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물러가지 않아도
입춘 이후 덮친 한파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추운 날씨 속에 전날은 대중교통 편으로 부곡 온천을 다녀와 창원에 복귀해 이발했다. 나는 머리숱이 적은지라 이발은 일 년에 한두 번으로 그쳐 덜 번거롭고 남들보다 경제적이다. 염색을 해야 할 처지이긴 해도 그럴 필요도 없다. 동네에 단골로 30년 가까이 다닌 이발관을 모처럼 찾아갔더니 이발사가 다리 수술로 쉰다는 알림을 봤다.
요즘은 남성도 미장원을 찾아 머리를 정리함이 대세인지라 이발업은 사양길이 접어든 지 오래라 기술을 배우려는 신규 인력은 기대하지 못한다. 기존 이발사들도 모두가 고령이고 이발관을 찾는 이가 적으니 시내에서 이발관 영업 간판을 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시골에서는 노인이 미장원을 가지 않고 이발관만 고집하니 영업하는 이발관이 눈에 띄던 곳을 보기가 쉬운 편이었다.
어제 부곡에서 이발관이 보이길래 거기서 머리를 정리하고 오려다 북면으로 다니는 버스 차편 시각에 맞추려니 틈을 내지 못했다. 시내로 복귀해 중앙동 오거리부터 이발관이 있다는 창원호텔 맞은편 주택지 골목을 물어물어 겨우 찾아냈다. 적색과 청색을 빗금으로 두른 이발업 표시등 불은 꺼진 채여도 문이 열려 있어 다행이었다. 나이 지긋한 한 노인이 난롯불을 쬐다 맞아주었다.
의자와 이발용품들이 아주 낡아도 폐업하지 않고 손님을 받아줌만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벽면에 붙는 이발업 허가증이 내걸지 않아 이발사의 성함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르신 나이가 올해로 여든이 넘어 뵌다니 그렇다고 했다. 오래전인 68년도 부산으로 가 이발사 자격을 취득해 젊은 날 마산에서 이발관을 운영하다 창원이 신도시 개발되던 80년에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이발 자격을 취득해 창원 한 곳에서 45년째였다. 당시는 이발 기술을 배우려면 삼사 년 보조를 맡게 마련인데 주인장은 이발업에 60년 넘게 종사하는 듯했다. 벽면에 이발업 허가증을 내걸지 않음은 장성한 자녀들의 성화 때문인 듯했다. 아버지가 이발업에서 손을 놓지 못함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바깥에 이발 표시등 불을 꺼둠도 그런 사정이었다.
고령의 주인장에게 머리숱 정리를 맡겨 십여 분 걸려 마쳤다. 구렛나루가 아닌지라 면도는 귓바퀴만으로 끝내고 자른 숱을 털고 머리는 감을 일이 없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이 있듯 내 머리를 내가 정리 못해 남에게 맡긴 삯치고는 무척 싼 값이었다. 이발비는 고작 1만 원이라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어르신이 정정하셔서 앞으로 십 년을 더 뵙고 싶다면서 문을 나섰다.
온천과 이발을 마친 이튿날은 이월 초순 목요일이다. 추위가 여전해 교육단지 도서관을 찾아가는 길에 어제 들렀던 이발관 주인 어르신이 생각났다. “누구나 배고팠던 소년기 배운 기술 / 여든에 이르도록 한평생 종사해 온 / 이발업 손 놓지 못하고 지금까지 잇는다 // 장성한 자손들은 폐업이 성화여서 / 간판만 내려놓고 노련한 가위질로 / 손님은 단골로 찾아 문을 닫지 못한다”
외동반림로를 따라 걸으면서 휴대폰 문자로 ‘도심 노포 이발관’을 남겼다. 사서들의 출근과 같이 도서관에 닿아 집에서 못다 읽은 ‘화학자 홍 교수의 식물 탐구생활’을 펼쳤다. 저자는 제주 태생으로 고려대 과학교육과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물리는 부전공으로 나와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와 서울교대 재직했다. 생물에도 해박한 그가 소개한 나무와 풀꽃에서 내가 덧붙여 알 게 있었다.
점심나절 도서관을 나와 소답동 국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인근 서부경찰서를 찾을 일이 있었다. 지난해 수행했던 아동안전지킴이 봉사활동 업무와 연관된 절차를 안내받은 자리였다. 내게는 그 일보다 2층 갤러리 쉼터에 전시 중인 ‘붓으로 전하는 마음’ 전이 눈길을 끌었다. 지역에서 민화에 관심이 많은 아마추어 화가가 그린 그림들이 다수 전시되어 걸음을 천천히 옮겨 디뎠다. 25.02.06