は、家康との戦になると確信したことだろう。
ところで秀長は、この家康と激突した小牧・長久手の戦いの最中に、これまで使ってきた実名の「長秀」から「秀長」へと名前を変更。以後は死ぬまで秀長と名乗り続けた。
秀長はこの家康との戦いこそが、豊臣家の行方を決定づけると考えて、最後の改名を行ったのかもしれない。
大将を勝手に討ち取ったことにした家康
家康は小牧山城に、秀吉は尾張の犬山城に、それぞれの本陣を敷いて戦は膠着状態が続いていたが、秀吉方についた池田恒興や森長可らが動く。手薄となった岡崎城を攻めて、家康勢を小牧山城から、おびき出そうとしたのだ。
だが、家康はこの作戦を察知する。「それなら兵をさしむけよう」(『三河物語』)と、4500の兵を先発させ、自らも織田信雄と9000の兵を率いて追撃。見事に秀吉方を討ち破っている。
家康はすぐさま家臣の平岩親吉と鳥居元忠に、こんな書状を送っている。
「今日9日の午の刻に、岩崎において合戦し、池田紀伊守(恒興)、森長可、堀秀政、長谷川秀一ら敵の大将を始めに1万人を討ち取った」
さらに「このまま上洛する」とまで書いているのだから、意気揚々とはまさにこのことだろう。しかし、この手紙の内容は、やや事実とは異なる。
敵将の池田恒興・元助の親子、そして、森長可らを討ち取ったのはその通りだが、堀秀政や長谷川秀一らは無事である。
翌日の10日には、丹波氷上郡の土豪である赤井(蘆田)時直にも書状を出して、やはり戦果を書き綴っている。
「昨日9日に合戦に及んだところ、池田勝入(しょうにゅう、恒興)ら父子3人を始めに、森長可、堀秀政、長谷川秀一、三好孫七郎、そのほか、大将を10人あまりのほか、1万人ほど討ち取った」
またも討ち取られていない堀秀政、長谷川秀一の名が連ねられているうえに、今度は三好孫七郎の名まで加わっている。三好孫七郎は三好信吉の通称であり、のちの豊臣秀次である。秀吉の甥で、家康に撃破された別動隊では大将を務めた。壊滅的な大敗を喫しながらも、命からがら逃亡しており、討ち取られてはいない。
戦から1日経って情報が正確になるどころか、より大げさになっている家康の書状。これもまた、彼の戦勝ムードを高める方法の一つなのだろう。
秀吉に負けないほど「ハッタリ力」を発揮した家康だったが、のちに秀長は家康を奈良見物に案内するなど、仲を深めていく。兄の秀吉と同様に、自分と全く違うタイプだけに、意外と相性は良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
真山知幸(伝記作家、偉人研究家)
https://news.yahoo.co.jp/articles/43ed6e3f577e7fc89fe8f90c58275af81a2ee7ce?page=1
히데요시(秀吉)도 이에야스(家康)도 큰 거짓말쟁이였다! 정보전에 능한 천하인의 놀라운 허세 전략이란? / 1/13(화) / WEB 역사 가도
마야마 토모유키 씨는 서적 『전국 최고의 No.2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인생과 유대』에서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형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귀함을 소개한다
2026년 대하드라마 도요토미 형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히데나가의 이야기다. 호언장담하는 형 히데요시는 허둥지둥하면서 출세가도를 걸어 올라간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정세를 컨트롤해 나가는 전략 능숙자가 '너구리 아버지'라고 불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들이 붙은 놀라운 거짓말이란――. 친근한 문체로 정평이 난 전기작가가 해설한다.
※ 본고는, 마야마 토모유키 저 『전국 최고의 No.2 토요토미 히데나가의 인생과 유대』(일본능률협회매니지먼트센터)에서 일부 발췌·편집한 것입니다.
◇ 노부나가(信長)는 「혼노지의 변」의 습격을 극복했다?
시바타 카츠이에의 일 따위는 안중에 없다 ―― .
히데요시에게는 그 정도의 기세가 있었던 것 같다. 카츠이에와의 치가타케 전투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덴쇼 11(1583)년 4월 12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앞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다.
"반슈(播州)보다 서쪽은 몰라도 동쪽에서는 쓰가루·아이우라·소토하마까지도 우리의 창끝을 견딜 자는 없을 것 같다."
마치 관동의 끝까지 세력을 뻗고 있는 것처럼 쓰고 있는 히데요시. 이 시점에서, 이미 전국 제패를 노려보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히데요시의 전략적인 거짓말은 혼노지의 변 직후에도 발휘되었다. 노부나가가 패한 지 3일 만에 히데요시는 셋쓰 이바라키 성주 나카가와 기요히데에게 사태의 전말을 듣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지금부터 전해 드리려고 했을 때, 그쪽에서 교시를 받아서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방금 쿄(京)에서 내려온 자가 분명히 말했다. 주군 및 도련님, 모두 아무런 지장 없이 아케치 미츠히데의 습격에서 벗어나셨다."
주군은 오다 노부나가, 도련은 그 아들로 오다 가문의 당주였던 오다 노부타다를 말한다. 아무 탈 없이는커녕 살해당했는데도 편지에는 숨기고 있다. 히데요시는 태연하게 이런 거짓말을 하면서 다음날부터 츄고쿠에 대갚음을 하게 된다.
