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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mkorea.com/7294958365
지금까지 프랑스라는 나라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갈리아 지방에는 켈트족의 분파인 골족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51년, 로마 공화국의 카이사르가 갈리아 연합 부족장 베르킨게토릭스의 항복과 함께
갈리아를 정복한 뒤 갈리아인은 라틴화되어 갈로-로만인이 형성된다.
5세기 말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커다란 정치적 공백이 생긴 갈리아 지방을
게르만족의 분파인 프랑크족의 왕이자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자인 클로비스 1세가 정복한다.
496년, 클로비스는 랭스의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는 야만족 취급을 받던 게르만족(이때 게르만족은 대부분 이단 판정을 받은 아리우스파 신도였다.)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이에 프랑크 왕국은 ‘가톨릭의 장녀’로 불리게 된다.
(폐위당하는 킬데리크 3세, 장발은 신성한 왕권의 상징이라 머리카락을 잘라내었다고 한다.)
어느덧 메로빙거 왕조는 쇠퇴하였고,
751년, 궁재 출신의 카롤링거 가문의 피핀 3세는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찬탈한다.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는 과감한 정복 전쟁을 통해
그때까지도 토착 신앙을 믿고 있던 다른 게르만족을
가톨릭으로 개종(물리)시켜 ‘서유럽’이라는 정체성을 형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843년, 프랑크 왕국은 장자상속이 아닌 분할 상속법을 따르고 있었기에,
카롤루스 대제의 3명의 손자들은 베르됭 조약을 통해 프랑크 왕국(제국)은 3개의 국가로 분할한다.
어느덧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는 쇠퇴하였고,
바이킹 침략과 내부 계승 문제에 대해 실망스러운 대처를 보인다.
이윽고 많은 귀족들이 카롤링거 가문에 대해 반발하였고
987년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을 대신하여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선출되어, 이후 카페 왕조가 시작된다.
(어째 200년 전 메로빙거-카롤링거 왕조 교체기랑 비슷한 거 같은데...)
1190년, 필리프 2세는 공문서에서 Rex Francorum(프랑크인의 왕) 대신
Rex Franciae(프랑스의 왕)이라는 직함을 사용한다.
이제부터 자신의 영지가 일 드 프랑스 지방의 프랑크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 같다.
카페 왕조 직계가 궁정음모와 흑사병 등으로 남성 후계자가 없이 모두 죽는 바람에 단절되고
카페 가문의 방계인 발루아 가문으로 왕조가 교체된다.
이후 1337년부터 시작된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대외전쟁인 백년전쟁.
이때 잔 다르크가 ‘외세인 플랜태저넷 가문 대신 적법한 발루아 가문의 왕을 세우자’라는 논리를 내세운 것을 보아,
단순히 귀족들간의 부동산 땅따먹기 전쟁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원시적인 민족주의를 형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최초의 근대적 국민국가,
즉 state가 아닌 nation으로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루이 16세가 외국으로 튀려다가 여론이 악화되어
목이 잘리기 전에
프랑스 입헌 왕국이 세워졌을 시점,
원래 직함이었던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king of france and navarre)이
왕국의 주권이 군주가 아닌 시민들에게 있다는 입헌군주적인 의미를 담은
‘프랑스인의 왕’(king of the french)으로 바뀌기도 한다.
12세기에 필리프 2세가 ’프랑크인의 왕‘에서 ‘프랑스의 왕’으로 직함을 바꾼 후,
600년 만에 (의도는 다르지만) 다시 근본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럼 여기서 프랑스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1. 갈리아 지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
2. 갈리아인이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되어 라틴화되었을 때
3. 클로비스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때
4.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가 서유럽 대부분을 정복하고 교황에게 서로마제국 제관을 받았을 때
5.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어 대머리왕 샤를이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을 때
6. 반카롤링거 귀족의 수장인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을 때
7. 필리프 2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직함을 변경했을 때
8. 백년전쟁의 종식으로 중앙집권화와 원시적 민족주의가 시작되었을 때
9. 프랑스 대혁명으로 근대적 민족주의와 국민국가의 개념이 발명되었을 때
가 있을 것이다.
"우리 조상인 갈리아족은...(Nos ancêtres les Gaulois...)"
19세기 제3공화국 프랑스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삽입된 문구라고 한다.
그리고 이는 20세기 후반까지 줄곧 이어진 "거룩한 문장"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신문과 책들이 인용하는 문구이다.
