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법법(法灋佱) / 박주병
法(법)의 고자는 灋(법)이었고, 灋의 고자는 佱(법)이었다 한다. 그러니까 佱은 法의 시조, 灋은 法의 중시조인 셈이다. 지금의 法은 灋에서 廌(치)가 떨어져 나간 거다.
灋의 왼편은 물이다. 법은 공평하기가 물과 같아야 한다. 법 앞에는 평등하다. 법의 여신은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왼쪽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물은 용기에 따라 그 모양을 바꾼다. 법은 모든 국가에 동일하지 않다. 대륙법계 영미법계로 갈린다. 또 민족에 따라 국가에 따라 그 존재형식이 다르다. 법은 법 자체만이 객관적으로 유리되어 있지 않고 민족과 국가라는 용기에 담겨 그 존립형식을 취한다.
물은 비에서, 비는 구름에서, 구름은 다시 물에서 이루어지나 흙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땅속으로 내려간 물은 다시 땅위로 흐를 날이 오기도 한다. 물의 근본적 존립기반은 땅인 것이다. 법은 도덕이나 관습에서, 도덕이나 관습은 종교에서, 종교는 성자의 법에서 연원하지만 그러나 모든 이와 같은 법(광의의 사회규범)은 사회라는 기반이 없고서는 성문법이든 관습법이든 조리든 도덕이든 종교든 존립할 수 없다. 법은 사회생활이란 사실(Sein)에 뿌리박은 당위(Sollen) 질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 자체도 순수한 사실만일 수는 없다. 인간은 어차피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발전물이다. 사실과 당위의 분리를 원치 않는 생명체이다. 그것이 곧 법이다. 법이라는 당위는 사실이라는 사회생활에서 나오고 또 돌아간다. 법이라는 사실은 당위라는 사회생활에서 나오고 또 돌아간다. 주체와 객체를 준별하는 Kant의 철학에 나는 회의를 갖는다. 당위와 사실을 준별하여 당위만이 법이라고 하는 Kelsen의 순수법학은 법의 기반을 도외시했다.
무엇보다도 물은 흐르는 것이 속성이다. 한곳에 고여 흐르지 않고 오래 되면 반드시 썩는다. 흐르는 물, 솟아나는 물은 살아 있는 물이다. 법은 무엇보다도 변천(진화)해야 한다. 흐르지 않고 한군데 유착하여 오래 되면 반드시 부패하여 공허하고 맹목적이 된다. 사회의 변천에 따라 흐르는 법, 그러한 법은 이른바 ‘살아 있는 법’(Leven des recht)이다.
물은 멀리서 보면 어두우나 가까이서 보면 투명하다. 법은 멀리 하면(위반, 불법) 어둡고(법의 제재), 가까이 하면(준유, 적법) 밝고 투명하다(법의 혜택).
물은 흘러 바다에 이르면 짜게 된다. 법은 참으로 잘 실천되면 음식의 간을 맞추는 소금과 같아 간이 맞는 균형 있는 사회를 이루게 된다.(정의의 실현)
물은 가만히 두면 소리 없이 조용하나 바람이 불고 돌 같은 것에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소리를 내고 사나워진다. 법은 가만히 두면 소리 없이 온순하나 이에 반항하면 거칠고 사나워진다. 법의 여신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물은 한 번 흘러가면 그 물이 같은 물길을 다시 흐를 수 없다. 형사소송법상, 판결이 확정되어 실체적 확정력이 생기면, 그 뒤의 사건에 대해서는 거듭 심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일사부재리원칙) 의회에서, 한 번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중에는 다시 제출할 수 없다.(일사부재의원칙)
물은 거꾸로 흐를 수는 없지만 식물의 뿌리에서 줄기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물은 경우에 따라 역류할 수도 있다. 법은 신법이 구법시의 사건에 소급해서 적용되지 않음이 원칙이나(법률불소급) 필요에 따라 소급시키기도 한다.
물은 낮은 곳에 고이고 높은 곳에는 고이지 않는 속성이 있다. 법은 낮은 곳에는 존재하나 높은 곳에는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다.(부정부패 정권)
물은 청하게도 탁하게도 변하지만 청할 때는 갓끈을 담그고 탁할 때는 발을 담그기도 한다. 법은 인간을 도덕적 성자이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평균인의 입장에서 기대되는 행위를 요구할 뿐이다.
그러나 홍수가 나면 아끼던 미루나무를 베어 제방을 구축하고 한발에는 지하수를 개발하듯이, 법이 폭군에 의하여 유린될 때에는 혁명으로 그것을 바로잡기도 한다.(저항권) 맹자의 인정사상(仁政思想)에서도 폭군의 타도를 인정한다.
다음 灋의 오른쪽을 보면 廌(치)와 去(거)로 구성되어 있다. 廌는 豸와 통용되는 글자로서 해치(獬豸<廌>) 또는 해태(海駝)라고도 하는데, 소와 비슷하다고 하기도 하고,『(說文』) 사슴을 닮았다고 하기도 하고,『(漢書, 司馬相如傳 上』弄獬廌.「顔師古注」) 양(羊)이라고 하기도 하는 등『(論衡』)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해치가 외뿔이라는 데는 일치한다. 정의는 하나뿐이란 걸 해치의 외뿔이 말해 준다. 해치는 능히 곡직(曲直)을 알아서 재판할 때 이 뿔로 죄인을 떠받아 버렸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엉뚱하게도 사자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돌 해치로 마나 볼 수 있거니와, 고대 중국에서는 법관의 관(冠)을 이 해치의 뿔(머리)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판검사의 법복 또한 어딘가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廌과 去는 결국 죄인을 떠받아 버리는 원시적인 제판 내지 행형을 상징한다.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다. 범죄는 법의 부정이요, 법은 부정의 부정이라고 한 헤겔의 표현과 같이 廌去란 부정의 부정이다.
灋은 이렇듯 형평(氵)과 정의구현(廌去)을 뜻하는 글자였는데 나중에 法으로 변해 버렸으니 신통 영명한 해치가 어디론가 달아났다. 돌로나마 해치를 많이 만들어 각급 정부 청사 특히 법원과 검찰청 청사 앞에 세우면 어떻겠나 싶다.
그런데 法의 시조 佱은 모형(模型)을 뜻한다고 한다. 人一正이란 글자 모양부터가 무슨 잣대 같이 보이지 않는가? ‘사람이 하나같이 바르다.’로 읽을 수 있지 않는가?
모형은 모범(模範)이다. 예컨대 方法 法式 의 法은 이런 뜻이다. 법의 시원은 모범에 있는 셈이다. 모법은 法의 추기(樞機)다. ‘위에서 모범을 보여라.’ 이것이 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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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후기
法자를 이렇게 말한 사람은 국내에서 내가 효시다. 이 글의 초고는 「法자의 풀이」였는데 1970년에 발표했다. 내용은 이 글과 대동소이하다.
유진오 박사를 위시한 많은 법학자며 지식인들이 法자를 파자하여 '물이 간다' 또는 'water goes'로 말했다. 추측 운전이 대형 사고를 낸 거다. 대중을 오도한 그들의 과오는 가볍지 않다. 우리는 그들 밑에서 법을 공부했다.
수필도 마찬가지, 정밀하고 정확해야 한다. 일부 수준 낮은 독자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끙끙 앓고, 쥐어짜고, 헤헤거리는 많은 글들 가운데는 혹시 'water goes'는 없는가? 긴 말 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