거짓말이라면 듣기 싫지만 첩보전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형이 잘하는 분야라는 것을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는 잘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이 형이다"
그런 생각이 있었기에 휘둘려도 형을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형과 같이 전략가로, 속을 알 수 없는 적이, 형제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너구리 아버지'로까지 불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귀인으로서 우러러 보고 흠모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전국시대에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상대로 딱 한 번 정면충돌한 싸움, 그것이 덴쇼 12(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의 싸움이다.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나머지는 이에야스마저 때려 버리면, 이라고 하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어쨌든, 센가타케 전투에서는 카츠이에뿐만 아니라,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인 오다 노부타카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카츠이에에게 짐을 지고 있던 타키가와 카즈요시도 항복해, 이제는 대항할 적이 없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에 해당하는 노부오, 그리고 노부나가의 동맹 상대였던 이에야스를 어떻게 배제할 것인가. 그것이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현재의 과제였다.
"귀인으로 추앙하며 사모한다"
「귀인」이란 당주를 말하며, 히데요시가 노부오에 대해 말한 것으로 여겨지는 말이다.
노부오는 오와리·이세·이가의 삼국을 영유. 노부타다의 유자녀·삼법사의 후견역도 되어, 실질적으로 오다가의 가독을 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기세가 늘어남에 따라, 노부오는 소홀히 되어 간다. 히데요시는 셋츠의 이케다 츠네오키·모토스케 부자를 미노로 옮겨, 자신은 오오사카성의 축성에도 착수. 노부나가의 아즈치성을 웃도는 규모의 성을 쌓기 시작해 천하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한다.
나야말로 노부나가의 후계자라는 듯이, 여러 다이묘에게 서장을 내는 히데요시에 대해서, 노부오는 재미없었던 듯, 이에야스에게 접근해 간다.
그리고 덴쇼 12(1584)년 3월 6일, 노부오는 가신 중에서도,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오카다 시게타카, 아사이 나가토키, 츠가와 요시후유의 3가로를 주살. 그에 호응하여, 이에야스는 다음 7일에 하마마츠성을 떠나, 8일에 오카자키성을 나왔다. 13일에는 청주성에서 노부오와 협의하면 오와리의 고마키 산성에 본진을 두고 있다.
노부오의 반항에 히데요시는 「당연히 화를 낸다」라고 「겸견경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화를 내는 형을 보고 그 성격을 누구보다 아는 히데나가는 이에야스와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히데나가는, 이 이에야스와 격돌한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 중에, 지금까지 사용해 온 실명의 「나가히데」에서 「히데나가」로 이름을 변경. 이후에는 죽을 때까지 계속 히데나가라고 자칭했다.
히데나가는 이 이에야스와의 싸움이야말로 도요토미 가문의 행방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개명을 했을지도 모른다.
◇ 대장을 멋대로 이긴 것으로 한 이에야스
이에야스는 고마키 산성에, 히데요시는 오와리의 이누야마 성에 각각의 본진을 설치하여, 전쟁은 교착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히데요시 방에 붙은 이케다 츠네오키와 모리 나가카 등이 움직인다. 허술해진 오카자키성을 공격해, 이에야스세를 코마키 산성에서, 끌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 작전을 감지한다. 「그렇다면 병사를 보내자」(「미카와 이야기」)라고, 4500의 병사를 선발시켜, 스스로도 오다 노부오와 9000의 병사를 인솔해 추격. 멋지게 히데요시를 무찌르고 있다.
이에야스는 곧바로 가신 히라이와 치카요시와 토리이 모토타다에게 이런 서장을 보내고 있다.
"오늘 9일 오후에 이와사키에서 전투를 벌여 이케다 키노카미(츠네오키), 모리나가요시(森長可), 호리히데마사(堀秀政), 하세가와 히데카즈(長川秀一) 등 적의 대장을 시작으로 1만 명을 쳐냈다."
심지어 이대로 상락한다고까지 썼으니 의기양양하다는 것이 바로 이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의 내용은 다소 사실과 다르다.
적장 이케다 츠네오키 모토스케의 부자, 그리고 모리나가카 등을 공격한 것은 맞지만, 호리 히데마사와 하세가와 히데이치 등은 무사하다.
다음 날인 10일에는 단바 히카미군 토호인 아카이(노다) 도키나오에게도 서장을 내고 역시 전과를 적고 있다.
"어제 9일 싸움에 이르렀더니 이케다 쇼뉴(츠네오키) 등 부자 3명을 시작으로 모리 나가요시, 호리 히데마사, 하세가와 히데카즈, 미요시 손시치로, 그 외에 대장을 10여 명 외에 1만 명 정도 공격했다"
또 공격받지 않은 호리 히데마사, 하세가와 히데카즈라는 이름이 붙은 데다 이번에는 미요시 손시치로라는 이름까지 추가됐다. 미요시 손시치로는 미요시 노부요시의 통칭이며, 후일의 도요토미 히데츠구이다. 히데요시의 조카로, 이에야스에게 격파당한 별동대에서는 대장을 맡았다. 파괴적인 대패를 당하면서도 목숨을 잃고 도망쳤으며, 공격받지는 않았다.
전쟁으로부터 하루 지나 정보가 정확해지기는커녕, 보다 과장되고 있는 이에야스의 서장. 이 또한 그의 전승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히데요시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힘」을 발휘한 이에야스였지만, 후에 히데나가는 이에야스를 나라(奈良) 구경에 안내하는 등, 사이를 깊게 해 간다. 형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전혀 다른 타입인 만큼 의외로 궁합은 좋았는지도 모른다.
마야마 토모유키(전기작가, 위인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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