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드 스노우2의 좀비. [사진 중앙포토]
‘좀비가 TV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미국의 TV 가이드는 2012년 미국 케이블 채널 AMC의 대히트 드라마 ‘워킹데드’를 그렇게 평했다.
드라마와 영화, 게임, 각종 행사 등 대중문화에 깊이 침투한 것은 현 시대의 우리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
동명의 그래픽 노블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이 드라마는 작은 마을의 보안관 릭 그라임스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는 은행 강도와 맞서다가 총상을 입고 병원에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다. 그러나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온 천지에 좀비가 가득하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다른 생존자들과 합류해 좀비와 사투를 벌인다. ‘워킹데드’는 당시 미국 18∼49세의 최고 인기 TV 오락물이었다.
그 인기가 올해까지 지속되면서 AMC는 후속작 ‘피어 더 워킹 데드’를 지난 8월 23일 미국에서 선보였다. ‘워킹데드’의 전편으로 좀비 재앙의 시작을 다루며 다른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몇 달 전부터 제작 뒷이야기와 예고편이 인터넷을 뒤덮으며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고대되는 드라마로 꼽혔다.
오는 10월엔 원래 드라마 ‘워킹데드’의 시즌6가 시작된다. 좀비를 다룬 영화도 여러 편 나올 예정이다. 내년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좀비물로 패러디한 세스 그레이엄-스미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가, 2017년엔 ‘월드 워 Z’의 속편이 개봉된다.
그 정도는 빙산의 일각이다. 비디오 게임 ‘좀비4U’, 증강현실 게임, 스마트폰 앱,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좀비 행진 등 다양한 대중문화로 좀비 현상이 확산되는 중이다. 좀비 공격에 대중이 참여하는 좀비 달리기, 좀비 쇼핑몰 체험, ‘나는 좀비 재앙의 생존자’라는 TV 게임쇼도 있다.
좀비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달리 좀비의 출처는 중세유럽의 전설이나 낭만주의·빅토리아 문학이 아니다. 기원을 따지자면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부두교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좀비는 20세기가 돼서야 서구인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 미국의 아이티 점령(1915∼1934)이 그 계기다. 특히 뉴욕의 저널리스트 윌리엄 시브룩이 1929년 펴낸 소설 ‘마법의 섬(The Magic Island)’은 미국 대중의 관심을 구세계인 유럽에서 신세계로 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좀비는 그보다 좀 더 새롭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획기적인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년)이 그 시초다. 그 전엔 영화 속의 좀비가 아이티의 원조와 더 비슷했다.
‘화이트 좀비’(빅터 할페린 감독, 1932년)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자크 투르뇌 감독, 1943년) 같은 영화에 나온 좀비를 두고 한 작가는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되살아난 형태”라고 묘사했다. 좀비는 부두교 흑마술로 되살아나 독자적인 의식 없이 주인 주술사의 노예가 된다. 그 영화들에서 실제 ‘괴물’은 좀비가 아니라 사악한 주술사다.
그러다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나오면서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 산 사람을 잡아먹는 재앙으로 변했다. 그 원인으로는 망자의 뇌간을 되살리는 인공 바이러스나 방사능 노출, 또는 외계의 영향 등 단편적이거나 모호하다.
중요한 점은 이전과 달리 좀비가 주술적인 흑마술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좀비 장르는 공포물이라기보다 공상과학물에 더 가까워졌다. 여전히 독자적인 의식은 거의 없고 오로지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데만 열중한다. 그러면서 좀비의 주된 특성이 무자비함으로 변했다.
좀비 드라마나 영화는 관객이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 대다수는 원인 모를 이유로 좀비의 공격을 계속 받는 생존자를 자신에 견준다. 그 관점에선 이야기가 아주 단순하다. ‘워킹데드’의 세계에서 생존자는 끊임없이 싸운다. 안전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다시 공격 받는다.
그 생존자는 ‘영웅적인 이상형’을 구현한다. 악에 맞서 싸우고 뭔가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아주 서구적인 접근법은 한계가 있다. 좀비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생존자는 싸우고 또 싸운다.
하지만 생존자는 자신도 좀비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워킹데드’에서 생존자는 자신이 전부 감염됐으며 좀비에게 물리든 물리지 않든 죽으면 좀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는다.
이런 관점에서 일부 관객은 자신을 좀비와 동일시한다. 감정이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단지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끈질긴 욕구만 느낀다. 어쩌면 관객 대다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좀비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세계를 집어삼키는 부주의하고 잔인한 인간성의 전염병에 걸린 우리 말이다.
다른 모든 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처럼 좀비도 괴물의 속성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대한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보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좀비에 열광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