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부처님은 고리족(고구려의 선조) 출신
부여를 개국한 해모수와 부여를 접수한 고두막, 그리고 유라시아를 경영한 징기스칸이 모두 고리족이다
예수는 인도로 유학을 와서 한민족의 도를 배워서 팔레스틴으로 돌아가 대중운동을 펼친 것으로 봐야 한다. 불경과 복음서 내용들의 유사함이 이를 증명한다.
Bible에는 예수가 12살 때에는 사원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서른 살 무렵에는 요르단 강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이의 17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흔히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라고 불리는, 이 17년 동안 예수는 ‘지혜와 정신적 능력을 키워왔다’고 『누가복음』에 쓰여 있을 뿐이다. 예수가 태어날 때 별을 띄우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오는 등 요란한데 비하면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 나이 13세면 결혼하는 나이라고 하는데 예수는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성경은 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 동안 예수가 인도에서 구도생활을 했으며 불교의 고승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1887년 러시아의 역사가이며 고전학자인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인도 북부의 케시미르에 있는 헤미스 사원에서 라마승이 전해준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두 권의 기록서(원본은 서기 2세기 이전의 팔리어로 기록되어 랏사[신들의 장소]근처의 한 사원에 보존되어 있다)의 연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홀거 케르스텐의 『인도에서 예수의 생애』 엘리자베스.C.프로펫트의『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민희식의『법화경과 신약성서』등의 책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불문학 박사인 민희식 한양대 교수가 신문지상(주간중앙 1986. 10. 26)에 ‘예수는 한때 불교고승이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보면 그 내용을 대충 알 수 있다.
이 기록들은 그동안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비장(秘藏)된 채 공개되지 않던 것을 민교수가 지난 여름방학을 이용, 입수해 귀국한 것으로 ‘예수가 원효대사와 같은 불교의 고승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 그는 13세때 유태법에 따라 가장권을 갖고 결혼을 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당시 소년들 가운데 유난히 준수한 ‘이사’를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어느 부호의 끈질긴 요구가 있자, 그는 비밀리에 인도 상인을 따라 인도지역으로 떠났다.
이사는 14세 때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교 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샤드 등을 공부하나, 4성 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실망을 느끼고 ‘이사’는 만인의 해탈 가능성과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예서 6년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생활을 한다.
‘이사’의 불교공부는 캐시미를 거쳐 라닥크의 레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이어 티벳에서는 그곳 밀교계 고승 멩그스테에게서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과 심령치료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불교의 고승인 이사대사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를 거쳐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29세 때 이루어진다.
이사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새로운 민중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듯 불교적 연대기에 신라 원효, 혜일대사 등과 같이 이사대사의 자세한 활동기록이 소개돼 있는데 반해, 기독교계 문헌(누가복음)이 다만 ‘그때까지(30세) 예수는 사막에 있었다’고만 막연히 기록되고 있다.
민교수는 “불교측 문헌이 정확한 이유는 순교 당시의 견문기록임에 반해, 기독교측 무헌은 오랜 세월이 경과된 뒤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까닭”이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제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확립을 위해 예수
의 기록을 비교적 정확히 기술한 『토마스(도마)복음서』 등이 지나치게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어 바이블 편집에서 삭제했다는 것.
기독교의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불교의 법화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는 민교수는 장자궁자와 기독교의 탕자의 비유 외에도 삼위일체의 삼신불에서의 유래 등 많은 부분을 예로 들었다.
부처님 생존시 10대 제자중에서 설법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는< 부루나 다라미자 >가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그 초상화를 기준으로 상호를 보게되면 굵은선 의 부드러운 적당한 곱슬 머리에 수염도 적당히 있고 이마나 안면의 선이 아주 서구도 아니고,
우리 쪽의 몽골리언 모습에 가까운 티베트인들과 의 중간 형이며 어깨 골격도 넓고 강하며 석굴암의 부처님 정도의 비율의 골격에 인간적인 굴곡이 강한 아주 호남형으로 앞가슴도 적당히 넓게 벌어진 모습 등으로 보아
석가족은 현재 네팔(티벳남부) 포탈라카국 감자대왕의 후예로서 지금의 네팔 타리이지방 카필라국에 정착하였고 코살라국의 주인이 되었으며 카필라국의 수도난다(정반왕)는 마야부인에게서 석가를 낳았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은 동쪽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고구려)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것으로 추정하는< 석존 몽고인설>을 주장하였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코리족(고구려의 선조)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정한 모습은 그리이스의 화풍이 들어간 아테네식도 아니고 후에 전통을 이어간 아리안(현재의 이란 및 인도의 종족)계통의 심목고비가 아닌 몽고계 인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현대 네팔에 샤카족이라 하여 석가모니의 후손들이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