대혁명 당시, 혁명의 급진파들은 프랑스의 귀족과 왕들은 비프랑스인, 이방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그들은 갈리아를 정복한 침략자 프랑크족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부르봉 왕정 복위 기간 동안 프랑크족 조상 운동(?)이 잠시 부활했지만,
1830년 혁명 동안에 강력한 반격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프랑스인들은 선주민인 "갈리아족"이고
카이사르에 저항한 베르킨게토릭스는 프랑스의 새로운 영웅이 되어야만 했다.
나폴레옹 3세의 주도 하에 국가적인 베르킨게토릭스 민족 영웅화는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로마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 있던
부르고뉴의 알레시아 언덕 요새 위에 베르킨게토릭스의 거대한 청동상을 세우고,
이 유적지의 고고학적 발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사실 이 베르킨게토릭스 청동상은 나폴레옹 3세의 얼굴을 본 따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둘 다 전쟁에서 항복했다...)
프랑스는 갈리아족의 후예인가, 아니면 프랑크족의 후예인가?
사실 전혀 의미 없는 논쟁이긴 하다.
앞에서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프랑스는 라틴어에서 분화된 로망스어를 사용하며,
게르만족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을 정한,
켈트족이라는 혼종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16세기 이래 이탈리아인들이 대거 들어와 국정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가 민족주의 뇌절을 하며
국민적 정체성이 강조되던 19세기 당시,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등등 전 유럽에서 이민자가 몰려 들어왔다.
거기에 과거 식민지 출신이었던 아프리카, 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도 포함한다면...
반대로 제5공화국의 구국 영웅인 샤를 드골은
클로비스의 세례 1500년 기념 행사에서
"내가 보기에 프랑스의 역사는 클로비스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기원을 1500년 전으로 본 것이다.
드골이 클로비스를 프랑스의 국부로 지목한 것은
그 자신이 왕당파 가정에서 자란 보수주의자였고,
신앙심 깊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프랑스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아주 큰 상징성을 가진 역사적 사건이며,
프랑스 전통의 원천이 되는 일이다.
이는 프랑스 공화국이 엄격한 정교분리 정책인 ‘라이시테‘가 통과되고 일어난 행사였기에,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치인이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해 이러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한 공화주의자들의 반발이 있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강력한 속지주의를 추구하던 프랑스가
오히려 갈리아 민족주의에 집착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에게도
"우리의 조상 갈리아족은..."이라는 문구를 외우게 했다는 점이다.
2016년에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프랑스 국민이 되는 순간 그의 조상은 갈리아족이 된다"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프랑스의 전통주의자들은
가톨릭의 장녀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전통과 보편주의를 역설하고,
공화주의자는 갈리아인의 자유와 프랑스 혁명의 전통을 역설한다.
이 구분과 대립은 1789년 혁명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생 루이, 잔 다르크, 클로비스로 대표되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라는 정체성과
계몽주의와 라이시테로 대표되는 반교권주의 모두 '프랑스의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
프랑스사에서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게 모두 다 한 국가의 전통 ㅋㅋ
비슷한 논쟁으로 ‘영국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라는 것도 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대영제국 역사의 시작점을 카이사르가
선박과 함께 브리타니아 해변에 도착한 기원전 55년 8월 26일로 보았다.
영국의 역사도 켈트족을 정복한 로마인을 정복한 색슨족을 정복한 바이킹을 내쫓은 색슨족을 정복한 노르만족 어쩌구... 꽤나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러한 전통파나 공화파의 관점을 모두 부정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다.
민족과 국가 자체가 허구이자 근대적 발명품이며, 특별한 사명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TMI)
나치 독일이 프로파간다로 써먹은 아리안 인종 이론은
19세기 프랑스 정치인인 아르튀르 드 고비노의 논문
'인종 불평등론'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부르봉 왕가를 복원하고자 했던 극우 왕당파의 소규모 반동적 집단에 속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원래 목적은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프랑스를 정복한
아리아/게르만계 프랑크족의 후손인 프랑스 귀족이
갈로로만계 민중을 지배할 운명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런 논문을 작성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비노는 갈리아 부흥운동을 주도한 나폴레옹 3세의 외교관으로 일했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94622
Aurelius님의 글을 일부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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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이 짤 존내 웃기다ㅜㅜㅋㅋㅋㅋㅋㅋ 난 당연히 샤를마뉴 때부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뇌피셜이엇군^^…??
ㅋㅋㅋㅋ 어렵다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